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천공의 탑으로 방향을 잡은건 퀘스트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퀘스트만 할 생각은 없었다.
“성왕 폐하께서 여기 오셨다는 건, 드디어 악마들에게 종말이 올 것이라는 신의 뜻이겠군요.”
추기경이 경건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옆에 있던 성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엉거주춤 서 있는 사람은 언럭키와 이아손 뿐이었다.
“실례지만 폐하께서는 아직 성호를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음,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예절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성서에 적힌 성왕의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하죠.”
성왕이란 세습직이 아니고 나이 먹는다고 얻는 것도 아니다.
우연히 세상 사람 중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성왕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태어난다.
그럼 그는 성장하기 전에, 또는 성장 도중에 교단에서 모시러 온다.
그 후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받은 후, 진정한 성왕으로서 교단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언럭키는 직업 선택으로 성왕이 되었지만 아직 지식은 백지 상태였다.
그러나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허허. 아니면 바로 교단의 성지로 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돌아다니면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언럭키가 급하게 말했다.
잘못해서 교단으로 끌려(?)갔다가는 거기에 계속 짱박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교단으로 가셔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시는 게…”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
교단. 특히나 세인트크리스 같이 엄격한 곳은 계시라는 단어라면 껌뻑 죽는다.
“오오…. 신의 계시를 행하시고 계셨습니까. 그 분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땅의 악을 처치하고, 나아가 더 많은 척박한 땅을 돌아다니라는 계시였습니다.”
“아…. 역시 신께서는 언제나 저희들을 굽어살피시는군요.”
한층 더 감격해 성호를 그리는 추기경과 성기사.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계시를 수행하고 계시는 폐하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죠. 다만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온 힘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추기경과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가 한 말은 단순히 입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언럭키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하얀 갑옷의 성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성왕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성왕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10명의 성기사와 2명의 사제.
‘성왕’ 언럭키를 모시기 위한 자들이었다.
***
천공의 탑은 레벨 90~120 사이의 유저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특이하게 도시 전체가 탑의 형태로 생긴 장소이다 보니 사냥터 역시 각 층에 분포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탑의 외곽. 바깥에서 탑을 향해 날아드는 악마들이 그 적이었다.
“바로 2층으로 가시는 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왕 폐하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보통은 1층부터 차례차례 밟아나가죠.”
성기사 한 명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각 층은 3~4레벨 단위로 악마들의 급이 나뉜다.
1층은 90~95레벨의 악마들이 나타나고 2층은 96~99, 3층은 100~102…
이런 식으로 사냥터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 탑에 처음 온 유저의 레벨은 90일 터.
당연히 1층부터 차례대로 밟아나가며 성장해 나가는 게 정석이었다.
“괜찮다. 바로 2층으로 가겠다.”
그러나 언럭키는 처음부터 천공의 탑 2층을 고집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3층이나 4층으로 한번에 가고 싶었다.
그의 스펙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 느꼈으니까.
“음. 추기경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폐하께서 강력하게 주장하시면 그에 맞는 증명을 보이셔야겠지요.”
“증명이라면?”
“추기경님과 대련을 하셔야 합니다.”
“…….”
조금 전에 봤던 추기경의 강력한 모습과 언월도가 떠올랐다.
어지간한 기사급도 씹어 먹을 것 같은데…
“…혹시 추기경이 성기사 계열의 특별한 직업인가?”
“아뇨. 그냥 조금 특이한 사제님이시죠.”
“그렇군.”
언럭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1층부터 차근차근 가겠다.”
괜히 위험하게 무리하지 말자.
한 계단 한 계단씩, 빠르게 밟아나가면 그만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언럭키가 1층 외벽으로 갔다.
거세게 부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푸른 하늘과 그 위로 높게 솟은 거대한 탑의 모습이 보였다.
“캬아아악!”
“죽어 이 새끼야!”
“키엑! 키엑!”
