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전생부터 칼은 마족을 사냥하는 일에 특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마족을 상대로 동족상잔을 저지른 학살의 마왕.
반대로 칼의 사냥감이 된 마족의 계약자 집단, 프리메이슨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 펼쳐졌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칼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격파해버렸다.
적에게 생각이 읽혀진다는 것만큼은 곤혹스러운 것은, 아니 두려운 것은 없다.
스스로 마족에게 영혼을 바쳐 힘을 얻은 계약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꽈악!
그 위에서는 칼이 그의 가슴을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괴, 괴물.”
“누가?”
“네놈이, 네놈이 우리의 계획을 전부 망쳤어!!!”
아직 힘의 여력이 남았는지, 남자의 몸은 검은 기운이 파묻혀 그대로 칼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려고 했다.
서걱! 서걱! 서걱!
파앗!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헤이젤이 검을 뽑아 빛살처럼 검은 형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크아아아악!”
마족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됐고, 칼은 검을 검집에 넣고 있는 헤이젤에게 말했다.
“많이 늘었군. 이제 프루아의 경지는 뛰어넘었다고 봐야지.”
“그 괴팍한 황자님이랑랑 비교하지 마십시오. 괜히 눈먼 칼에 베이고 싶지 않습니다.”
헤이젤은 진심으로 정색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키이라는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전부터 봤지만, 너 프루아를 너무 전투 측정용으로 쓰고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이제 너한테 쪽도 못 쓰고 발발 기는데, 너무 박하게 굴지 마.”
“정정하지.”
키이라의 투정에 칼은 다시 헤이젤을 보며 말했다.
“키이라보다는…….”
“나를 전투 측정용으로 쓰지 마!!”
키이라는 빼액 소리를 내질렀고 칼은 검지로 양쪽 귀를 막았다.
“저, 전 됐습니다. 몸을 사리겠습니다. 제발 그만하시라고요. 할 거면 이 녀석한테 해주십시오.”
헤이젤은 즉각 괴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닥쳐! 자식아. 난 개미 발끝도 못 따라가니까. 날 끌어들이지 마.”
두 명 다 어지간히 키이라를 무서워하고 있어 연관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키이라는 인정하기 싫은 듯 팔짱을 끼며 마틴이나 다른 칼의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네.”
“뭐가?”
칼은 그녀의 투정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고. 키이라는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것. 간부 측에 속한 기사 한 명, 한 명이 일개 기사단 단장의 무력을 뛰어넘었어.”
피식.
솔직한 평가에 칼은 절로 입꼬리에 웃음을 그렸다.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괴츠, 헤이젤, 마틴도 귀끝을 세우며 내심 그녀의 평가에 심취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칼이 냉정하게 박한 평가를 내리기 전까지는…….
우중충.
순식간에 기사단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졌다.
‘이 매정한 인간아! 사람을 대체 어디까지 혹사시킬 참이야?!’
묻고 따지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말 많냐며 갈구는 게 두려워 헤이젤은 항의를 포기했다.
* * *
늦은 밤.
이실리아 왕실 측에서 마련해준 침실에서 칼은 에고스톤, 리바이어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논의의 주제는 물론 이 세상에 침략할 마족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빨리 마족 계약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들도 너의 활약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거야.]
“데제스에 비하면 하찮은 적들이지.”
칼은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적으로서 데제스는 꽤나 성가시고 강한 적이었다.
계획의 실현성 그리고 성취도 마족의 계약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들과 데제스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욕망의 차이지.”
[욕망?]
“종족의 문제나 힘의 논리로 판가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데제스라면 영혼을 바친다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아. 설령, 힘이 없다고 해도 말이지.”
[안타깝군.]
리바이어의 음성에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금에 와서 데제스의 생각을 고찰하는 것은 크게 의미는 없을 거다.
하지만 만약, 데제스가 신이 되고자 하는 비원을 이루려는 것이 마족과의 대치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설령, 잘못된 방법이라도 세상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바이어의 생각을 간파한 칼은 비릿하게 조소를 그리며 물었다.
“악이 악을 집어삼킨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그것까지 포함해서 안타까운 심경을 내민 걸세. 부디 그 아이한테만큼은 나와 같은 실수를 벌이지 말아 주게.]
