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카, 칼 이건?!”
깜짝 놀란 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칼은 넌지시 한마디를 남겼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를 대신해 알테어를 통치하고 있어. 나의 비, 릴리아나 슈타크로서”
갑작스런 청혼에 얼굴을 홱 붉힌 릴리가 소리쳤다.
“나, 난 아직 청혼 받아주지 않았는데!”
황급히 말하는 것과 달리 죽어도 빼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고, 그거로도 모자라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감쌌다.
칼은 그런 그녀에게 손깍지를 끼며 조심히 안았다.
“?!”
릴리는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고 칼은 심홍색의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조, 좀 더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봐주라고. 이것도 꽤 무리하고 있는 거니까.”
칼은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포옹했다.
그 따뜻함에 릴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너 때문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어떻게 책임질 건데?”
부끄러움에 애써 물어본 말에 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팔이라도 자를까?”
“…….”
농담 없는 진지한 어조에 릴리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칼은 뒤늦게 ‘이게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꽈악!
릴리는 그런 칼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잖아?”
“뭔데?”
칼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
따뜻한 감촉이 칼의 입술을 덮쳤다.
부딪친 것은 릴리의 입술이었다. 입술을 뗀 그녀는 부끄러우면서도 하염없이 불안으로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애처롭고 가녀려 칼은 와락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어떤 모습이든 널 사랑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응. 약속이야.”
대답을 마친 릴리는 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 *
라흐만 대륙의 모든 일을 정리한 칼은 다시 성역, 디바인에 도달했다.
가슴에 있던 펜던트, 리바이어는 디바인에 설치된 펜타그램의 기능을 칼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데제스가 신이 되기 위해 세피로트와 한 종족을 탄생시키려는 것과 동시에 마계로 침략할 수 있는 마법진을 구축한 곳이지. 부서진 곳은 복구를 해놨고. 이제 마계의 문만 열면 된다.]
“그 녀석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던 녀석이군.”
칼은 오랜 시간 경쟁자로 지낸 포악한 드래곤, 데제스 싱클레어를 떠올리다 곧 리바이어를 쳐다봤다.
“리바이어. 넌 이번에 태어난 해즐링을 돌봐야 하는 사명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미 데제스라는 포악룡을 낳은 산물이지. 같은 방법으로 키울 수는 없어. 부족한 지식은 다른 에고스톤을 만들었고 지금은 자네의 연인에게 이름부터 모든 걸 맡겨야지.]
“내 아내는 보모가 아니야.”
[자네 입에서 아내라는 말이 나오니 조금 재밌군.]
“시끄러워.”
괜스레 얼굴에 핏기가 솟구친 칼은 리바이어를 닦달하며 말했다.
“그래서 너의 목적은?”
[물론 드래곤의 지식과 마법을 계승하고 보존하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드래곤들에게 억제가 될 최강의 마왕에 대한 기록도 필요하지.]
“한마디로 까불면 죽을 수도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은 거네.”
-덧붙여 내 흥미도 있지.
“그러시겠지.”
리바이어의 넉살에 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모든 여정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칼은 부족한 마법 지식을 리바이어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것과 기나긴 여정이 지루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라흐만 대륙 기준으로 최소 1년 안에 이곳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렇다면 시공이 뒤틀리는 것을 감지하고 계산하는 건, 내 책무로 삼지. 어느 정도 오차는 있을 테지만 반드시 자네를 그 시간 안으로 복귀시킬 걸세. 아직 혼례도 안 치르지 않았는가?]
“거참 거슬리는 소리 따박따박 하네.”
칼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원래 정석대로라면, 릴리와 혼례를 올리려고 했지만, 릴리는 이를 단연코 거부했다.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은…….
-괜히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부담을 줘야 칼이 빨리 돌아올 거잖아.
짐이 되기 싫으면서도 부담을 준다.
말도 안 되는 모순의 감정을 주는 것이 칼은 못 마땅해했다.
“나랑 어울리는 것부터 고생길 훤하다는 걸, 잊었나 보네.”
칼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파직! 파직!
파앗!
성역, 디바인에 설치된 마계의 문이 개방됐다.
휘이이잉!
쿠구구구구.
황동색의 마력이 밀집하면서 마치 거대한 마족의 눈동자가 칼을 을씨년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심장이 멎어 죽어버릴 기백이었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가는군.”
하지만 칼에게 있어서 이 공기와 위화감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때, 자신이 멸망시켰던 세계.
그러나 다시금 새로운 마족들이 활보하고 있는 세계.
갱생을 한 칼은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까짓거 한 번 더 부수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약간 함정이었지만.
