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언럭키는 헤탄의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퀘스트도 받았겠다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결계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목표 장소까지 가야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반 유저는 입장이 불가능한 대결계가 처져 있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언럭키가 인벤토리에서 짤막한 지팡이 같은 물건을 꺼냈다.
끝에 장식되어있는 검은색 보석이 인상적인 ‘그레고녹의 홀’이었다.
보스 몬스터 아르만시아를 잡고 얻은 레전더리 아이템인데, 그 정보를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단, 마법사 유저가 그레고녹의 홀을 착용하면 ‘네크로맨서’로 전직됨.
마법사가 아니라면 착용할 수 없는 아이템이고, 착용하면 네크로맨서로 전직이 된다.
네크로맨서는 당연히 어둠(黑) 속성의 직업이다.
월드 사가의 직업이 뽑기라고 해도, 대부분의 유저는 평범한 직업을 얻는다.
그중 극히 일부분이 어둠 속성을 얻었는데, 거의 다 캐릭터를 다시 만들었다.
-직업 뽑기에서 암흑 기사 떴다…. 진짜 재수 더럽게 없네.
-오 너도냐? 나도 흑마법사 떴는데ㅋㅋㅋㅋㅋㅋ.
-우리 사이좋게 캐릭터 새로 만들면 되겠다 ^^.
얼마 전 언럭키가 월벤 자유게시판에서 봤던 내용이다.
어둠 속성 직업이 스펙적으로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공격력 면에서는 더 좋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어둠 속성 직업은 들키는 순간 도시에서 쫓겨나는데.”
능력을 쓰는 걸 도시 경비에게 들켰다간 바로 추방이다.
혹여나 죄를 짓기라도 하면 벌도 훨씬 크게 받는다.
며칠 감옥에 갇힐 걸 몇 주 동안 갇힐 수도 있는 것이다.
유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치명적일 수가 없었다.
듣기로는 평범한 도시 말고, 외부로 나가면 어둠 계열 NPC들이 모여 사는 빌런들의 도시도 따로 있다고는 하는데…
“후우. 별수 없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언럭키가 시야 한편에 떠 있던 메시지들을 불러왔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올마스터로서 새롭게 직업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기존 직업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새로운 직업을 획득한다면 ‘사신’ 직업의 성장세는 현 상태에서 저장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직업]
[1. 검사]
[2. 마법사]
[3. 궁수]
[4. 암살자]
[5. 사제]
바로 어제 나타났던 메시지들이다.
암살자 직업을 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한 달이 지나갔는지.
솔직히 아쉬웠다.
당장 얼마 전에 사신극검이 진화하며, 제한적이긴 하지만 검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현 레벨대에서 검기를 쓸 수 있다면 보스몹도 1대1로 잡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건만. 이걸 포기해야 하다니.
그러나 별수 없었다.
‘제기랄. 그럼 그렇지. 어째 내가 요즘 술술 잘 풀린다 싶었다.’
UNLUCKY.
자신의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최근에는 돈도 좀 잘 벌리고 게임이 쉽다 싶었는데, 여지없이 고난이 생겨버렸다.
‘이건 게임사를 욕해야 하는 건가?’
왜 월벤에 가면 유저들이 그렇게 월드 사가를 욕하는지 절절히 공감이 갔다.
‘도대체 어떻게 깨라고 이딴 퀘스트를 만든 거야?’
월드 사가 개발진의 머릿속을 열어 그 생각이 어떤지 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마법사를…선택한다.”
언럭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대마법사(레전더리)’ 직업이 적용됩니다.]
-파앗!
언럭키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며,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 몇 개가 인벤토리로 강제로 들어갔다.
마법사는 천 쪼가리밖에 못 입고 완드나 지팡이 계열만 들 수 있기에 제한이 걸린 것이다.
“아 젠장. 엿 같네 아주.”
언럭키가 중얼거렸다.
레전더리 등급인 고대 흑기사의 갑옷과 사신극검의 착용이 해제되었다.
