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마나 기관을 해제한 칼의 등에서는 여섯 장의 날개가 증발되듯 사라졌다.
‘피곤하군.’
이것으로 대륙에 마왕 강림을 꿈꿨던 33인의 마족 계약자를 모두 숙청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아직 모든 게 끝났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그 이유는…….
꿈틀꿈틀.
조각 난 삼 인의 마족 계약자들의 사체가 꿈틀거리며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칼은 암피스바에나나 씨보그에 버금가는 그 거대한 악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마몬이냐?”
질문이 끝나자, 살덩이는 송곳니가 잔뜩 달린 입이 만들어지며 입을 열었다.
[설마 칠대마왕을 뛰어넘는 원초의 존재가 이 땅에서 활동하고 다닐 줄이야. 그래. 분명 들어본 적 있어. 마계의 모든 생명을 소거한 광기의 마왕, 벨리앗. 그게 너였어.]
마몬의 음색은 당황이 섞여 있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초의 존재가 바로 칼이었기 때문이다.
[벨리앗. 난 이 세계의 멸망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이곳의 모든 것을 갖길 원하는 것뿐이지.]
“주제를 알아라. 버러지. 여기서 네놈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칼은 팔짱을 낀 채, 마몬을 노려봤다.
[진심으로 이 마몬과 전쟁을 원하는가?]
꿈틀, 꿈틀.
파앗!
피막의 날개를 활짝 펼친 마몬은 거대한 얼굴을 드러내며 칼에게 살의를 드러냈다.
“해주지. 전쟁. 목 닦고 기다리고 있어.”
-크크크크, 누가 최강의 마왕인지 가려보자고.
꽈악!
파앗!
칼은 미소로 화답하며 그런 마몬의 얼굴을 손으로 쥐어 터뜨렸다.
애당초 죽기 직전의 시체로 강림한 육신이었기에 쉽게 사라져갔다.
어느 순간, 마몬도 완전히 기척을 감추고 사라졌다.
[이것으로 끝난 건가?]
칼의 목에 걸려있던 리바이어는 비로소 라흐만 대륙에 분란이 사라지고 평화가 오는 것을 직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참에 진입하겠어.”
[너의 목표는 탑이 아니었던가?]
“마몬을 쓰러뜨린 뒤야. 리바이어. 계약은 지켰다. 너는 계약에 따라 마계에 진입할 수 있는 차원 마법을 준비해. 얼마나 걸리지?”
-열흘 정도 소요될 것 같군.
“열흘이라…….”
칼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단이 흔들릴 일은 없지만, 이곳에서 그동안 쌓은 정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 * *
탐욕은 끝이 없다.
설령, 허기가 져도 갈증이 찾아와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타르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황금을 끌어안으면서 했던 생각.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반짝이는 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꼬르륵!
“……배고파.”
소년은 엄마의 옷자락을 붙들고 달랬지만, 그녀는 고집스런 얼굴로 손안에 든 황금을 놓을 줄 몰랐다.
저벅저벅.
그때,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온 릴리가 소년에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어? 어. 도, 돈은?”
“필요 없어. 아무래도 너희가 굶는 모습까지 지켜보기 어렵네.”
“감사합니다!”
릴리는 안쓰러운 웃음을 내비쳤고, 소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아삭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의 엄마는 소년의 미소에 크게 놀랐다.
어째서 사과 한 개에 저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저렇게 야위었던 거지?
무수한 생각이 오고 갈 때, 릴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미안해요. 당신들을 절대로 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포기해주세요.”
그녀는 정중하게 소년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주륵 눈물을 흘렸다.
제국의 귀족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쏴아아아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황금을 모두 릴리의 앞에 건네주었다.
“아, 이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그리고 병세가 있는지 확인을…….”
그녀는 꾸역꾸역 눈물을 머금었다.
황금의 가치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고 지켜야 될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릴리는 그 야윈 손을 따뜻하게 감싸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스는 버럭 화를 내며 여인에게 거칠게 다가왔다.
그 한 번을 양보하면, 어떤 일이 초래될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콰앙!
하지만 그는 릴리와 여인에게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괴츠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려졌다.
찌릿!
움찔!
“히익!”
괴츠의 눈빛 한 번에 그의 기세는 크게 위축됐다.
“너. 여기 있는 아이들 얼굴이 어떤지는 살펴봤냐?”
“그, 그건.”
뒤늦게 아이들의 얼굴을 살펴본 한스는 우물쭈물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저 아이들보다 중요한 것 같냐?”
괴츠는 한심하다는 듯 황금을 지니고 있는 한스를 지켜보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마음이 움직였는지, 일제히 황금을 내놓았고.
그렇게 이와타르에서 벌어진 황금과 예언자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때 릴리는 황금 이상의 자애와 사랑을 보여줬다는 평을 남기며 이와타르의 성녀로 불린다.
* * *
드래곤과 마족의 횡포로 쑥대밭이 된 라흐만 대륙도 다시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큰 수확을 얻은 슈타크 제국에서는 붉은 기사, 칼리언트 슈타크에 대한 칭송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사이 작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를테면…….
사락!
마틴이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키이라 슈타크에게 건네었다.
그것도 대낮, 방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황녀에게 말이다.
