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보라색.
행운의 무지개 능력에서 보여 주는 빨주노초파남보 색깔 중 가장 높은 등급의 것.
아르만시아의 왕홀은 그러한 보라색이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 만했지.”
아르만시아는 딱 봐도 아무 능력도 없는 노인네였다.
원래 네크로맨서였다면 해골 병사를 그렇게 지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홀의 능력이었을 텐데, 다 죽어가는 노인을 네크로맨서로 만들고 디버프 능력도 주고 배리어도 만들어주고 치유도 해 주고…
‘다시 생각해봐도 이거 진짜 개사기잖아?’
무슨 아이템이 저래?
보라색 빛이 나올 만도 했다.
오히려 남색 빛이었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후후후…. 개봉박두. 들어갑니다.”
언럭키가 부푼 마음을 안고 왕홀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레고녹의 홀]
-아이템 등급 : 레전더리.
-아이템 효과 : 마법 공격력 + 120 상승.
-마력 능력치 + 25 상승.
-하루에 한 번 ‘다크 배리어’ 사용 가능.
-홀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내구도 자동 복구.
-하루에 한 번 ‘다크 힐’ 사용 가능.
-아이템 설명 : 고대의 사악한 흑마법사 ‘그레고녹’이 사용하던 왕홀. 오랜 세월을 맞으며 안에 담겨있던 무한한 권능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단, 마법사 유저가 그레고녹의 홀을 착용하면 ‘네크로맨서’로 전직됨.
-아이템 착용 제한 : 레벨 60 이상, 마법사만 착용 가능.
-거래 불가.
언럭키는 어이가 없어서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스펙이 이래?’
레전더리 아이템.
귀중하다는 그 아이템을 그는 지금껏 몇 번이나 얻어 봤다.
때문에 그런 아이템들이 대충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녹의 홀은 명백히 그러한 레전더리 아이템과는 급이 달랐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사신극검도 잘 쓰고 있는 아이템이건만, 감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레전더리 아이템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엄청 심하다고 하더만. 그게 이런 뜻이었나?’
랭커급 정도 되면 레전더리 아이템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다.
랭커가 아닌 고레벨 유저라도 자본을 많이 투자했거나 운이 좋았다면 하나씩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같은 레전더리라고 해도 그 내부 스펙은 천지차이다.
경천동지할 위력을 보이는 레전더리 아이템이 있는 반면, 유니크 아이템보다 약간 더 좋은 것도 있는 것이다.
월벤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싶다.
“자네! 괜찮나?”
저 멀리서 헤탄이 달려왔다.
언럭키는 잽싸게 그레고녹의 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그를 쳐다봤다.
“헤탄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걱정 말게. 그깟 놈들이 나한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겠나? 다만 해골 병사들이 갑자기 쓰러지더군. 그래서 자네가 해냈을 거라고 짐작하고 달려왔지.”
“그렇군요.”
헤탄은 쓰러진 아르만시아를 바라봤다.
“결국 죽었나.”
“예. 도망치려 했으니 제 손에서 버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놈을 살렸어야 하는데…. 들어야할 게 많았어.”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만시아를 잡아서 캐내야 할 정보가 많았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어쩔 수 없지. 광신도나 수련 사제들이라도 잡아가자고. 그래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겠지.”
“알겠습니다.”
“의뢰 보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주겠네. 어차피 지금은 가진 게 없어서 못 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몇 시간 정도야 못 기다릴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럼 출발할까? 가는 길에 몇 명 잡아가는 거로 하고.”
“예. 다만 저는 여기서 할 일이 좀 더 있습니다. 사로잡는 일은 도와드릴 테니 헤탄님 먼저 가시겠습니까?”
“그래?”
“예.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진중한 표정을 짓는 언럭키의 모습에 헤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게.”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정확히는 혼자서 해야하는 일이었다.
‘사냥터에 남은 시간이 아직 꽤 될텐데. 뽕은 뽑고 가야죠.’
빅드래곤 길드가 남기고 간 시간이 아직 좀 있었다.
아깝게 뭐하러 벌써 나가겠나.
차라리 남은 시간, 여기서 광신도들이나 잡고 가는게 훨씬 나았다.
***
몇 시간 뒤.
언럭키는 헤탄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를 만나자마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퀘스트에 성공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업!]
언럭키의 몸에서 빛이 번쩍였다.
‘후우. 이렇게라도 55레벨을 맞추는군.’
레벨 55.
방금 전에 언럭키가 달성한 레벨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가 도시 텔르흐렌에 들어온 건 고작 하루밖에 안됐다.
헌데 하루만에 5개의 레벨을 올렸으니,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었다면 농담하지 말라며 타박을 들었겠지.
허나 언럭키는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광신도들의 마을에서 55까지 찍고 왔었어야 하는데.’
광신도들의 마을 적정 레벨 구간은 50~55.
워낙 잡기 쉬운 놈들이라 언럭키는 편하고 빠르게 레벨을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였다.
아르만시아를 잡고 남은 몇 시간동안 사냥터를 뒤집어엎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55까지 올리는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암살자의 장점인 속도를 최고로 살려서 빠르게 이동하며 찍은 게 54레벨.
‘전에 했었던 검왕 직업이었다면 54는커녕 53도 힘들었을지 몰라.’
툭 치면 죽는 광신도들이었기에 이런 사냥법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아쉬웠다.
사냥터에서 55까지 찍고 왔다면,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56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건 전에 약속했던 보답일세.”
