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후 메이저리거 215화
가라앉은 수호의 시선이 그라운드에 퍼져 있는 선수들을 주시했다.
‘이전처럼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 야수들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영역에 못 들어감?]
‘포수일 때는 투수와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들어가는 순간, 한 명에게만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건 편견이지. 영역에 들어간다는 건 네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거임.]
[정확히는 집중력이 높아진 상태를 영역이라고 표현하는 거지.]
[어쨌든 그 상태를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한다고 표현하는 건 애매함.]
레전드들의 조언에 수호는 불현듯 깨달았다.
‘왜 한 명에게만 집중하는 상태라고 생각했지…….’
그건 너무 협소한 생각이었다.
그라운드 전체에 집중한다면 모든 선수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보자.’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수호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불가능이란 벽을 넘어서서 여기까지 왔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후우…….”
깊은 호흡을 내뱉은 수호의 시선에 닿는 풍경이 어둠으로 잠식됐다.
귀에 들려오던 관중들의 응원 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어둠에 잠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인다.’
그의 시선에 닿는 모든 선수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마운드에 있는 한성태였다.
‘역시 에이스답게 큰 변화가 없어. 근육이 약간 긴장한 상태긴 하지만, 이 정도는 정상 범위 내다.’
그의 시선이 다른 야수들의 상태를 살폈다.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유격수 박경민이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다. 시야가 한곳에 고정되지 못하고 주위를 다 살피고 있어. 베테랑이라면 시야를 넓게 가져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박경민의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긴장해서 정확히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쪽으로 공을 보내면 위험할 수 있겠어.’
정확한 수비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컸다.
그다음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건 3루수 최영석이었다.
‘아마 김규성 선배의 부상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근육이 너무 긴장한 상태야.’
나머지 선수들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씩 긴장한 상태지만, 국제전이란 점과 동료가 부상으로 1회부터 빠졌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상정범위 내였다.
‘밀어치는 타구를 보내면 빠질 가능성이 크다.’
수호의 시야에 좌타석으로 들어오는 타자가 보였다.
만약 이 녀석이 밀어치는 타구를 만들어내면 유격수와 3루수 모두 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박성태 선배는 다행히 영향이 크지 않은 상태니. 몸쪽을 리드해도 괜찮겠어.’
결론을 내린 수호가 몸쪽으로 사인을 보냈다.
사인을 확인한 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고 세트포지션에 들어갔다.
-김규성 선수가 부상으로 빠지고 어수선한 상황! 하지만, 경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여기에서 확실히 후속 타자들을 잡아내고 실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1회부터 중요한 포인트가 만들어졌다.
해설진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인을 교환한 박성태 선수가 세트포지션에서 공을 던집니다!
쐐애애액-!!
박성태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의 몸쪽을 강하게 찔러왔다.
타자는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돌렸다.
딱!!
-때렸습니다! 하지만 빗맞은 타구! 2루수 정면으로 갑니다!
퍽!
2루수 차우식이 안정적으로 공을 포구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오는 박경민을 향해 공을 토스했다.
퍽!
공을 잡은 박경민이 1루로 공을 던지면 두 번째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는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어…… 어?”
글러브에 들어간 공을 한 번에 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은 타자 주자가 1루 베이스를 밟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퍽!
“세이프!”
-아-! 세이프입니다! 박경민 선수가 공을 한 번에 빼내지 못하면서 타자 주자가 살아서 1루 베이스를 밟았습니다!
-아쉬운 장면이 연달아 연출되네요. 박경민 선수의 수비가 약한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해설진도 아쉬워할 정도의 수비였다.
당연히 팬들의 반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ㅁㅊ 저걸 더블플레이로 못 만드네.
-박경민 빼라-!
-저게 국대라고?
-ㅅㅂ 말도 안 되는 수비 하고 앉아 있네.
-와…… 저런 애를 국대에 넣었네.
-김규성 데려와!!
김규성의 빈자리가 더욱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 * *
딱!!
-때렸습니다! 하지만 높게 떠오른 타구, 이성훈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습니다!
퍽!
“아웃!”
-세 번째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면서 한국대표팀의 길었던 1회 말 공격이 마무리됩니다.
스코어는 2 대 1.
도미니카 공화국이 득점을 올리면서 한점차로 따라잡혔다.
한성태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실점이었다.
‘수비만 제대로 이루어졌어도 실점까진 이어지진 않았을 텐데.’
득점이 올라간 상황이 외야 플레이였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아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걸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순 없었다.
지금 상황을 타파해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건 수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따라잡히는 점수가 나오긴 했지만, 아직은 경기를 리드하고 있다. 여기에서 추가점을 낸다면 1라운드 경기는 우리가 승리로 가져갈 수 있어.’
[정답.]
[괜히 안 좋은 상황을 복기해봐야 더욱 수렁에 빠질 뿐이지.]
[일단 위기는 넘겼으니 어떻게든 봉합해서 넘어가야 한다.]
‘예.’
다행인 건 포수로서 영역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타자로서만 영역을 사용해왔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장족의 발전이었다.
‘캐처박스에 앉아 있다는 게 영역의 활용범위를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었어.’
