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정확히 얼마가 있어야 우리가 여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요?”
백현이 물었다.
‘우리’ 라는 단어가 박세훈과 이용승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동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 그래. 그건 계산이 그리 어렵지 않지.”
박세훈은 떨리는 목소리를 약간 감추며 말했다.
“백현 씨가 만약 우리 빚까지 갚아준다면…”
“그 전에 잠깐. 공짜로 하는 거 아닙니다.”
백현이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호구도 아니고. 그거 갚을 때까지 제 밑에서 일하셔야 되는 거예요. 계약서도 쓸 겁니다.”
쉽게 말하면 빚을 갚는 대상이 (주)머니앤캐시 에서 백현으로 바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건 모두가 윈-윈하는 방법이다.
박세훈과 이용승 입장에서는 아무렴 성 팀장보다는 백현이 훨씬 좋다.
백현 역시 믿고 함께 가기로 했던 팀원들을 챙기는 건 당연했다.
‘사실 나 혼자서는 여길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니까.’
성 팀장의 악독한 손아귀에서 혼자 애쓴다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마 박세훈의 도움이 없다면 힘들 것이다.
힘을 합쳐야 한다.
허나 그렇다고 퍼주고 싶진 않았다.
오래된 친구조차 편지 하나 툭 남기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할 거면 철저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거 참. 주인님으로 모시고 살기라도 해야 하나?”
박세훈이 다시 평소의 능글능글한 모습으로 돌아와 킬킬거렸다.
“그래. 깔끔하고 좋네. 그렇게 하자고.”
“저도 좋습니다.”
이용승도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리머 언럭키의 전담 편집자로서 사는 건 그가 지금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여기 온 것도 어느 BJ에게 빠져서 빚내서 후원했기 때문인데, 지금 이용승은 편집자이면서 동시에 팬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언럭키의 영상을 편집할 때마다 기뻤다.
그걸 계속 할 수 있다면 돈은 안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의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백현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 얘기해보죠. 두 분 빚이 얼만가요?”
“전 3억입니다.”
이용승의 말에 백현이 시선을 돌렸다.
박세훈을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7억.”
“…예?”
“크흠.”
백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자 박세훈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좀 많지? 사실 내가 옵션 거래에 왕창 넣은 적이 있는데 그걸 완전히 말아먹어가지고 말이야. 하하….”
“…….”
“…안 웃긴가?”
“예.”
백현이 입을 다물자 주위가 침묵에 잠겼다.
박세훈도, 이용승도 그의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백현이었다.
***
“끄응….”
오전의 식사자리를 빙자한 미팅을 끝내고 언럭키는 월드 사가에 접속했다.
그의 머릿속에 숫자 하나가 계속 떠돌아다녔다.
‘나 포함 세 명이 빚을 다 갚는데 15억이 필요하다니.’
15억!
어마무시한 숫자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웃긴 건,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이 속도면 글쎄. 그리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5억의 빚이 생겼을 때 얻은 좌절감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어쩌면 1년도 안 되서 빚을 다 해결하고 그 이상의 돈이 생길 것 같다고.
한참동안 생각하던 언럭키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뭐가 어쨌건, 일단 지금은 눈앞에 닥친 현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
언럭키는 리바 델 레이 분타 내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최대한 빨리 퀘스트를 완료하고 여기를 뜨기 위해서였다.
외부에서 막 들어온 입장이라 접근 금지인 구역도 많았다.
탐색을 많이 하면 퀘스트 성공 메시지가 뜰까봐 부지런히 노력했다.
“사제님. 이렇게까지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하하.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싶더군요.”
“역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부제들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출입 가능한 지역을 조금씩 늘려갔다.
그러면서 몇 번의 사이드 퀘스트가 더 나타났다.
그러나 데저트 웜의 서식지 같은 쓸모 있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부제 누구누구의 잡일을 도와주기, 업무를 도와주기 등이었을 뿐. 그런 건 해결해봤자 10점, 20점의 공헌도밖에 주지 않았다.
