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쩌저적.
알껍질 한 부분에서 시작된 금은 금세 전체로 퍼져나갔다.
언럭키는 흠칫 놀라 알을 놓칠 뻔 했다.
새어나오는 빛,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
심상치 않은 변화였다.
-파지지직!
-팍!
곧이어 알껍질의 한 부분이 박살났다.
튀어나온 건 새하얀 털에 뒤덮인 자그마한 발이었다.
연한 까만색의 줄무늬가 있었는데, 발의 주인은 답답한지 바둥거렸다.
-콰직! 콰지직!
곧이어 알은 완전히 깨어지고 그 안에서 생명체가 튀어나왔다.
“뀨르….”
“…고양이?”
그건 새하얀 털의 고양이었다.
이제 막 나와서 눈이 부시는지 제 앞발로 눈가를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이게 뭔….”
언럭키가 저도 모르게 놈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러자 머리 위로 정보가 나타났다.
[혼돈 신수 ‘백호’]
-현재 상태 : 아기.
-이제 막 부화한 신수종 ‘백호’. 신성력만 받아서 부화하지만 이 개체는 오랜 시간 순수한 마기에도 노출되어 있었기에 ‘혼돈’ 속성을 갖게 되었다.
-다양하고 많은 경험이 축적되면 성체로 성장한다.
“백호?”
언럭키가 중얼거렸다.
고양이인줄 알았는데 호랑이 새끼인 모양이다.
확실히 알고 나서 보니까 고양이와는 조금 달랐다.
하얀 털에 흐릿하게 까만 줄이 있는 것도 그렇고, 뭐랄까.
전체적으로 몸이 좀 두터웠다.
“뀨르! 뀨르!”
언럭키는 놈을 양 손에 안고 있었는데, 그게 불편했는지 바둥거렸다.
그래서 바닥에 내려주자 백호는 언럭키의 신발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다리를 핥거나 슬슬 몸을 부비기도 했다.
그걸 바라보는 언럭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동물 키우는 건 자신 없는데….”
현실에서도 한 번도 키운 적 없었다.
이 한 몸 먹고 살기도 바쁜데 동물을 키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보육원 시절부터 동물들을 귀여워하긴 했어도 직접 키울 엄두는 내질 못했다.
이 놈이 유니크 등급 알에서 나왔고 신수라고 불린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월드 사가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라고 착각할 만큼 사실성이 뛰어났다.
아기 상태라는 걸 보면 먹여주고 보살펴주고 해야 할 텐데.
해보지 않은 일이라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알을 살 때 봤던 빛이 초록색이었나 파란색이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당장 크게 도움이 되어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저 조그만 모습으로 싸움 같은 걸 시킬 수는 없을 것 같고.
내친김에 일단 물어봤다.
“너 뭐 할 수 있냐?”
말해놓고도 이걸 알아들을 수 있겠나 싶었다만…
“뀨르!”
놀랍게도 백호는 언럭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꼬물거리는 발을 움직여 후다닥 어딘가로 뛰어갔다.
역시 신수라서 그런가, 갓 태어났는데도 뛸 수가 있다니. 심지어 빠르다.
“뀨우우!”
곧이어 놈은 헥헥거리며 입에 물고 온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땡그랑 하고 바닥에 구르는 것은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골드였다.
“…자동 수집 기능 달려있다 이거구나.”
자기 PR은 확실하네.
이런 펫이라면 뭐.
일단 한번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
백호의 이름은 뒷글자를 따서 호야라고 지었다.
호야는 고양잇과 동물이지만 하는 짓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틈만 나면 언럭키에게 부비적대는 것은 물론이고 애교도 많았다.
그 놈이 뒹구적 거리는 걸 보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야 너 저리 가있어. 더 지체되면 안 되겠다.”
흠칫 놀란 언럭키가 호야를 떼어놓았다.
가뜩이나 이 직업으로는 레벨업 효율이 나쁜데, 노는 시간까지 추가되면 큰일이다.
“뀨르!”
호야는 뜻밖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그 후로 다시 사냥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저 쪽으로 가지. 저기가 악마들이 많아 보인다.”
“알겠습니다 성왕 폐하!”
