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콰아앙!
붕괴된 건물의 잔해더미가 우수수 쏟아지려는 찰나.
“기동.”
지잉!
미리 불길한 조짐을 눈치챈 릴리가 결계를 구축해 건물이 붕괴되는 참사는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카아아아아!
이리스는 평소와 다른 살벌한 눈동자로 울음을 토해냈다.
눈앞에 포착된 적의 수는 두 명.
이리스는 누구 한 명 가릴 것 없이 손톱을 휘둘렀다.
쫘아아아아악!
흉포한 손톱의 일격에 검은 로브가 찢겨나갔고,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모습은 예상을 초월했다.
흉흉한 붉은 눈빛에 외피는 전갈의 갑주로 이루어져 있었고.
양팔은 거대한 집게, 허리에는 1미터도 넘는 거대한 데스 스콜피온의 꼬리가 감겨져 있었다.
‘……키메라랑 달라. 저 모습은?’
릴리가 눈매를 좁히며 그 모습을 주시할 때.
쇄액!
빛에 가까운 속도로 휘둘러진 데스 스콜피온의 꼬리가 릴리의 머리를 터뜨리려고 했다.
결계를 형성하기도 전에 쏟아진 급습이었기에 대처는 한발 늦었다.
카앙!
물론 이를 지켜볼 리 없던 마르첼이 오러의 검격으로 꼬리를 튕겨냈다.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튕겨 나간 꼬리는 잘리기는커녕, 건물 곳곳에 튕기며 마르첼과 릴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단단하군.”
“인간이 우리를 이길 방법은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2미터도 훌쩍 넘는 거대한 마족의 계약자가 집게로 마르첼의 목을 절단시키기 위해 다가왔다.
마르첼은 즉각 집게 사이에 검을 헤집어 넣어 일격을 무마시켰다.
카카카카카캉!
허나, 무엇이든 가를 수 있는 오러의 검격에도 녀석의 집게는 절단되기는커녕 오히려 마르첼의 검을 절단시키려 하고 있었다.
“카아아앙!”
완전히 힘을 해방한 이리스는 즉각 거한의 사내의 목에 손톱을 꽂아 넣으려고 했다.
“수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알량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콰앙!
“크헉!”
그는 즉각 이리스의 몸을 팔로 후려쳤고, 이리스는 토혈을 하며 벽과 충돌했다.
“이리스!”
예상을 뛰어넘은 적의 강함에 릴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카앙! 카앙! 카앙!
마르첼은 건물들 곳곳에 튕기며 날아오는 데스 스콜피온의 꼬리를 견제하는 것과 동시에 마족의 계약자와 가까스로 호각을 벌이고 있었다.
지잉!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릴리는 주변이 부서시지 않도록 결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체구가 작은 마족의 계약자에게 물었다.
“……우릴 노리는 이유가 뭐야? 알고 접근한 거지?”
“칼리언트 슈타크가 애지중지하는 연인. 우린 네년을 사로잡아 그 광견의 행보에 제지를 걸어야겠어.”
빠직!
“연인 아니거든?”
괜스레 화가 난 릴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다가 곧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이 마족의 계약자한테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유난히 칼은 겁나나 보네.”
“…….”
정곡을 찔렸는지, 그는 대답하지 못했고.
릴리는 소지하고 있던 단검을 검집에서 뽑으며 이야기했다.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칼은 전쟁이 끝난 직후 너희들을 노리고 있는 거지? 아마 이 정도 힘을 소지하고 있으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어떤 음모나 계획이 있었을 거고. 칼은 너희들의 계획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거잖아?”
“계집 주제에 말이 많군.”
“인질극을 벌이려고 한 주제에 말이 많네.”
조금의 겁도 없이 반박하는 그녀의 기세에 마족의 계약자는 침묵을 지켰다.
릴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야. 물러나.”
“협상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협상으로 제시할 게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야?”