[현재 보유한 리바 델 레이 공헌도 : 1124점.]
며칠간 소중한 시간을 쏟아부었음에도 언럭키가 얻은 건 고작 124점이었다.
“아오. 진짜.”
언럭키가 괜시리 복도 벽을 발로 후려찼다.
분통이 터졌다.
“이 놈의 퀘스트는 언제 끝나는 건데?”
밤늦은 시간까지 부제 한 명의 잡일을 도와주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밖으로 나가 필드를 돌아다니며 사냥이나 하고 싶었다.
몬스터는 많이 만나기 힘들겠지만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겠지.
그 순간이었다.
“이보게.”
“!”
누군가 바로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언럭키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직업이 네크로 엠페러로 바뀌었다지만 이런 근접거리까지 접근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언럭키가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다시 보니 살짝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망토를 뒤집어 쓴 헤탄이었다.
“헤탄님?”
“쉿. 듣는 귀가 어디 있을지 몰라.”
“아니…여긴 어떻게…?”
언럭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탄님이 여기는 어떻게 계시는 겁니까?”
헤탄은 자신에게 잘 해보라고 퀘스트를 맡겼을 뿐이다.
헌데 그 퀘스트의 주체인 그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유야 뻔하지 않겠나? 나도 자네처럼 잠입해 들어왔지.”
“…어떻게요?”
이 곳 분타 주변에는 대결계가 쳐져있다.
어둠 속성이 아니라면 통과하지 못하는 강력한 결계.
언럭키가 굳이 직업을 네크로 엠페러로 바꾼 이유도 그 결계를 통과하기 위함 아니었던가.
헌데 헤탄은 어떻게 여길 왔지?
“이것 덕분일세.”
헤탄이 자신의 망토를 보여주었다.
반대편이 다 통과되어 보이며 뒤집어쓰면 미세한 실루엣만 보이는 물건.
“투명망토입니까?”
“잘 봤네.”
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을 숨겨주는 건 물론이고, 결계의 탐지까지 속여 내는 망토일세.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들어왔지.”
언럭키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저한테 빌려줬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이렇게 개고생 하고 있을 필요도 없는데.
“이건 호르헤른 가문의 보물이야. 함부로 막 빌려줄 수는 없어.”
“…….”
“내가 빌려주기 싫다는 게 아니고, 가문 소속이라는 인장이 있어야 사용할 수가 있는 물건이라서 그렇다네. 우리 가문 소속이 되고 싶나?”
“아, 그런 거였군요.”
언럭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호르헤른 가문이 잘해준다고 해도 어느 한 단체의 소속이 되는건 위험하다.
지금은 자유의 몸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어쨌거나. 하마터면 서운할 뻔 했다.
저런 아이템을 숨기고 있다니.
“그래서. 분타 내부는 좀 살폈나?”
“아, 네.”
언럭키는 그 때부터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례를 받은 장소는 어땠고 부제들이 생활하는 곳은 어디인지 등.
며칠간 머무르면서 내부를 열심히 돌아다녔기에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의 대장으로 추측되는 놈은 반오라는 사제입니다.”
“반오. 어떤 성격인가?”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자입니다. 웃는 얼굴로 인자한 척 하지만 속에는 구렁이가 몇 마리나 있는지 모를 만큼!”
언럭키는 잊지 않았다.
반오가 보물창고 속 보물들을 보여주며 250만점이나 되는 공헌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을.
그건 기만이다.
데저트 웜 서식지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서 얻은 게 고작 1000점이었다.
그 외에 부제들 뒷처리를 도와주며 얻은 자잘한 점수들이 십점 단위였고.
죽을 때까지 모아도 250만점은 못 모은다.
‘이게 기만이지 뭐야. 아주 더러운 기만.’
실실 웃는 얼굴로 사람 약올리기나 하면 좋나 몰라.
한 때는 교단이 좋게 느껴질 뻔했지만, 이제서야 깨달았다.
