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빌어먹을. 다 죽여주마.’
흑마법사 베르멘베거는 자신의 실험실에 들어온 먹잇감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 지하는 그가 꽤 오랫동안 머물며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던전이었다.
위에 있는 숲에서 오크들을 납치한 다음, 위대한 ‘그 분’의 힘을 주입.
흉폭성을 조절하고 명령을 듣게 만들어 병사로 만드는 실험 중이었다.
다만, 얼마 전 위치가 탄로났다.
켈리그라는 귀족가의 자제 놈 때문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놈을 죽였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귀족을 죽였으니 곧 추격대가 올 것이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연구로는 토벌당할 뿐일 테니까.
그래서 도망칠 때를 노렸다.
딱 한 번 정도라면 기회가 생길 거라 생각했다.
놈들이 들어올 위치는 정해져있었다.
이 실험장 곳곳에는 지금껏 만들어 낸 실패작들이 많았는데, 놈들을 처치하다 보면 도달하는 곳이 바로 이 곳.
그나마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크 전사 투르카가 있는 곳이다.
계획은 간단했다.
투르카가 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은 벽 너머 비밀 공간에서 적들을 관찰한다.
특별한 처리가 되어있는 이 벽은, 겉으로는 벽으로 보이지만 안에서 바깥을 관찰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적들이 투르카에게 정신이 쏠려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기습해서 적들을 처리하고, 그 후에 도망칠 생각이었다.
‘근데…왜 두 놈 밖에 없어?’
베르멘베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가의 자제를 죽였으니 병사들 다수에 기사급까지 몇 명은 왔어야 하는데.
왜 저 놈들 뿐이지?
심지어 그리 강해보이지도 않았다.
‘뭐지? 중간에 뭔가 일이 잘못된 건가?’
아무리 봐도 귀족을 죽인 놈을 처벌하러 온 토벌대는 아닌 것 같다.
‘이러면 일이 잘 됐지. 빠르게 처리하고 도망갈 수 있겠군.’
거기에 잘 하면 연구 성과들까지 들고갈 수 있겠다.
악에 물든 오크 전사 투르카.
원래라면 이 놈은 자신을 대신해 귀족 공격죄로 희생될 놈이었다.
토벌대도 가져갈 성과가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런 허접한 놈들만 왔으니, 여기서 싹 처리하고 데려가면 되겠다.
-저벅 저벅.
그 때, 사냥감으로 생각한 놈 중 한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방어구도 갖추지 않고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는 사내.
그는 오크 투르카가 아니라 자신이 있는 벽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지?’
겉으로 보기에 이 방 안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있다면 투르카 뿐이니 이제부터 미친듯이 치고받고 싸워야 하는데…
왜 여기로 오는 거지?
베르멘베거는 뜬금없는 이 상황에 당황했다.
그래서 투르카에게 공격 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언럭키가 하는 걸 지켜봤다.
그게 패착이었다.
-푹!
“컥…!”
벽면에 도달한 언럭키가 검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검날이 벽을 넘어, 베르멘베거의 가슴팍 부위를 정확하게 뚫고 들어왔다.
방어력과 체력이 낮은 흑마법사인 그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다.
한데 고통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지?
***
‘뭐, 뭐야!?’
검을 찔러 넣은 언럭키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벽 안쪽에서 빛이 나고 있길래, 구멍이라도 내볼까 싶어 검을 내지른 것이다.
그런데 사람 비명소리가 나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눈치까지 없는건 아니다.
보스룸에 보스몹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게 절대 우리편은 아닐 터.
-푹! 푹! 푹! 푹!
언럭키는 그대로 검을 뽑았다가 찌르기를 반복했다.
“크아아악!”
-쾅!
비명과 함께 벽면이 부서지고, 그 안에서 지저분한 로브를 걸친 남자가 튀어나왔다.
피가 줄줄 흐르는 가슴팍을 붙잡은 채 인상을 찡그린 사내.
[흑마법사 베르멘베거]
-레벨 : 31.