“이건…?”
헤탄이 건넨 건 조그마한 알약이었다.
“내가 전장에 오래 있었다고 말했지? 전역할 때 이걸 보상이랍시고 주더군. 그러나 이제 은퇴하고 나이 먹은 나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이야. 오히려 자네에게 더 요긴하게 쓰일 테지.”
언럭키는 처음에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표정이 달라졌다.
‘이거…영약이잖아?’
월드 사가에는 스펙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아이템, 스킬이나 업적은 기본적인 것이었고, 그 외에 문신, 도핑성 물약 등이 있었다.
영약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영약은 도핑성 물약과 다르게,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올려준다.
언럭키가 예전에 먹은 체력 포션도 영구적 상승이 있긴 했지만, 영약 소리를 듣는 아이템은 최소 10 이상의 능력치를 올려준다.
당연히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매번 바꿔야하는 아이템과 달리, 돈만 많다면 계속 먹을 수 있다니.
‘부자들이 환장하는 아이템이지.’
[마력의 영약]
-아이템 등급 : 유니크.
-아이템 효과 : 복용 시 마력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 13 상승시킨다.
-거래 불가.
마력 능력치 13.
올마스터라는 직업의 단점을 하나 꼽자면, 직업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만큼 능력치도 골고루 높여야 했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남들보다 배 이상 능력치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마력의 영약은 굉장한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게. 아무래도 나는 당분간 바쁠 것 같아. 잡아온 광신도와 수련 사제들의 심문이 안 끝났거든. 눈에 마귀가 씌였는지 도통 입을 안 열어.”
그렇게 말하는 헤탄의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강철 방패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던 헤탄이다.
그런 그에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하, 하하. 고생 많으시군요.”
“놈들에게서 정보를 듣게 되면 부르겠네.”
“알겠습니다.”
***
헤탄은 바쁘다며 축객령을 내렸다.
오두막을 나온 언럭키는 도시 한복판을 거닐며 고민에 잠겼다.
“자…. 이제 이걸 어째야 하나….”
지금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가 몇 개 있었다.
우선 방금 전에 받았던 마력의 영약부터다.
“먹어? 팔아? 먹어? 팔아? 먹어?…팔아?”
머릿속에서 두 단어가 쉴 새 없이 소용돌이쳤다.
마력수치를 13 높여주는 영약.
업적을 얻어도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건 정말 슈퍼 플레이를 펼치거나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다.
오직 템 빨로 밀어붙이는 부자들에게는 업적보다 영약이 훨씬 편하고 접하기 쉬운 것이다.
지금은 거래 불가이지만 거래 가능하게 해주는 물약을 발라 팔면 큰 이득을 볼 것이다.
문제는…
‘내 스펙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저버리기엔 아깝단 말이지.’
그래. 영약은 큰 돈이다.
하지만 이걸 자신이 먹는다면, 그건 투자다.
‘당장 다음 달에 갚을 천만 원은 있어.’
이전에 팔았던 아이템에서 나온 돈도 있고, 미튜브에서 수익이 꽤나 쏠쏠하다.
갚아야할 전체 빚에 비하면 턱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영약을 당장 팔 필요는 없었다.
반대로, 마력 능력치 상승은 앞으로 그의 월드 사가 플레이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물론, 잠깐 접속을 종료하고 월벤에 가서 영약 시세를 보니 눈이 돌아갔다.
“아니 이건 뭔…?”
최소 수천만원부터 시작하는 가격을 보고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다.
이거라면 빚을 갚는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후….”
결국 결정을 보류했다.
언럭키가 마력의 영약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이번에는 다른걸 꺼냈다.
검은빛 보석이 매달려있는 ‘그레고녹의 홀’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레전더리 아이템이다.
‘그래. 진짜 문제는 이거지.’
마력의 영약은 유니크 아이템이다.
크긴 하지만 언럭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레고녹의 홀이었다.
레전더리 아이템. 그것도 지금껏 얻었던 레전더리들 중 최고를 자랑하는 물건이다.
여기서 걸리는 문제는 두 가지였다.
-아이템 착용 제한 : 레벨 60 이상, 마법사만 착용 가능.
-단, 마법사 유저가 그레고녹의 홀을 착용하면 ‘네크로맨서’로 전직됨.
레벨 제한이 60이라는 건 시간만 있으면 되니 큰 문제가 아니지만, 마법사 전용이라는 것.
‘다음 직업을 마법사로 선택해야 하나?’
얼마 뒤면 또 한 달이 지나서 새롭게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딜탱 암살자인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기에 굳이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었는데, 이걸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네크로맨서’로 강제 전직된다는 점이다.
악(惡) 계열의 직업이라 일반 마법사에 비해 문제도 많을 테고….
“아으. 머리아파 죽겠네.”
언럭키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고민을 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언럭키는 결정했다.
“그래. 일단 레벨부터 올리자.”
마력의 영약은 일단 냅두고, 그레고녹의 홀은 최소 필요한 레벨이 60이다.
나중에 헤탄님이 퀘스트 준다고 다시 불렀을 때 레벨이 부족하면 안되니 일단 레벨업부터 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언럭키가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언럭키님?”
“?”
누군가 언럭키를 불렀다.
“이렇게 또 뵙게 되니 반갑네요.”
“아!”
거기에는 지금 고민하는 아이템을 얻게 해 준 가장 큰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빅드래곤 길드의 길드장, 로버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