리바 델 레이 교단은 악의 소굴 그 자체였다.
반오 사제는 최악의 악당이었고!
“진정하게.”
분노로 불타는 언럭키를 헤탄 쪽에서 말려주었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사교도들이 다 그렇지 뭐.”
“역시! 헤탄님은 절 이해해 주시는군요!”
과연 전장의 백전노장 출신, 호르헤른 가문 최고(?)의 정보원다웠다!
“다만 내가 듣고 싶은 건 놈들의 전투 가능한 전력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일세.”
“…….”
여기서 언럭키의 말이 뚝 끊겼다.
동시에 왜 지금껏 퀘스트 성공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아챘다.
퀘스트 창을 보면 놈들의 구성원과 조직 체계, 전력을 알아오라고 했다.
구성원과 조직 체계까지는 얼추 알아봤지만 전력은 모른다.
그 음흉하고 사악한 반오 사제가 전투용 부제들이 있는 곳은 출입을 엄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출동할만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서 언럭키는 곁가지 사이드 퀘스트나 하며 입맛만 다셔야 했다.
“으음. 모르나보군.”
“…죄송합니다. 아직 시간이 부족하여 그것까지는 잘….”
“괜찮네. 어쩔 수 없지. 대신 다른 제의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수 있겠나?”
“예! 얼마든지요!”
언럭키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퀘스트에 실패하는 줄 알고 흠칫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띠링!
[퀘스트가 새롭게 갱신됩니다.]
[퀘스트 : 리바 델 레이 분타 공격.]
-퀘스트 등급 : 레전더리.
-퀘스트 설명 : 정보원 헤탄은 리바 델 레이 분타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를 도와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퀘스트 보상 : 대량의 경험치, 레전더리 아이템.
-퀘스트 성공 시, 연계 퀘스트 수행 가능.
‘응?’
언럭키는 당황했다.
잠입 임무를 준지 얼마나 됐다고 직접 찾아와서 여길 공격하라는 말인가?
“헤탄님. 이건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겨우 저희 둘이서 공략할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언럭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까놓고 말해서 이건 불가능한 임무였다.
분타 내부의 전력은 잘 모르지만 부제급 다수에 사제도 최소 1명 이상이다.
온화한 척 얘기하던 놈들이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차라리 사신 직업일 때야 몰래 암살하고 다니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우리 둘이 아닐세. 지원군이 있어.”
“예?”
“자네가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호르헤른님께 연락이 왔네. 도시의 정적을 제거하고 내친김에 영주 자리에까지 오르셨다더군.”
“!”
호르헤른이 있는 곳은 도시 빌리프펜이다.
그가 처음 언럭키에게 의뢰를 맡긴 이유는 도시 귀족관의 정치 때문에 상황상 병력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였다.
헌데 그런 그가 영주님이 되었다니….
‘내가 잡은 끈이 튼튼하구나!’
“헤탄님. 호르헤른님께 제가 정말 축하드린다고 전달 부탁드립니다. 꼭 좀요!”
“…알겠네. 그러니 그렇게 매달리지 말아주게. 어쨌거나 호르헤른님은 그 후로 내 보고를 받으시더니 지원 병력을 보내주셨어.”
“얼마나 됩니까?”
“기사 다섯과 병사 20명일세.”
“!”
언럭키는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기사급이라면 네르센에서 집사를 잡을 때 한 번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고작 기사 한 명이었는데도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보였다.
그런 기사가 다섯 명이라고?
‘거저먹는 퀘스트가 됐잖아!’
언럭키가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놈들을 두고 볼 수 없군요. 당장 쳐들어가서 끝장을 보겠습니다.”
언럭키의 시선이 분타 내 어느 한 방향으로 향했다.
자고로 이런 공성전의 꽃은 전투 후 있을 약탈 아니겠는가.
‘공헌도 250만점? 엿이나 먹으라 해.’
조만간 거기 있는 거 다 쓸어가 주겠다!
언럭키의 눈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