“헛!? 보, 보스몹이 또 있어?”
컵라면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한번은 악에 물든 오크 전사 투르카를, 또 한 번은 흑마법사 베르멘베거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놈에게 칼빵을 날려준 언럭키까지 순차적으로 촬영했다.
“도대체 언럭키님은 무슨 직업이시길래 저 놈이 숨어있던 걸 알아채신 겁니까?”
컵라면이 물었다.
본인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대놓고 무슨 직업이냐고 묻는 건 실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너무나 궁금했다.
컵라면은 ‘달빛 암살자’ 라고, 암살자 계열의 레어 직업군이다.
지금이야 뒤에서 카메라나 찍고 있지만, 은신은 물론이고 은신 간파 스킬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조차도 숨어있는 보스몹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도대체 직업이 뭐야?’
자신이 이렇게 궁금한데, 하물며 시청자들은 어떨까?
언럭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훌쩍 뒤로 물러났다.
-파앗!
-퍼퍼퍽!
그가 있던 자리로 흑색 연기로 만들어진 화살 몇 방이 내리꽂혔다.
“허억. 허억. 빌어먹을…. 네 놈이 감히….”
흑마법사 베르멘베거는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 쪽 손으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가슴팍을 눌러 지혈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놀란 상태였다.
한 방 먹었지만 그래도 급하게 마나를 모아 반격했는데 그걸 눈치채고 뒤로 빠지다니.
검왕 직업의 ‘직감’이 경고해 준 덕분에 언럭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감히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절대 편하게 죽여주지는 않겠다!”
베르멘베거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팍에서 손을 떼자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새카만 연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피 대신 연기라니. 심상치 않아 보이는 광경이지만, 언럭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놈의 머리 위로 떠있는 HP 체력바가 4분의 1 이상 줄어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지는 확실하게 들어갔다.
‘보스몹치고 방어력이 굉장히 약한 타입이야.’
언럭키가 눈을 번뜩였다.
칼질 몇 번 성공시켰다고 HP가 저렇게 많이 깎이다니.
체력만 따지면 일반 오크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대로 몇 방만 더 공격을 성공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기회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투르카! 움직여라! 저 놈들을 육편으로 만들어버려!”
베르멘베거가 뒤로 물러나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처음부터 가만히 있던 오크 전사.
“크아아아!”
투르카가 괴성을 지르더니 양 손에 몽둥이를 든 채 뛰쳐 달려왔다.
언럭키는 달려오는 놈을 바라봤다.
바람을 가르고 돌진하는 저 기세만 보더라도 정면에서 맞상대하는 건 하책이다.
“컵라면님!”
“네!”
“제가 지켜드리면서 싸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카메라맨으로서 제 능력을 보여드릴 차례로군요!”
스륵 하는 느낌과 함께 컵라면의 모습이 흐려졌다.
은신 스킬을 써서 주변 환경과 동화된 것이다.
동료인 언럭키에게는 그의 모습이 잘 보였지만, 베르멘베거나 투르카는 쉽게 발견하지 못할 터.
“크아아!”
예상대로 투르카의 시선은 언럭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척 봐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데. 은신을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투르카! 찢어버려!”
베르멘베거는 뒤에서 소리쳤다.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연기는 이제 그의 몸 전체에서 나오고 있었다.
몸이 연기로 바뀌었다는 소리다.
언럭키는 비슷한 걸 한 번 본적이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약화된 오크들.
그 때 숨겨져 있던 조상 유령을 발견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생긴 걸 보면 아마 그 놈처럼 물리력 면역인 것 같은데….’
까다로운 상대다.
일단 한 던전에 보스몹이 2마리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한 놈은 물리, 또 다른 한 놈은 고스트 타입이라니.
파티 단위로 들어와도 전멸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리고 컵라면 역시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언럭키님. 조심하셔야 됩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카메라를 찍고 있지만, 그는 1년간 월드 사가를 플레이 해 본 경험이 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걱정 대신 흥분감이 드는 건 왜일까.