스릉!
릴리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목에 단검을 들이댔다.
“?!”
“뭐 하는 짓이야!”
두 마족의 계약자는 크게 당황해 눈을 부릅떴고 마르첼은 저도 모르게 일갈을 내뱉었다.
이에 릴리는 주변의 반응에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희들은 칼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칼을 멈추기 위해 나를 인질로 삼으려 한 거고. 근데, 여기서 만약 내가 목숨을 끊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동요한 마족의 계약자들을 향해 릴리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광견의 분노를 사서 지옥 이상을 보게 될 거야. 아마 칼이라면, 세상에 남아있는 너희들의 흔적을 완전히 불살라버리겠지.”
“허, 허세 부리지 마라.”
“허세로 보여?”
주륵!
도발적인 말과 함께 상아 같은 목덜미의 살갗이 베이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움찔!
“미친?!”
크게 당황한 마족의 계약자들이 놀라서 몸이 경직될 때.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허공에서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화살이 철보다 단단한 그들의 몸을 쪼개고 관통했다.
“네놈!”
기습에 당황한 마족의 계약자들이 화살이 쏟아진 곳을 응시하자…….
펄럭!
그곳에는 엘프, 베르데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쏜살처럼 날아와 거한의 마족 계약자의 다리를 검으로 베어버렸다.
“까불지 마!”
격통은 없는지 녀석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데스 스콜피온의 꼬리로 베르데를 겨누었다.
서걱!
그러나 불시의 기습은 불발로 끝났다.
당연 이를 지켜볼 리 없던 마르첼이 그의 꼬리를 절단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젠장! 에클라 세트가 둘이나!”
상황이 반전됐다는 것을 예감한 남은 마족 계약자는 시급히 발을 돌려 도주했다.
사락!
우연의 일치인지 눈앞에는 연보랏빛 머릿결을 휘날리는 여인이 길을 걷던 참이었다.
‘저년을 인질로 삼으면!’
계산을 끝마친 마족 계약자는 그녀에게 즉각 손길을 뻗었다.
그 찰나의 순간 여인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조심하세요. 거긴 꽤 짜릿한 게 떨어질 예정이거든요.”
“에, 에클라 세트?!”
이번에도 뜻밖의 출현에 당혹을 금치 못한 그가 눈을 부릅뜰 때.
파직!
콰앙!
델피나의 완드에서 튀어나온 전광이 그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숯검정이 돼버린 그는 모락모락 연기를 냈다.
하지만 인간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선 마족의 계약자가 이 일격으로 죽을 리는 만무했다.
“이, 이 건방진 년이!”
화를 참을 수 없는 그는 막간의 힘을 발휘해 델피나의 목을 절단내려고 했지만.
콰아아아아앙!
그보다 일찍 날아온 창날이 그의 몸을 완전히 찔러 심장을 관통했다.
주륵!
온몸에 피칠갑이 돼버린 그는 꿈틀꿈틀 경련만 일으키다 이내 생을 마감해버렸다.
한편 남은 한 명의 마족 계약자는 일찌감치 마르첼의 검격에 사지가 썰린 채로 릴리의 결계에 묶여 있었다.
“……끄응. 너무 센 거 아니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리스는 순식간에 사태를 진압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엘프, 베르데.
마도사, 델피나.
그리고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는 창잡이, 에릭 듀란트.
그들은 모두 산크투아리움과의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공훈을 쌓은 용자들이었다.
상황 파악을 어느 정도 마친 릴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천만에요. 어머 아무리 실연했다고 해도 자해는 안 돼요. 선배.”
델피나는 얄궂게 웃으며 상처가 난 릴리의 목에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빠직!
얌전히 치료를 받고 있던 릴리는 쌍심지에 불을 켜며 그녀를 쏘아봤다.
“실연이라니. 난 아직 실연당하지 않았어!”