언럭키가 한 곳을 찍으면 성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그 곳에 있는 악마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다.
-콰지직!
-퍼억!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공헌도 일부분이 인정되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살짝 달라진 점은, 전투가 끝난 직후에 호야가 바쁘게 뛰어다녔다는 점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골드와 잡템들을 열심히 물더니 언럭키 앞에 와서 우르르 뱉어놓았다.
“…그 작은 입에 어떻게 그것들을 전부 다 넣어온 거냐?”
“뀨르!”
“자동 수집 성능 한 번 확실하네.”
언럭키가 픽 하고 웃었다.
입 안이 어떻게 된 구조인지 몰라도, 저 작은 몸에 도저히 다 안 들어갈 만한 양이 수납되었다.
신수 특성인가?
그 후부터 사냥 속도가 살짝 빨라졌다.
호야는 이제 막 태어났음에도 눈치가 비상했다.
자기가 뭘 하면 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게 굉장히 빨랐다.
처음에는 사냥이 다 끝난 후에 부산물을 주으러 다녔다면 나중엔 적당히 전투 중에 돌아다니며 수거했다.
그렇기에 전투가 끝난 후에 잠시 골드와 아이템을 수거하느라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특히나 매번 허리를 굽혀가며 잡템을 줍다가 안 줍게 되니 그 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좋아. 네 쓸모는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부터 제대로 키워주마.”
“뀨르!”
언럭키의 칭찬에 호야는 신나서 더욱 열심히 돌아다녔다.
아예 좀 더 멀리까지 돌아다닌 것이다.
그리고 사고를 쳤다.
“어? 미, 미친. 웬 고양이가 와서 우리 레어템을 먹어버렸어!”
“…….”
저 멀리서 어느 유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언럭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실수를 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럭키가 유저들에게 공손하게 사과했다.
호야가 신나서 돌아다니다가 어떤 다른 유저들의 부산물을 훔쳐 온 것이다.
심지어 그냥 잡템도 아니고 레어 아이템을!
‘아니…그런 건 좀 몰래 가져오지….’
언럭키는 호야를 꾸짖는 척 하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몰래 훔쳐와야 돼. 알겠지?”
“뀨르!”
“저기요.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하하…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한 거예요.”
언럭키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아. 펫 교육 잘 시키세요. 한 번만 봐드립니다.”
상대 유저는 한숨을 쉬었지만 크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언럭키의 옆에서 성기사들이 눈을 부리부리 뜨고 있었던 것이다.
“저…그런데 혹시 미튜버 아니세요?”
“네?”
“미튜버 언럭키님…아니신가요?”
그때 유저들 중 한 명이 언럭키를 알아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민가한지 한참을 쳐다보더만, 곧 확신을 가졌다.
“맞죠…!? 영상에서는 네크로맨서셨는데 지금은 또 사제 같아서 헷갈렸네요. 저 정말 팬입니다.”
“하, 하하…반갑습니다.”
“직업은 또 바꾸신 거예요? 와…도대체 어떻게 매번 그러시나요?”
“…….”
언럭키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옆에 있는 성기사들이 이걸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NPC가 아니라 각각이 사고를 할 줄 아는 지성체이다.
그래서 월드 사가가 업계를 뒤흔들고 칭송을 받는 것이지만, 지금의 대화는 곤란했다.
존경하는 성왕 폐하가 네크로엠페러였다니.
‘날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무슨 모욕이나며 유저들을 공격할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언럭키는 재빨리 대화를 수습했다.
“하, 하하. 여기서 제 팬 분을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아 혹시 같이 사진 찍어도 될까요? 나중에 기회 되면 월벤에 올리고 싶은데….”
“네, 네. 그럼요.”
***
우연찮게 만난 팬과 작별인사를 하고, 언럭키는 다시 사냥에 나섰다.
확실히 성기사들은 잘 싸웠다.
“폐하께서 이번에는 이 쪽을 지목하셨다!”
“악마들을 처리하라!”
이래서 광신도가 무서운 법이다.
눈이 벌개진 채 달려드는 성기사들은 주변의 유저들마저 움찔거리게 만들었으니까.