리바이어는 칼이 정성스럽게 수건으로 닦고 있는 드래곤의 알을 가리켰다.
“노력은 해보지.”
칼의 매끌매끌한 알의 표면을 만지며 생각했다.
만약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드래곤이 나온다면?
‘왠지 빡칠 것 같군.’
스스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라며 칼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 가지 묻고 싶네만. 자네는 이 세상에 남은 마족 계약자를 스스로 퇴치하면 정말로 마계로 갈 것인가?]
“그게 빨라.”
침략당할 바에 침략을 해서 적을 휩쓴다.
그것은 칼이 이번 전쟁을 통해서 얻은 자신만의 신조이자, 이 정신 나간 사고관은 적에게 생각보다 유효하게 먹히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칼과 리바이어만이 알고 있다.
“남은 계약자 수는 얼마나 되지?”
[프리메이슨의 구성원은 총 33명. 30명은 이미 처리했으니, 남은 세 명은 합심해서 자네를 노릴 걸세. 아니면 자네의 주변인, 혹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일을 벌이면, 목숨 그 이상의 것을 내놔야겠지.”
아무리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지만.
적도 궁지에 몰리면 반드시 이를 드러내게 돼 있다.
칼도 이 점만큼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 * *
샤텐에 위치한 어둠으로 뒤덮인 별장.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낡은 이곳에는 현재도 사람이 살긴 했다.
그 증거로 이 안에는 고가의 물건 등이 잔뜩 즐비 돼 있었다.
예를 들어 벽에는 값진 초상화와 예술품 등이 전시돼 있었고, 성채를 구성하고 있는 벽돌은 모두 상아색을 품고 있는 백운석으로 구성돼 있었다.
퇴폐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이 성의 주인이 그런 분위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르.
현재 성의 주인은 사납기 그지없는 도베르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몰락할 대로 몰락한 기분은 어떠신가요? 슬링거. 후후후후. 그렇게 많은 투자를 했는데, 결국은 쪽박 신세를 면치 못했군요.”
어두운 장밋빛을 띠는 눈동자에는 교태 어린 기운과 멸시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보석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는 마미안트 후작부인.
그리고 그런 그녀를 찾아온 것은 프리메이슨의 지부를 담당하고 있던 간부, 칠대 마왕 중 한명인 마몬의 계약자, 슬링거였다.
“하하하하, 경계하고 주시를 했는데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리언트 슈타크. 정말 영특하고 빌어먹을 놈이더군요.”
“호호호호,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죠. 저도 제법 많이 당했거든요.”
대화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지극히 온화해 보였지만.
쿠구구구구구.
분위기만큼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깨갱!
처음 보는 주인의 기세에 당황한 도베르만이 꼬리를 말며 도망치는 순간.
콰직!
마미안트는 붉게 칠해진 손톱으로 도베르만의 머리를 으깨며 중얼거렸다.
“어머나. 주인에게 도망치다니. 용감하지 않은 개는 키울 가치가 없어지잖니?”
흘러나오는 마기의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그들은 금방이라도 마족의 기운을 활성화시킬 것 같았다.
그때, 옆에ㄹ 얌전히 앉아 있던 남은 한 명의 사내가 입을 뗐다.
“……자네들은 격이 떨어지는군.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단결하게 된 것은 그 칼리언트 애송이 한 명을 못 잡아서 그런 건데 말이야.”
쏴아아아아.
그의 몸에는 어두운 안개가 서서히 흘러나왔고.
스스스스스.
어둠에 뒤덮인 구성물 전부가 마치 그림자에 집어 삼켜진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꿀꺽!
언짢다.
지금 그의 기분이 불쾌하다는 것을 눈치챈 마미안트는 눈매를 좁히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오랫동안 자느라고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것 같은데, 칼리언트 슈타크는 우리의 대척점이에요. 보번.”
마미안트 후작 부인의 진홍빛 눈동자에 비춰진 남성의 모습은 퇴폐하기 그지없었다.
수면이 필요한 듯 다크써클 진 눈, 까칠까칠하 턱수염, 엉망진창 헤집어진 머리, 그리고 낡은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참고로 그의 이름은 보번이었다.