이전에 살기가 팽팽했던 칼의 눈동자에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잠시 후.
화악!
칼은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친 채 그대로 마계의 문으로 진입했다.
* * *
슈타크 제국 내에 존재하는 알테어 요새.
“꺄아악!”
눈이 내리는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을 한 소녀가 붉은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 바그로바의 등에 탄 채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레일라. 조심해야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키이라는 걱정이 되는지 자꾸 자신의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락.
그때, 턱수염을 잔뜩 기른 마틴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망토를 얹어주었다.
“……네 껀 너무 무거워.”
“거짓말이 여전히 능숙하지 않아.”
키이라는 얼굴을 붉히며 망토를 떼려고 했지만, 마틴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여전히 금술 좋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헤이젤은 소름이 끼치는지 덜덜 떨었다.
곁에서 이를 듣고 있던 괴츠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며 핀잔을 주었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네가 할 소리냐? 지금.”
“야, 난 저 정도는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헤이젤이 버럭 소리를 친 순간.
“헤이젤 님. 지금 대공 부인께서…….”
디아나가 만삭의 몸으로 그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어허! 넘어지면 어쩌려고. 거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
헤이젤은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로 단번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괴츠는 괜스레 심술이 나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만 옆구리 시리네. 젠장.”
* * *
칼이 사라지고 근 2년간 라흐만 대륙은 기적적으로 평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국가 간의 분쟁부터 몬스터들의 침략까지 모두 현재 슈타크 제국의 힘으로 대처가 가능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외인 땅이 있다.
그곳은 물론 과거부터 소란이 끊임없이 일어난 혹한의 땅, 알테어였다.
“예? 매, 맹독의 악마가 다시 튀어나오는 겁니까?”
헤이젤은 휘둥그레 눈을 뜨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맹독의 악마.
이는 칼리언트 슈타크가 2년 전에 잡았던 쌍두룡으로 이 거대한 몬스터를 퇴치하고 나서는 알테어의 환경이 몰라볼 정도로 변했던 기적까지 체험했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몬스터가 다시 튀어나온다?
이것은 평화로운 세상에 찬물을 끼얹는 큰 화제였다.
알테어의 사령관, 대공 칼리언트 슈타크의 부인이자 대공 대리로 알테어 요새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릴리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암피스바에나의 알에서 튀어나온 수백 마리의 암피스바에나에요.”
“……그 어마어마한 게 수백 마리나 되는 겁니까?”
“크기는 괴츠 정도로 우락부락하고 힘은 당연 성체보다 못합니다만. 먹잇감이 필요한 녀석들은 즉각 알테어를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잠깐. 어쩐지 저 마음의 상처를 받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이 와중에 괴츠는 황당한 표정으로 반박했지만.
“즉각 응전해주세요.”
릴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암피스바에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이 몬스터들은 성체가 되면 절대로 같은 곳에서 활동할 수 없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군집체로 활동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는데, 한참 커가고 있는 녀석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독무가 난무하며 모든 것을 포식한다.
물론 성체가 되기까지는 서로 물고 뜯으며 죽인다던가, 개체 수 조절을 위해 드래곤이 토벌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 홀로 남은 드래곤, 아니 해즐링 로즈비는 브레스조차 내뱉지 못하고.
휘이잉!
날갯짓으로 붉은 돌풍을 일으켜 암피스바에나 무리의 이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그 한계였다.
[크아아아앙!]
그 와중에 바그로바가 암피스바에나 무리를 찢어발기며 움직임을 저지시키고 있지만, 그 한계는 명명백백했다.
꿀꺽!
“이, 이대로 우리 전멸하는 걸까?”
산크투아리움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정예병력까지 암피스 바에나의 꿈틀거리는 기세에 움찔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팔락!
저벅저벅.
이때 릴리는 갑주를 입은 채, 검을 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칼리언트 슈타크의 기사단이 아닌가?”
“……!”
그 한마디에 그들의 움츠렸던 마음이 풀어졌다..
릴리는 그들의 열의에 불을 붙였다.
“암피스바에나에 대한 해독제는 일찌감치 만들었다. 저 단단한 갑주는 우리의 칼날에 베일 것이다. 긍지를 가져라. 너희들의 등 뒤에 뭐가 있는 지 가슴 깊이 새겨라!”
그 한마디는 영웅 칼리언트 슈타크가 총애하던 노기사, 리히트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돌격하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 일념을 가지고 알테어의 병력이 암피스바에나를 급습하려는 순간.
우웅!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에 정적과 함께 귓속을 어지럽히는 이명이 찾아왔다.