강제로 힘이 빠지고 몸이 늘어지는 느낌에, 예상했음에도 절로 빡침이 올라왔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으…. 젠장 젠장.”
이제 마법사가 된 언럭키는 눈을 딱 감고 그레고녹의 홀을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왕홀 끝에서 검은 번개가 몰아치더니 언럭키를 휘감았다.
-띠링!
[그레고녹의 힘이 전수됩니다.]
[직업이 변화합니다.]
[어둠(黑)계열 직업 ‘네크로맨서’를 획득합니다.]
해버렸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나 진짜…잘한 거 맞겠지? 괜찮겠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언럭키는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꼼짝없이 한 달간은 네크로맨서로 지내야 한다.
어쩌면 퀘스트가 길어짐에 따라 그보다 더 있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도시 경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어 다니자.
원래는 높은 명예 수치로 인해 도시 경비들에게 목례 정도는 받던 언럭키였지만, 이제부터는 담벼락 그림자 사이로 다닐 생각이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고. 이대로 퀘스트 성공해서 귀환하면 되지.’
왕의 귀환이 뭔지 보여 주겠다.
그때는 보무도 당당하게 도시를 거닐 것이다!
그렇게 언럭키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띠링!
[올마스터의 힘이 그레고녹의 홀에 영향을 미칩니다.]
[직업 ‘네크로맨서’ 가 변화합니다.]
[새로운 직업이 주어집니다.]
[언데드들의 황제. <네크로 엠페러> 직업을 획득합니다.]
“…뭐?”
추가적으로 자신의 몸을 휘감는 어두운 기운을 보며 언럭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저녁시간.
“후웁. 후웁.”
백현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하는 중이었다.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월드 사가를 플레이하는 언럭키.
아무리 캡슐 기술이 좋다고 해도 몸이 축나지 않을 수는 없다.
프로가 되려면 몸 관리는 당연히 해야 하는 법.
그렇기에 그는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하루의 마지막은 운동으로 끝냈다.
“서른하나…서른…둘….”
벽 사이에 매단 철봉으로 턱걸이를 하는 백현.
이제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잔근육이 꿈틀거리고 바닥으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으아.”
바닥에 주저앉은 언럭키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32개까지 기록을 갱신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운동이 최고이다.
백현은 아까 전에 떴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네크로 엠페러. 듣도 보도 못한 직업이 나타났다.
“후우…. 보아하니 앞으로 머리 싸매고 고민 좀 해봐야 겠네.”
직업 네이밍만 보더라도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월드 사가는 좋은 직업을 얻는다고 끝이 아니다.
그에 걸맞은 아이템과 스킬을 연구하고 사냥법은 고민해야 한다.
전사 같은 평범한 직업이야 육성법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히든 직업은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그 역시 아직 올마스터란 직업을 잘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검왕’ 과 ‘사신’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네크로 엠페러’라니.
일단 잘 시간이 되어 접속을 종료했지만 그 후에도 도무지 관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운동을 하니 조금 개운해졌다지만 그럼에도 심경이 복잡했다.
이렇게 누우면 잠이 안 올 게 확실하다.
백현은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했다.
월벤에 접속해 요즘 뉴스거리와 동향들을 살피다보니 시간은 금방 갔고, 그러다 보니 이메일도 들어갔다.
“또 쓸데없는 광고들이 들어왔네.”
백현이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스트리머 언럭키 채널에는 이메일을 적어놨기에, 광고 요청 연락이 가끔씩 들어왔다.
다만 대부분은 쓸모가 없는 먹방 광고였다.
의외로 게임 속 스트리머들의 현실 모습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직 얼굴 공개를 안 한 스트리머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음식을 광고하려는 프렌차이즈들이 많았다.
당연히 백현이 할 수는 없는 광고였다.
먹방이라니.
“장난치냐. 여기서 어떻게 치킨을 시켜먹어.”