“그래서?”
보번은 마미안트 후작부인의 말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고 마미안트 후작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유감스럽지만, 전 당신이 죽은 데제스 싱클레어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칼리언트는 그 흉포한 드래곤, 데제스를 쓰러뜨리고 우리 프리메이슨을 완전히 붕괴시켜버렸어요. 이런데도 그가 두려워해야 할 적이 아닌가요? 보번.”
보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내 참. 나를 향한 평가가 박차군.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슬링거.”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대꾸에 보번은 피식 웃었다.
“내가 원래 인간계에 나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뒤. 본래라면 철혈의 공작으로 모습을 드러내 칠대마왕, 마몬을 강림시키기 위해서 수백만의 피를 흘렸어야 됐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얌전히 수면을 맞이하고 있었지. 헌데, 그 약속을 깨고 네놈들은 내 잠을 깨웠지? 다가오는 적을 막아야 된다면서 말이야.”
“자존심을 챙길 때라고 생각하나요?”
마미안트 후작부인의 반문에 보번은 잇몸을 씨익 드러냈다.
“프리메이슨은 멸망하지 않았다. 구성원이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구축한 게 무너진 건 아니야. 무려 네가 남아 있잖아. 마미안트. 대륙 최강의 부를 지니고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지?”
씨익.
그의 호평에 마미안트 후작 부인은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이거다.
보번이 데제스를 뛰어넘는 유일한 것.
스스로 나서지 않고 가지고 있는 재원을 모두 활용해 적을 몰아붙인다. 그 분야에 대해서 아주 간사한 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번이었다.
“작전을 구상해 보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재원을 이용해서 말이죠. 슬링거, 프리메이슨의 은행창고는 칼리언트에게 강탈당했다고 했는데, 그는 보물창고의 문을 열 수 있나요?”
“마법적인 술식은 그 남자가 일으키는 마나 브레이크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스윽!
슬링거는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현재 그의 오른팔은 살집이 엄청난 몸과 정반대로 앙상한 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마족의 살점으로 보물창고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호호호호, 어지간히 그가 두려웠나 보군요.”
마미안트 후작 부인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팔의 힘을 열화시킬 정도의 힘을 썼다는 것은 슬링거한테 당연 뼈아픈 타격이었다.
만약 칼이 보물창고를 털기 위해 창고에 발을 내디딘다면 그 순간.
슬링거가 남겨둔 오른팔의 살점은 끊임없이 증식해 창고에 갇힌 인간들을 압사시킬 것이다.
이것만큼은 날고 긴다고 하는 칼이라고 해도 분명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민가에 끼치는 그 피해가 어마어마해 칼 역시 섣불리 다가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즉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다는 건 우리라는 거군.”
“어떤 일을 벌일 건지,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작전명은 굴베이그다.”
보번의 말에 마미안트는 ‘어머나’라고 외치며 피식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당신의 작전에 짜증을 부릴 그 남자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 * *
로가하 연맹의 일원으로 속해있는 소국, 이와타르.
이곳 역시 산크투아리움의 군의 행보에 부분이 황폐화가 돼 사람들이 재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나태하고 게을러 농지를 보는 것을 귀찮아했으며, 아이를 잃은 여인들의 곡성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로가하 연맹에서 아무리 많은 예산을 지원해 줘도 결국은 나를 관리하고 있는 중간 관료, 그리고 귀족들의 횡포로 그 돈은 한 번도 마땅한 데 쓰이지 못했다.
오직 사리사욕으로 귀족들의 배를 채워줄 뿐이었다.
“대충 살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오늘도 농지에 나온 농부가 허무하다는 표정으로 곡괭이를 바닥에 집어넣는 순간.
찰랑.
느닷없이 곡괭이 근처로 금화가 떨어졌다.
“이게 뭐야?”
“이야 진짜 잘 만든 금화 같잖아.”
곳곳에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것들을 줍다 이내 하늘 쪽을 쳐다봤다.
반짝!
하늘을 뒤덮는 휘황찬란한 금빛의 소나기.
“……!!”
그것이 우수수 떨어지는 황금이라는 것을 깨닫자, 사람들의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