“아오. 진짜 오지게 안 맞네.”
그리고 그런 탑을 향해 달려드는 악마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유저들이 바글거렸다.
[하급 악마 브렉토]
-레벨 : 91.
박쥐를 닮은 악마 몬스터인 브렉토는 레벨대가 90~95로 분포되어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놈들이 폐하의 웅혼한 신성력을 노리고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언럭키 주변을 호위하던 성기사가 말했다.
영 틀린 말 같았다.
‘이 인의 장벽을 뚫고 어떻게 오겠냐.’
성기사들은 방패를 든 채 언럭키의 주변을 완벽하게 둘러쌌다.
악마들은 유저들과 전투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설사 몇 마리가 여기로 온다고 해도 성기사들에게 짓이겨 죽을 것이다.
그때 몇몇 유저들이 언럭키를 발견했다.
“어? 저기 가운데 있는 사람 유저 아님?”
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은 원체 눈에 띄는데, 그 한가운데에 대충 주워 입은 복장의 사람이 있다니.
“또 좋은 직업의 사제 왔나보네. 하…부럽다.”
몇몇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사제나 성기사 직업군의 유저들은 천공의 탑에서 꽤 편하게 레벨업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직업의 등급에 따라 추기경이 성기사나 사제들을 붙여준다.
노멀급은 1명, 레어급부터는 몇 명씩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데 언럭키에게 붙어있는 건 무려 열둘이었다.
성기사 10명에 사제 2명.
“근데 저거 좀 자세히 봐 봐. 데리고 다니는 성기사 숫자가 너무 많은데?”
“12명? 설마…레전더리?”
과거 랭커들 중 레전더리 급 사제가 이 도시를 지나쳤을 때 12명의 NPC들을 데리고 다녔다.
저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레전더리 등급의 직업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우와…부럽다…레전더리라니….”
“또 어디 외국 갑부인건가?”
직업 뽑기를 여러 번 하려면 큰돈을 써야하기에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때, 브렉토 한 마리가 언럭키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캬아아악-!”
성기사들이 눈에서 불꽃을 뿜었다.
“사악한 악마여.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쾅!
방패를 찍고 철퇴를 휘두르자 브렉토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 위로 사제들의 지원 사격이 이어졌다.
브렉토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야. 혼자만 자동사냥 하고 있네.”
“월드 사가는 밸런스 패치가 시급하다 진짜. 누구는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치는데 누구는 뒤에서 숨만 쉬고 있고 말이야.”
“꼬우면 직업 똥으로 뽑은 네 운빨을 탓해야지.”
“에휴. 그거야 그렇다만서도….”
유저들은 질투와 시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자신들은 힘들게 등산하는데 옆에서 로켓 타고 올라가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이 상황에 불만인 건 언럭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게 뭐가 좋아. 얘네들이 잡는다고 내 경험치가 되는 것도 아닌데.’
성기사들이 브렉토를 처치했지만 기여도는 0%라서 경험치가 하나도 안 들어왔다.
벌써부터 해골 군대를 부리던 시절이 그립다.
해골이 처치해도 내 경험치였으며, 심지어 직업 특성으로 경험치 보너스 10%까지 붙어 있었는데.
과거 생각만 하며 불평해봤자 끝도 없다.
최대한 할 수 있는걸 해야 한다.
언럭키는 가장 몬스터가 많아 보이는 곳을 지목했다.
“저 쪽으로 가지.”
“저기는 악마들이 너무 많아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고지식한 성기사들 같으니라고.
언럭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악을 벌하는 것에 육신의 안위를 챙겨서야 되겠는가. 설사 내가 바스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많은 악마들을 처치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조금 귀찮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줘야 이들이 딴지를 걸지 않을 것이다.
“오오…역시 폐하의 희생정신은 남다르시군요.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
“블레스.”
언럭키가 손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새하얀 빛이 뻗어나가더니 성기사들에게 스며들었다.