‘언럭키님이 여기서 성공해버리면 이건….’
그 파급력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물론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컵라면은 위급한 상황이 오면 도울 생각이었다.
언럭키의 뒤를 조금이라도 쫓아가려고 밤을 새가며 사냥터에 줄서서 사냥하지 않았던가.
레벨 18의 레어 등급 암살자라면,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겠지!
-후웅!
투르카의 몽둥이가 바람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궤적을 읽은 언럭키는 허리를 비틀어 피해내더니 커다란 팔뚝에 검상을 내줬다.
-푹! 서걱!
레벨 차이도 크고 보스몹인지라 데미지는 크게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 두들겨 패야겠군.’
언럭키가 혀를 찼다.
물론 지구전에는 자신 있었다.
“크아아아!”
투르카는 본능에 내맡긴 채 몽둥이를 계속 휘둘렀는데, 빠르긴 했지만 검왕의 눈을 가진 언럭키에게는 그 궤적이 다 보였다.
슬쩍 피해주고 반격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반격하다가 7번째 타격이 되는 순간,’ 대가의 검술’이 발동되었다.
-쾅!
투르카가 움찔 거릴 정도로 큰 데미지.
언럭키는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스택을 쌓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무난하게 승리가 예상되었다.
당연히 베르멘베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네놈에게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한동안 뒤에서 전투를 지켜보며 뭘 하나 했더니.
그는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완성이 되자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인데, 손을 뻗자 언럭키에게 검은 연기가 발사되었다.
-화아악!
언럭키의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가 싶더니 메시지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띠링!
[흑마법 디버프 ‘둔화’에 노출됩니다.]
[검왕의 정신력 보정 발동!]
[‘둔화’에 저항하였습니다.]
[흑마법 디버프 ‘체력 약화’에 노출됩니다.]
[검왕의 정신력 보정 발동!]
[‘체력 약화’에 저항하였습니다.]
[흑마법 디버프 ‘쪼그라드는 근육’에 노출됩니다.]
[검왕의 정신력 보정 발동!]
[‘쪼그라드는 근육’에 저항하였습니다.]
.
.
.
온갖 디버프들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줄줄이 막혔다.
검왕이 괜히 레전더리 직업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어지간한 정신 계열 스킬들은 그냥 막아버린다.
“아, 아니…!?”
베르멘베거의 당황한 감정이 여기에서까지 느껴진다.
사람이 한 방 먹었으면 되돌려주는 게 인지 상정.
-탓!
언럭키가 땅을 박차고 뛰어갔다.
목표는 베르멘베거.
투르카가 뒤에서 다급하게 쫓아왔지만 계속 맞상대하다가 쏙 빠져나가버리니 반응이 조금 늦었다.
“나를 잡겠다고? 헛된 생각이다!”
다가오는 언럭키를 보며 베르멘베거는 웃었다.
검은 연기로 몸이 변한 지금 상태는 자신의 비전 흑마법이다.
물리력에 전부 면역이니 검사 상대로는 완전한 카운터!
‘설마 저 놈이 수준급 기사들이나 다룰 수 있는 검기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자신의 디버프를 버텨낸 건 꽤 놀랍다만, 고작 그 정도.
헛손질 몇 번 하다가 투르카에게 다시 붙잡힐 것이다.
베르멘베거는 그 이후의 고민을 했다.
‘그건 그렇고 디버프가 통하지 않다니. 특별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나? 쯧. 다음부터는 디버프가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 마법으로 지원해야겠군.’
공격 마법은 장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못하지는 않는다.
투르카 혼자서 놈을 이기긴 어려워 보여도, 자신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할 만 하겠지.
그 순간…
-쾅!
“커헉…!”
HP가 큰 폭으로 떨어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시했어야 정상인 언럭키의 검이 정확하게 자신에게 꽂힌 것이다.
베르멘베거는 고통과 당황의 감정이 동시에 솟구쳤다.
“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