파직파직!
하늘에는 느닷없이 붉은 뇌운이 번뜩였다.
‘세, 세상이 멸망하는 전조인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품을 때쯤.
콰아아앙!
구름 사이를 파헤친 붉은 전격이 암피스바에나 무리 가운데로 떨어졌다.
“무, 무슨 일이!”
설원에 있는 눈더미들이 순식간에 눈보라로 돌변해 휘몰아 닥치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고.
“세, 세상에.”
제대로 눈을 뜨고 봤을 때, 암피스바에나들은 몸통이 터져 사라져 있었다.
“……서, 설마?!”
이 기이한 전조를 알 만한 사람들은 동시에 말문을 텄다.
타닷!
“뒤는 맡길게요.”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릴리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황급히 붉은 빛이 떨어진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 * *
모든 것이 새하얗게 파묻힐 것 같은 설원에서 심홍빛의 존재감을 띠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니고 있었고 눈과 머리칼은 심홍색의 빛을 품고 있었다.
범인과는 격이 다른 초월적인 존재.
누구의 식견으로 봐도 그는 비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런 그를 릴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리고 세차게 호흡을 몰아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릴리를 보며 말했다.
“……데리러 왔어.”
울컥!
그 한마디에 릴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1년이나 늦었잖아. 바보야.”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손을 내밀자, 칼은 그녀의 손을 조심히 맞잡았다.
* * *
별이 헤매는 밤.
알테어 요새까지 칼과 릴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걷고 있었다.
“……칼 마계에서 일은 잘 해결된 거야? 마몬이란 마왕은 강했어?”
직접 보지 못했기에 궁금했다.
구도로만 보면 전생 마왕 대 현생 마왕이 결전을 벌이는 것. 그 결과가 안 궁금한 것이 이상했다.
이에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시시했어. 무력보다는 가치관 자체에 대해서 실망한 점이 많았어.”
“어떤 점이?”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주기 위해 칼은 잠시 손을 놓고 손에 붉은 마력을 유유히 움직여 보였다.
“녀석은 세상의 파멸보다 세상의 욕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 역시 탐욕의 대상으로 삼았지.”
일순간 칼의 왼손에는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그 상태로 칼은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 집착으로 녀석은 방해물인 나를 견제하기 위해 세피로트를 건드려 더 강한 마족들을 탄생시켜 덤볐지만.”
칼이 그 상태로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쥐어 으스러뜨리는 행위를 하자.
파앙!
왼손에 집결돼 있던 검은 구는 간단히 파괴됐다.
“힘을 보이는 것만으로 마족들은 나를 경외와 추종의 대상으로 삼았지. 힘 자체는 막상막하였지만 녀석은 목숨을 걸고 싸울 배짱이 없었던 거야. 그 점이 시시했어. 그리고 내 칼에 마몬은 숨을 거뒀지.”
릴리는 마족의 복장을 갖춰 입은 칼을 힐끔 훔쳐보았다.
이곳을 떠날 때 소지하고 있던 두 자루의 검, 시엘로와 인페르노 대신 등에는 마치 송곳니 같은 돌기가 돋은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마계에서 얻은 검인가 보네.’
호기심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칼의 이야기를 들었다.
“말은 간단히 끝난 것 같은데, 어째서 2년이나 흐른 거야?”
“마몬을 쓰러뜨린 뒤, 세피로트와 계약을 맺었어.”
“세피로트랑? 어떤 계약?”
“사명은 끝났으니, 더이상 창조에 얽히지 말라는 계약이었어. 녀석이 제시한 조건은 하나였어.”
우웅.
칼은 공간 속에서 에메랄드빛으로 일렁이는 씨앗을 꺼내 들었다.
“설마 세피로트의 씨앗이야?”
“맞아. 녀석은 더 이상 고독하고 싶지 않지만, 창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더군. 그러니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심어달라고 했지.”
“세피로트는 하나 아니야? 그런 곳이 존재하기는…….”
존재하지 않아. 라고 답변하려는 순간, 릴리는 뒤늦게 한 단어를 읊었다.
“탑. 그곳이구나.”
“맞아.”
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게 나 칼리언트 슈타크가 마계에서 싸우고 얻은 결론이야. 적정한 타협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를 지킬 수 있었어.”
“믿고 있었어.”
릴리는 다시 한번 칼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탑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명은 완수했어. 계약을 지켰으니, 이제 그 녀석을 만나야지.”
이제 남은 일은 시간의 신, 차이트와 결착을 짓는 것.
그런 칼의 열망이 와 닿았는지, 릴리와 칼의 앞으로 희미하게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