#120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한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은 오랑캐가 아니었고 리바 델 레이는 오랑캐…가 맞을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쓰기 적절한 단어였다.
‘굳이 내가 힘들게 리바 델 레이 분타를 혼자서 다 부술 필요는 없지.’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분명 만만치 않을 텐데, 혼자서 가는 건 자살 행위였다.
다행히 언럭키에게는 좋은 수단이 있었다.
“…리바 델 레이!”
추기경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언럭키가 기대했고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더러운 놈들을 성왕 폐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제가 받은 계시가 그 놈들을 이 땅에서 지우란 것이었습니다.”
“그런…!”
언럭키는 입술에 침하나 안 바르고 말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계시를 받긴 받았지. 신이 아니라 호르헤른님께.’
아니. 호르헤른님은 신이라고 볼 수도 있나?
그렇기에 언럭키는 당당했다.
“리바 델 레이의 분타가 천공의 탑 바깥 어딘가에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가, 감히 그 간악한 놈들이 제 코 앞에 있다는 뜻입니까…!”
추기경의 얼굴은 이제 검게 보일 정도였다.
“진정하십시오 추기경님.”
보다 못한 성기사가 말렸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월도를 부서질 듯 꽉 쥔 채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갈! 당장 그 놈들 머리통을 박살내겠습니다!”
“추기경님. 하지만 나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으음….”
성기사의 말에 추기경이 멈칫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애초에 왜 유저나 세인트크리스 교단 사람들이 탑 안에서만 처박혀 살아가겠는가.
이 근처는 전부 악마의 땅이었다.
밖으로 가는 건 워프 게이트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 정도만 가능하고, 도보로 나가는 순간 어마무시한 악마들의 물량을 만나 게 된다.
‘어쩌면 리바 델 레이 분타가 여기 있는 것도 그런 지형적 특성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입구를 단단히 봉해놨기에 악마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날아서 위로 침입하지만, 반대로 인간도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그렇기에 박해받는 악신의 교단이라면 사람이 없는 악마들의 땅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으음…. 허어…. 이걸 어찌할꼬….”
추기경은 수심에 잠겨 커다란 한숨을 몇 번 내쉬었다.
고민이 정말 많아보였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성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추기경님. 아니면 폐쇄된 지하 통로를….”
“제페토 경. 그만.”
“!?”
추기경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그러나 언럭키는 이미 들어버렸다.
“지하 통로가 있습니까? 설마 바깥과 연결된 겁니까?”
그의 눈이 반짝였다.
현재 레벨 93.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이 전부 평범과는 거리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기른 눈치가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에 길이 있다고!
“성왕 폐하.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추기경님. 이미 들은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신 앞에서 거짓을 고하라는 겁니까?”
“그건….”
추기경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종교인들에게 신을 팔아서 말하는 건 언제나 잘 통하는 법이었다.
“추기경님!”
“…하아. 폐하. 이 얘기는 어디 가서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지요.”
“…제페토 경의 말이 맞습니다. 폐쇄된 통로가 있습니다.”
“바깥으로 연결된 겁니까?”
“예.”
언럭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방법이 있었구나!
추기경이 말을 이었다.
“오래 전 이 곳에 계셨던 선대 추기경님께서는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탑을 공격해오는 악마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셨죠.”
“그래서 나갈 생각을 하셨던 거군요.”
“예. 아무리 그래도 탑의 정문을 열고 나가는 건 자살 행위여서 지하를 팠다고 합니다. 탑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잘됐군요. 그걸 이용해서 리바 델 레이의 분타를 찾으러 가면 되겠습니다.”
“어렵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지하 통로는 폐쇄되었습니다.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추기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밖으로 나간 결사대는 처음엔 악마들을 많이 처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수적 우세를 넘을 수가 없어 서서히 패배했죠. 나중엔 지하 통로를 통해 역으로 악마들이 탑 내부로 들어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폐쇄한 겁니까?”
“예.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근 게 아닙니다. 악마들이 감히 올 생각 도 못하도록 수많은 함정을 깔고 몬스터를 풀어놓는 등, 아예 던전화 해버렸습니다. 그 후로 오래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진짜로 던전이 되어버렸겠죠.”
그 말에 언럭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던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처음 만들어질 때를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간 적 없는, 아주 위험천만한 던전입니다.”
그러니 성황 폐하께서는 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라고 추기경은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언럭키에게 그건 들리지 않았다.
‘던전이라고? 그것도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던전?’
최초 발견 던전이 좋은 건 월드 사가의 모든 유저가 알 것이다.심지어 언럭키는 최초 발견 도시까지 겪어보고 오지 않았던가.
그때의 꿀 같은 상황은 지금도 잘 때 종종 떠오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던전이 있다니?
‘이건 무조건 들어가야지.’
추기경이 열심히 설명한 위험성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언제 위험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가시밭길을 걸어가더라도 그 끝에 달콤한 과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아가리라!
“추기경님. 제가 거기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안됩니다.”
추기경이 단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얼굴까지 붉어지는 게, 손에 쥔 언월도를 휘두르지는 않을까 싶어 무서웠다.
그러나 언럭키 역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추기경님. 이유가 뭡니까? 제가 거기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성왕 폐하께서 자격이 없으시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추기경이 팩트를 날렸다.
“그러나 폐하는 아직 너무 약합니다. 거기 있는 몬스터들이 너무 위험할겁니다.”