다만 지켜보고 있는 언럭키로서는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몬스터를 이렇게 많이 잡는데…왜 내 경험치는 이것뿐이야….”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느리지 않다.
하지만 지금껏 처리한 몬스터가 몇 마리인데, 거기에 비교하면 너무 적었다.
언럭키 입장에서는 노력 대비 결과물이 너무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오 답답해.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내가 다 쥐어 패고 싶네.”
사실 하라면 못할 것도 없다.
아무리 지금 직업이 사제라고 하지만, 스텟이 없어진 건 아니다.
강력한 힘 수치라면 저런 몬스터 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다가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거지.’
체력이 쓰레기이기로 유명한 게 사제이다.
사제 전용 방어구도 있긴 하지만 당연히 가격이 비쌌다.
이제 막 사제로 전직한 언럭키가 그런걸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맞으면서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검왕’때처럼 움직임 보정 같은 게 있지 않으니 스쳐도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성기사들이 허락해주지도 않겠지.’
폐하 폐하 하면서 대우해주지만 선을 넘는 억지를 부렸을 때도 똑같이 대해줄지는 모른다.
“하아….”
딱히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 언럭키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뀨르!”
“응? 왜? 뭐 간식 줄까?”
호야가 바짓단을 물고 질질 끌자 언럭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벤토리에 두바르에서 얻었던 고기 종류의 잡템이 조금 있었다.
자동 수집을 잘 해왔을 경우에 조금씩 떼어줬더니 맛있게 먹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뀨르! 뀨르!”
“왜. 뭐 신기한거 있어?”
“뀨르르!”
한 번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호야가 크게 기침을 했다.
“크헝!”
“?”
언럭키는 진심으로 놀랐다.
기침 한 번 한 후에, 호야가 거대한 백호로 변한 것이다!
***
천공의 탑은 몬스터 리젠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한 층 외곽부 전체를 하나의 사냥터라고 볼 수 있는데, 탑을 노리고 하늘에서 악마들이 내려왔다.
“캬아아악!”
“또 온다. 공격 준비!”
악마는 등급의 유무와 상관없이 날 수가 있었는데, 먼 곳에서 천공의 탑을 침공해 온다는 설정이었다.
가장 약한 하급 악마는 1층, 강력한 악마일수록 고층에 착륙한다.
당연히 그러다보니 마법사와 궁수 계열의 유저들이 여기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퍼엉!
-콰아아앙!
하늘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 세례.
물론 악마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그렇게 처치해봤자 성벽 외곽에 앉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가자. 우리 차례 왔다!”
“열심히 또 몸 쓰러 가야지.”
그럼 그제서야 근접 계열 유저들이 나섰다.
악마들이 많은 곳으로 달려가 열심히 사냥에 나선 것이다.
사제 직업군들은 교단의 지원을 받고 편하게 사냥하니, 어찌 보면 근접 직업군이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사냥터 줄서서 들어가던 게 얼마 전인데. 마음껏 사냥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괜찮지.”
“암. 그렇고말고.”
마법사나 궁수들처럼 아무데나 스킬을 쏴대도 맞는건 아니고 사제들처럼 부하 성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만족했다.
그러고 있는데, 그들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지금 뭐가 날아가는데? 몬스터인가?”
“근데 딱 봐도 브렉토랑은 너무 다른데? 하얗게 생긴 게 꼭 무슨 호랑이 같아.”
크고 하얀 호랑이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
“어? 저 그 위에 사람 타 있는 거 아냐?”
심지어 멀어서 잘 안 보였지만 그 위에는 사람까지 타고 있었다.
-이야…하하하하하!
신나서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신기한 장면에 절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곧, 그 몬스터인지 사람인지 모를 무언가는 브렉토들을 공격했다.
-콰직!
-서걱!
브렉토 무리를 휘저을 때마다 놈들이 죽어 가루로 사라졌다.
유저들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뭘 본거냐?”
“아니…무슨 특수 NPC라도 뜬 건가?”
유저들이 하나둘씩 위를 쳐다봤다.
그 중에는 아까 팬이라며 대화를 사진을 찍어갔던 유저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금 전에 봤었기에 똑똑히 기억했다.
“어, 언럭키님?”
대충 입은 인상착의만 봐도, 그건 언럭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