[괜히 그라운드의 사령관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네가 포수로서 영역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경기를 어느 정도 네 의지대로 끌고 갈 수 있다.]
[포수는 그게 가능한 포지션이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다.
야구란 스포츠는 일단 공을 던지고 그걸 타자가 때리면서 야수들의 플레이가 이어진다.
그럼 공을 던지는 위치를 결정하는 건 누가 할까?
바로 투수와 포수가 합의하에 한다.
공이 날아오는 위치에 따라 날아가는 타구의 방향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즉, 포수가 타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백 퍼센트는 아니다.
기껏해야 5~60퍼센트 정도의 확률이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타율 3할이 넘으면 괜히 훌륭한 선수라 말하는 게 아니지.]
[절반이 넘는 확률로 타구의 방향을 의지대로 할 수 있다면 경기 전체를 조율한다고 볼 수 있지.]
실제 수호는 도미니카 대표팀 타자들의 타구를 어느 정도 조절했다.
물론 야수의 실수로 인해 경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후 타구가 모두 우익방향으로 날아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건 사기나 다를 바 없군요.’
영역의 확장.
수호는 또 하나의 사기적인 능력을 손에 넣었다.
* * *
한국 대표팀이 도미니카 대표팀과 뜨거운 1회를 주고받고 있을 때.
다른 경기장에서도 경기들이 시작되었다.
-일본 대표팀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첫 경기를 시작합니다.
일본은 에이스 오타니 쇼헤이를 아끼기 위해 일본의 사와무라상 수상자인 타카시 후지타를 등판시켰다.
-최고 구속 160㎞를 던지는 타카시 후지타가 1회 베네수엘라의 세 타자를 가볍게 돌려세웁니다.
-역시 작년 시즌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투수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타니가 나오지 않더라도 선발을 맡길 투수가 정말 많네요.
-그게 일본 야구가 세계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겠죠.
일본 야구는 명실상부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터운 선수층에 있었다.
오타니라는 절대적인 선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더라도 충분히 다른 나라와 대등한 승부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오타니가 포함되면 압도하는 능력까지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일본 대표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일본이 세계최강이 될 수 있었던 건 마운드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마운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그들은 타격 쪽에 더욱 공을 기울였다.
그 결과 지금은 타격에서도 세계최강이라 불리던 미국과 비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역시 오타니가 있었다.
퍽!
“볼, 베이스 온 볼.”
-일본의 리드오프 료타 히라노가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딱!!
-번트입니다! 하루토 사카모토의 기습적인 번트에 1루 주자는 2루로 그리고 하루토까지 살아서 1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허를 찌르는 번트로 순식간에 무사 1, 2루의 찬스를 만들어내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과거부터 촘촘한 야구를 하는 걸로 유명했다.
일명 스몰야구로 불리는 공격은 그들의 강점 중 하나였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슬러거가 부족하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실제 일본 야구는 항상 슬러거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무사 1, 2루의 찬스에서 오타니 쇼헤이가 타석으로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6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내면서 본인의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운 오타니 쇼헤이! 그가 과연 이 찬스를 어떻게 해결해 줄지 궁금합니다!
오타니 쇼헤이의 등장은 일본 야구의 슬러거에 대한 갈증을 씻어 내려주었다.
특히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6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낸 그는 명실상부 일본을 대표하는 슬러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베네수엘라 대표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 오타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지만, 베네수엘라 더그아웃에서 구심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오타니와의 승부를 피하네요.
-아무래도 오타니 선수의 장타력을 의식하고 피한 거 같습니다.
-그래도 무사 만루의 위기를 처음부터 자처하는 선택은 다소 의외입니다.
무사 1, 2루와 무사만루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것도 경기가 중반을 지난 것도 아니고 초반부터 이런 선택을 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만큼 베네수엘라는 오타니의 장타력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뒤의 타자를 자극시켰다.
‘감히 날 뒤에 두고 무사만루를 자처했단 말이지.’
타석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그의 눈이 광폭하게 빛났다.
-타석으로 일본의 4번 타자! 스즈키 슌타로가 들어섭니다!
메이저리그나 한국에서 4번 타자의 중요성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4번 타자는 여전히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3번 타자와 2번 타자의 중요성도 과거보다 부각되고 있었지만, 4번 타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자리를 스즈키 슌타로에게 주었다는 건 일본 대표팀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소리였다.
‘이게 가장 베스트 라인업이지만, 슌타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일본 대표팀의 감독 아키히로가 4번에 슌타로를 사용한 이유는 사실 이게 가장 베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메이저리그의 방식을 따라갔지만, 언론과 대중은 차세대 스타인 슌타로에게 의미부여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걸 딱히 나서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슌타로 본인도 거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으니. 괜히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아키히로는 이 일을 잘 활용할 생각이었다.
책임감을 가진 슌타로가 어떤 활약을 할지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면서 말이다.
-타석에 들어선 스즈키 슌타로! 과연 한수호 선수를 도발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그때였다.
스즈키 슌타로가 외야를 향해 배트를 치켜들었다.
-아아-! 이건 한수호 선수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예고 홈런입니다!!
수호를 향한 스즈키 슌타로의 도발이 연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