“힘이…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성왕 폐하께서 내리는 축복인가….”
성기사들이 절로 성호를 그리며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럴 만했다.
[블레스]
-스킬 등급 : 레어.
-스킬 효과 : 대상의 힘과, 민첩, 체력을 상승시킨다.
직업을 선택했을 시 기본으로 주어지는 스킬들 중 하나, 블레스.
그러나 여기서 오오라가 적용되면 조금 달라진다.
[하이 홀리 오오라(패시브)]
-스킬 등급 : 레전더리.
-스킬 효과 : 모든 신성 주문 계열 스킬들의 효과를 대폭 상승시킨다.
-성서에 나오는 성왕들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유의 오오라이다.
간지 용도로 썼던 패시브 오오라이지만, 이건 모든 스킬들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 된 블레스의 효과는 다음과 같았다.
[블레스(오오라 적용)]
-스킬 등급 : 레어.
-스킬 효과 : 대상의 힘과, 민첩, 체력을 대폭 상승시킨다.
-최대 10명에게까지 블레스 효과를 적용시킬 수 있다.
대폭 상승된 효과를 10명에게.
게다가 블레스 뿐만 아니고 광역 힐이나 저주 해제, 디바인 포스 등에도 적용되는 패시브였다.
“성왕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
“악마들의 머리를 깨부숴라!”
성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달려들었다.
새하얀 신성력이 피어나는 철퇴를 마구 휘둘렀다.
-퍼억!
-콰직!
원래부터도 강한 성기사들인데 성왕의 블레스까지 받았다.
하급 악마 브렉토 쯤이야 상대도 안 된다.
브렉토 무리 6마리가 전멸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띠링!
[성기사 제페토가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공헌도 일부분이 인정되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이번에는 언럭키의 축복이 기여를 했다고 판단되어 경험치를 얻었다.
‘쯧. 이렇게 해도 고작 30%밖에 안 되네.’
6마리를 잡았지만 혼자서 2마리를 잡은 것만도 못한 성과였다.
네크로 엠페러 때보다 확실하게 부족하다.
‘부족하면 더 열심히 뛰어야겠지.’
결국 언제나 그렇듯,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
언러키는 천공의 탑 1층 외곽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몬스터가 조금 뭉쳐있다 싶은 곳이면 일단 손가락부터 들었다.
“이번에는 저기로 가지.”
“알겠습니다 성왕 폐하!”
그러면 충성스런 성기사들이 미친 듯이 돌진해 몸부터 들이밀었다.
-콰지직!
-퍼억!
[공헌도 일부분이 인정되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성기사들이 워낙 과격하게 주변을 쓸어버리느라 일부의 경험치만 받는 건데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사냥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런 거였다.
사냥터 문제도 딱히 없었다.
“여기는 우리가 사냥하고 있던 자리인데…”
“형제님. 이곳의 악은 저희들이 처리 할테니 저리 비키십시오.”
“아, 아니….”
성기사들은 언럭키가 찍은 곳이라면 유저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달려들어 자리를 차지했다.
차마 성기사들에게 반발하지 못한 유저들은 궁시렁거리며 떠날 수밖에 없었다.
‘두바르처럼 사냥터 독점은 못해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나.’
그나마 성기사들이 쓸모 있는 부분 중에 하나랄까.
그렇게 나름 평화(?)롭게 사냥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음?”
인벤토리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파앗!
의아해하면 뭐 때문에 그런지 확인을 해 봤는데, 알에서 새하얀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두바르 암시장에서 싼값에 구매했었던 ‘신비의 알’.
거래 불가에다가 언제 뭐가 태어날지도 몰라서 그냥 인벤토리에 박아 넣은 채 잊고 있었는데…
-띠링!
[신비의 알이 강력한 신성력을 일정 용량 이상 받아들였습니다.]
[부화가 시작됩니다.]
쩌적 소리와 함께 알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