배달 시켰다간 입구컷 당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음식은 건물 앞을 지키는 덩치들한테 빼앗길 테고 그럴 돈 있으면 어서 빚부터 갚으라는 구박만 듣겠지.
같은 이유로 짜장면, 피자, 햄버거 등의 음식은 구경도 못해본다.
그래서 이 곳의 빚쟁이들은 여기를 감옥이라고 부른다.
그나마 월드 사가의 작업장에서는 가상의 맛있는 음식들을 제공해 준다니 버티는 것뿐이지.
“응?”
그때 백현의 눈에 색다른 제목의 이메일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대룡 미디어의 컨텐츠사업팀 담당자 이혜미입니다. 이번에 연락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고 저희 팀에서 새롭게 기업 광고를 할 홍보 미튜버를 물색 중인데 관심 있으시다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차후 미팅을 잡아 말씀드리고 싶으며…]
대룡 미디어.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대룡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이다.
미튜버가 떠오르면서 그들을 서포트해 주는 매니지먼트와 광고 회사들도 많아졌는데 대룡 미디어는 단연 그쪽 업계에서 탑급이었다.
“…얘네가 왜 나한테 메일을 보내?”
문제는 백현의 이름값이었다.
스트리머 언럭키는 아직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미튜버이다.
대룡 미디어에서 자신들을 홍보하기 위해 선택할만한 공룡이 아니라는 뜻.
혹시 잘못 보냈나 싶어 확인했지만 메일에는 분명히 스트리머 언럭키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음….”
뭔가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백현은 일단 답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만나는 미팅은 무리이고 통화 정도만 가능하겠지만, 얘기를 듣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잘만 하면 빚 변제를 하는데 꽤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게 웬 떡인지 모르겠네.’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월드 사가에 접속하니 다시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새로운 직업으로 전직을 했지만 그게 더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우선 언럭키는 상태창부터 열었다.
“상태창.”
새롭게 직업이 바뀌면서 상태창 역시 큰 폭으로 변화했다.
[상태창]
닉네임 : 언럭키.
레벨 : 60.
힘 : 97(72+25)
체력 : 98(74+24)
민첩 : 116(72+44)
마력 : 136(66+70)
신성력 : 82(66+16)
-자유 분배 능력치 : 0.
“참 나.”
언럭키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아주 신기한 상태창이 눈앞에 들어왔다.
설사 그게 본인의 상태창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마력 수치였다.
무려 136.
최근에 얻었던 마력의 영약과 그레고녹의 홀 덕에 큰 폭의 상승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마력 능력치는 모든 능력치를 선도했다.
그렇다고 다른 수치들이 마냥 작은 건 아니었다.
직업이 바뀌면서 잘 쓰고 있던 단검과 갑옷이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힘과 체력이 큰 폭으로 줄었는데, 다른 것보다 100이 넘어갔던 체력이 줄어든 게 아쉬웠다.
이제는 몸빵을 함부로 대면 안 돼…
‘아니지. 될 것 같은데?’
전보다는 부족하지만 98이라는 지금의 체력 수치 역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천 로브 입고도 몸빵이 되지 않을까?
민첩 수치는 오히려 더 높았다.
지금 신고 있는 ‘바람 정령의 신발’ 덕분이었는데, 가죽 신발이라서 기존의 아이템들과 달리 계속 착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슬슬 튜토리얼의 패왕이 스노우볼을 굴려주고 있고.’
튜토리얼을 완벽하게 클리어한 대가로 얻었던 업적 <튜토리얼의 패왕>.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한다는 말도 안 되는 효과가 붙어 있었는데, 이게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 크게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그 기저에는 언럭키가 지금껏 얻어왔던 업적과 아이템 효과들로 올린 스펙이 밑바탕이 되어 있었지만.
가만히 자신의 상태창을 들여다보던 언럭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마법사라고 할 수 있나?’
이 정도면 지팡이들고 휘두르기(물리)만 해도 어딜 가나 1인분 이상은 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