“음….”
“그리고 거기 있는 함정들은 보통 함정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실력 있는 어쌔신들을 다수 고용해 만든 함정들인데, 지금은 파해법이 뭔지도 전수가 끊겼습니다. 그냥 가는 건 자살 행위란 뜻입니다.”
그 말을 듣자 언럭키의 시선이 옆에 있는 이아손에게 향했다.
가만히 고개만 살짝 숙인 채 듣고있던 이아손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거라면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
이아손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지만 언럭키는 그에게 슬쩍 한 번 웃어주었다.
어쌔신을 고용해 만든 함정?
이 쪽에는 얼마 전까지 어쌔신 로드였던 놈이 있다.
***
천공의 탑 1층.
성기사들에 의해 출입이 통제된 구역이 있었는데, 거기엔 쇠사슬로 꽁꽁 잠긴 낡은 문이 존재했다.
이아손은 그 앞에서 통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총령 각하. 아무 말씀도 없이 저한테 이런 일을 맡기시면 곤란합니다.
언럭키는 자신의 종이 통로의 함정들을 해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함정 해체가 완료되면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허가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추기경도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했다.
다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이아손의 의견은 전혀 들어가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추기경과 성기사들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던 이아손이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나중에 언럭키에게 불평을 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럭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박했다.
-이아손. 이건 네게 기회다.
-네?
-네가 두바르에서 날 왜 따라 나왔는지 잘 생각해라. 단순히 관광하러 온 건가?
-…그건 아닙니다.
두바르의 2인자이자 영주의 오른팔.
어쌔신 로드로 승진한 이아손에게는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 자리를 박차고 언럭키를 왜 따라왔을까.
이 위대한 남자의 행보를 옆에서 지켜보고, 스스로의 성장도 겪고 싶어서였다.
최소한 두바르에서 안주하는 것보다는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단 지금까지의 언럭키의 모습만 보면, 위대하다고 할 만 했다.
‘전설 속 네크로엠페러로 우리 앞에 등장하셨으면서, 이제는 성왕이라니. 도대체 어떤 게 진짜 모습이십니까.’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니.
심지어 그것들이 전부 다 전설 속에서나 보던 것들이다.
이아손으로서는 원래도 존경하던 언럭키가 이제는 마치 신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이면 일단 신뢰가 갔다.
-오래 전의 어쌔신들이 만든 함정들. 이걸 네가 해체하면서 돌파한다는 것만으로도 네 실력이 올라갈 것이다. 스스로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
-……!
-내면의 성장과 더불어 언젠가 두바르의 영주님을 다시 뵈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래도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이냐?
-아닙니다. 과연….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럭키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때문에 이아손은 기꺼이 이 곳에 왔다.
“후우.”
가볍게 한 번 심호흡을 한 이아손이 문을 열었다.
-철컹.
오랫동안 통제되고 쇠사슬로 막혀있던 문이 열렸다.
녹이 잔뜩 슬어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걸 억지로 힘을 주어 잡아뗐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너머 어둠에 잠긴 내부가 보였다.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저 안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아손에게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눈앞에 고난이 있어도 기꺼이 걸으리라.’
이 길의 끝을 나서면 자신은 한층 더 성장해있을 것이다.
언럭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틀림없을 터!
-저벅 저벅.
이아손이 안으로 성큼 전진했다.
***
[사이드 퀘스트 : 천공의 탑 지하의 폐쇄된 통로 돌파.]
-퀘스트 등급 : X.
-퀘스트 설명 : 천공의 탑 지하의 폐쇄된 통로는 위험하다. 추기경은 통로를 이용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로의 몬스터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강해야하고, 내부의 함정을 정리해야 한다. 두 조건을 완수하라.
-퀘스트 조건 : 통로의 함정 해체, 레벨 95 달성.
-퀘스트 보상 : 적정량의 경험치, 세인트크리스 교단의 공헌도.
‘휴우. 이아손이 있어서 다행이다.’
추기경과 얼추 얘기를 끝내자 이런 사이드 퀘스트가 나타났다.
조건이 까다로웠지만 또 못할 건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아손이 빠르게 함정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있는 힘을 다해 설득했는데, 일단 이아손은 알겠다고 했다.
그러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언럭키도 그 후에 바쁘게 움직였다.
추기경이 내건 두 번째 조건.
-성왕 폐하는 조금 더 강해지셔야 합니다.
폐쇄된 통로에 들어가려면 레벨 95를 달성해야 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호야. 가자.”
“뀨르!”
언럭키가 호야를 데리고 천공의 탑 2층으로 향했다.
레벨 91~95사이의 브렉토들이 등장하는 1층과 달리, 2층은 한층 더 레벨대가 높았다.
레벨 95~99의 ‘살리바르’가 등장하는 것이다.
뱀 형태에 날개를 가진 놈들은 여러 면에서 브렉토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샤아아앗!”
2층 외곽부로 언럭키가 나가자마자 기습적으로 살리바르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놈은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입을 쩍 벌린 채 날아왔다.
“성왕 폐하!”
호위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이 기습에 깜짝 놀라 언럭키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언럭키가 먼저 행동했다.
새하얗고 거대한 망치.
-퍼억!
우레를 휘둘러 살리바르의 머리통을 박살낸 것이다.
[적을 처치하셨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