“……저 미친 놈.”
“와아! 박력 하나는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헤이젤과 괴츠는 눈을 뜨고도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반면 키이라 슈타크가 이끄는 여성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치며 손깍지를 끼며 지금의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이라는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그냥. 너에 대한 태도를 고쳐보라고 해서. 고쳐봤어.”
“날 경외하라는 의미였는데.”
사락.
마틴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꽃다발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
이에 당황한 키이라가 휘둥그레 눈을 뜰 때.
마틴은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가끔 검을 쥘 때보다 꽃을 안고 있는 걸 한 번쯤 보고 싶었어.”
휘익!
생각보다 부끄럽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마틴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꺄악!”
“어머나.”
주변에 있던 여성과 남성들은 그런 그들에게 환호성을 내뱉었다.
루콘 최강의 무가에서 슈타크 제국의 황녀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살마들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은 적이 없었던 키이라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소리쳤다.
“거기 서! 그냥 가면 어떻게 하라고? 수습은 하고 가!”
그녀는 빼액 소리를 내질렀지만, 마틴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야!”
키이라는 성큼성큼 그런 마틴의 뒤를 쫓았다.
“저거 한 대 패러 가는 건가?”
괴츠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헤이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꽃잎 한 장도 안 떨어지게 조심히 걷고 있는데?”
힘겹고 지친 전쟁이 끝난 뒤 맞은 봄날은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다.
* * *
[끼윳!]
알테어 성에 거주하게 된 해츨링은 연신 밥을 달라고 울고 있었다.
“어허,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디아나는 레인과 함께 만든 이유식을 갖다 주었고.
아그작!
해츨링은 스푼 째로 그것을 우득우득 씹어 먹었다.
“……음, 역시 사람처럼 먹기는 힘들겠구나.”
이에 디아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어쩔 수 없이 양동이째로 이유식을 갖다 주었다.
우적우적.
해츨링은 정신없이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바그로바도 이 정도 식성은 아니었는데.”
레인은 피식 웃어 보였고, 디아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손수건에 자수를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인은 능글맞은 눈빛으로 물었다.
“디아나. 혹시 그거 칼리언트 공자님, 아니 사령관님에게 드리려는 거야?”
“그분 챙기는 건, 릴리아나 님께서 할 일이지.”
“그럼 누구 건데?”
늘 칼에 대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정성껏 섬기던 그녀가 다른 이에게 저런 정성이 담긴 선물을 주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 내 거야.”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했다.
불길함을 느낀 레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런 어설픈 거짓말은 안 통해. 잠깐 너 설마. 우리 망나니 기사단 간부 중에 한 명에게 주려는 거 아니지? 마틴 님이라면 모르겠지만 헤이젤, 괴츠? 그 두 놈 중 한 명은 아니겠지?”
“……너무 친구처럼 말하는 거 아니야?”
신분의 차이를 고려하면,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대상들이지만.
레인은 진심으로 아끼는 친구, 디아나를 위해서라면, 그들조차도 낮게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헤이젤 님이 손수건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이야.”
디아나의 말에 레인은 머릿속이 아찔했다.
“그 능글맞고 투덜거리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조, 좋아한단 말은 안 했어.”
“……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릴까? 슈미트 님에게 다 일러바칠 거야. 그러면 그 놈팡이 같은 놈한테 절대 시집 못 보낸다고 난리 칠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괜스레 민망했는지 뜨개질을 하는 그녀의 손이 더 빨라졌다.
* * *
알테어로 다시 돌아온 릴리는 분주하게 교육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학생 시절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를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의 힘이 되겠다는 일념이 그녀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제국 귀족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그에 따른 재화도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였다.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휴식은 필요했다.
어두운 남빛의 저녁.
딩!
그녀는 오랜만에 리라를 들어 정원의 화원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차갑고 생명이 꺼져가는 땅, 알테어에서만 피는 하얀 꽃, 리레시아. 복수초의 종류 중 하나로 품종 개량까지 성공해 간간이 파란 꽃도 볼 수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뛰면서 놀았다.
“변했어. 아마 칼이 만들고 싶은 풍경은 이런 거겠지.”
그 꿈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 자신에게 릴리는 뿌듯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있었다면, 우중충한 군으로 가득한 요새겠지. 이건 네가 만든 풍경이야.”
이때,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칼이 그녀의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하여간 고집은?”
릴리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는지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같이 만들었다고 치자.”
“그러지.”
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긍했고 릴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 차이트라는 시간의 신을 만나러 가기 전에 말해줘. 떠나기 전에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치게.”
“감히 나한테?”
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릴리는 쀼루퉁한 표정으로 칼을 쳐다보다 곧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가 뭔데? 인생 막장으로 사는 망나니 기사, 칼리언트 슈타크 아니야?”
“……틀린 말 없네.”
그녀의 억센 감정이 들어간 말투에 칼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떠나기 전에 말하라고.”
그녀는 다시 한번 칼의 멱살을 쥐며 경고를 했고.
칼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직 떠나지 않아. 이제부터는 마계에서 놀 참이거든.”
“……그다음에는 홀연히 사라지게?”
“아직 손가락 안 봤구나?”
“손가락?”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릴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 곧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짝!
약지에는 착용하지 않았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