“대답 듣기 무서워서 두 달 동안 잠적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으아아아아! 정보의 출처가 어디야! 누구야! 빨리 말해?!”
흥분한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델피나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보안상 말할 수 없어요.”
델피나는 얄궂게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포기하실 거면, 빨리 말씀해주세요. 뒤에 순서도 있잖아요.”
쭈욱!
릴리는 델피나의 한쪽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얄미워졌네. 후배.”
“후후후, 귀여워진 거라고 해주세요. 그나저나 이건 인사 표현 맞죠?”
쭈욱!
델피나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릴리의 볼을 꼬집어 늘렸다.
찌릿!
두 여인 사이에서 펼쳐지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마르첼은 애써 외면했다.
“쓸데없는 일로 신경전 벌이지 마.”
그때, 베르데의 냉정한 일침에 두 여인인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크흠!”
뒤늦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릴리는 얼굴을 붉힌 상태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너희 어떻게 알고 여기로 온 거야?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이 녀석들과 전투가 많이 익숙해 보이는데.”
베르데는 어깨를 풀며 답을 해주었다.
“줄곧 마족 계약자들을 사냥하러 다녔어. 그 녀석의 대처가 빨라서 지금은 상당히 궁지로 몰아붙였고.”
“선배가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거든요.”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단 여기서 풀기에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따라와. 성으로 안내하지. 공주마마께서 여독을 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놨으니까.”
창을 회수한 에릭은 창대를 어깨 위로 올리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뭐야? 에리도 뭔가 알고 있었던 거야?”
자기 혼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릴리는 뾰로통 볼을 부풀렸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다 양쪽 볼을 꼭 눌러 이성을 가다듬은 그녀는 여기서 이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이에 대해 언급했다.
“그래서 칼은 어디 있어?”
“........”
그 질문에 모두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괜한 질문 한 번에 호기심만 커지는 릴리였다.
* * *
이실리아 해협 부근에 위치한 암초 부근.
콰지지직!
그곳에는 붉은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 바그로바가 마족 계약자의 시체를 이빨로 깨물어 부수며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암초 부근에는 수백의 마족 계약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젠 포기!”
그들과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헤이젤은 체력이 고갈돼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이제는 익숙해지지 않았냐? 강해지기도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것 같고.”
철푸덕!
기세 좋게 말하는 것과 달리 괴츠 역시 사력을 다한 참이라 바닥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그리워. 따뜻한 수프가 그리워. 마족 싫어. 꺼지라고 해.”
헤이젤은 그동안 쌓아왔던 불만과 불평을 한껏 토로했다.
하지만 여기서 붉은 머리칼을 휘날린 인영이…….
“일어나.”
라고 하자, 두 사람 다 벌떡 일어섰다.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키이라 슈타크였다.
“그 자식. 한창 전투 중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한 사람을 위해 몰아넣다니.”
현재 그녀는 답답한 나머지 화를 삭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에클라 세트를 대동해 압도적으로 마족 계약자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는데, 녀석들의 의중을 눈치챈 칼은 무려 에클라 세트 중 세 명을 릴리 쪽으로 보냈다.
그 때문에 진압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다 처리했으니까 끝난 거잖아.”
마틴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그녀에게 물병을 던져주었다.
물병을 받아든 키이라는 눈매를 좁히며 마틴에게 말했다.
“너 일국의 공주한테 계속 건방지게 구네.”
“원래 성격이다.”
“고쳐. 나보고 이해하라는 거야?”
“이해하지 마. 신경도 쓰지 말고.”
두 남녀는 노골적으로 서로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휘이이잉!
그 쌀쌀한 기운에 노출된 헤이젤과 괴츠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기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키이라가 한숨을 쉰 뒤, 관심의 방향을 남동생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 거지?’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날카로운 촉수를 가진 거대한 마족 계약자가 잔뜩 쓰러져 있었고 칼은 피가 묻은 얼굴을 소매로 닦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