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성지탈환을 명분으로 한 산크투아리움과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현재.
전쟁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대륙을 복구하기 위해 각 국가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쏴아아아!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이실리아의 해변.
그곳에 거대한 별장을 구한 릴리는 꾀죄죄한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혀두고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자, 여기 있는 게 과연 뭘까요?”
그녀는 이실리아의 섬을 본딴 지도를 보여주며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고 있었다.
“음 삶은 감자요?”
“아니야. 저건 픽시만 해변에 구르는 돌멩이잖아!”
그 정체를 알기 어려웠는지, 아이들은 옥신각신 떠들며 답을 추론했다.
“푸훗!”
그 풍경을 지켜보던 릴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이건 너희들이 살고있는 이실리아야.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생겼어.”
“우와!!”
아이들은 믿기 어려웠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감탄했다.
“우와! 근데, 우리는 어디 있는 거야!!!”
그중에서 가장 눈을 뜨고 반색하는 것은 여우 귀를 가지고 있는 수인, 이리스였다.
시녀복을 입은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창문으로 몸을 집어넣어 수업에 대한 열렬한 열망을 발산했다.
아마 잡무를 보고 있는 중에 호기심이 동한 것 같았다.
“하하하하 이리스! 엄청 웃겨!”
“위, 위험해!”
아이들은 그런 이리스를 보며 희희낙락 웃음을 터뜨렸고, 릴리는 곤란한 기색으로 지도의 한곳을 검지로 꼭 눌렀다.
“이쯤이야.”
“오오오오! 그러면, 말이야. 그 왕궁은?”
아이들이 할 질문을 전부 가로채는 이리스의 수업 열망에 릴리가 곤혹스러워할 때쯤.
척!
이리스의 목깃을 손으로 집은 마르첼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냐?”
삐질삐질!
아이들을 비롯해 이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따가운 시선을 회피했다.
“고마워. 마르첼.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 험한 말은 하지 말아줘.”
릴리가 살포시 인사를 건네자, 마르첼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이리스를 데려갔다.
마르첼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그제야 편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다음은?”
그리고 다시 수업을 진행하려는 중.
딸랑딸랑!
문이 열리며 그 틈새 사이로 휴대용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일제히 반색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에리가 화사한 웃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자 꼬맹이들아. 간식시간이다. 먹고 하렴.”
“와아아아!”
“……에리.”
릴리가 뾰로통한 볼을 부풀리자, 에리는 한쪽 눈을 감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차피 쉬는 시간 맞잖아? 우리 잠깐 티타임 좀 갖자.”
“…….”
그녀의 권고에 릴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 * *
집무실 탁자에는 고급스런 다과와 홍차가 놓여 있었다.
휴식 겸 홍차를 한입 마시던 릴리는 그윽한 향기와 따뜻함에 몸에 피로가 개운하게 풀렸다.
“휴식하니까 좋지?”
에리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고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아. 모처럼 이런 평화로운 곳에 마시니까 행복하네.”
“근데, 언제까지 고생할 거야. 우리도 대국의 백작님이 눌러앉으니까 부담된다고.”
“모른 척해줘.”
“호호, 언제는 출세, 출세 거리더니 달라졌네. 릴리.”
“…….”
릴리는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묵인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 부인의 작위를 황제인 루드거 슈타크로부터 직접 하사받았다.
단신의 여자의 몸, 그것도 평민 출신으로 이룬 혁혁한 성과에 그녀는 빈민과 평민들 사이에서 축복과 경외를 두루두루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는 현재 몹시 사적인 이유로 이곳에 있었다.
계기가 된 것은 칼에게 고백한 사건으로…….
그 뒤로 그녀는 부끄러움과 왜 자기만 이렇게 설레발을 쳐야 하는지 억울한 느낌에 업무를 내팽개치고 이실리아로 당도했고.
그 기한은 무려 두 달이나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 슈타크가의 가신들이 그녀를 찾아 제발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럴 때마다 릴리는 ‘불만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하며 되받아쳤다.
그 말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칼리언트 슈타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가신들은 간담이 서늘했다.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지만, 루콘의 광견이라 불렸던 시절의 그 드센 성질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가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거야?”
“하나도 안 불쌍해.”
에리는 릴리를 데리고 오기 위해 힘쓰는 가신들에게 저도 모르게 동정하고 있었다.
에리는 아직까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릴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뭐가?”
“그 녀석. 둔해서 그런 것뿐이지. 누구보다 널 챙기고 있다고.”
“…….”
에리의 말에 릴리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마냥 부정하기에는 신경을 써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릴리가 빈민가의 아이들을 교육을 한다고 결심하기 무섭게 그에 대한 예산을 필요 이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또 그녀의 신변에 무슨 해를 입을까 싶어 마르첼과 이리스를 붙여두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칼이 아끼는 시녀, 레인이 직접 릴리를 섬기고 있었다.
“……최근에는 뭐하고 있어?”
괜스레 부끄러워진 그녀는 에리에게 칼의 근황을 물었다.
측근인 마르첼에게도 물어볼 수 있었지만, 마르첼은 계약상 대답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레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계승서열 1위가 되었는데, 대차게 깠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거주하고 있던 알테어에서 측근 몇몇과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사이로 에클라 세트로 추앙받고 있는 영웅들도 사라졌지.”
“…….”
릴리는 눈매를 좁히며 깊은 고심에 잠겼다.
칼은 분명 떠난다고 예고했지만, 그날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진짜 떠난 건 아니겠지.’
“릴리.”
에리는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는 릴리를 보며 포근하게 웃어 보였다.
“왜, 왜?”
평소와 다르게 말괄량이 모습이 아니라 어른의 여유가 돋보이는 웃음에 릴리는 조금 당황했다.
“그 녀석이랑 사랑의 도피를 해서 멀리 떠나간다고 해도 난 두 손 들고 환영할 거야.”
“새, 새삼스럽긴. 그런 사이 아니야.”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저었다.
* * *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과 놀기 좋아하는 이리스는 손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까지 바래다주고 있었다.
활보하고 있는 거리는 빈민가의 골목.
이실리아는 여러모로 치안이 좋지만 사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릴리는 불안한 마음을 못 참고 늘 이런 식으로 아이들의 귀갓길에 동행했다.
“집 도착했다.”
“내일도 같이 놀자. 이리스!”
“잘 가~”
아이들은 정겹게 이리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집까지 뛰어갔고.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르첼은 무뚝뚝하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고마워.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너라면 언제든지 그거 벗겨낼 수 있잖아.”
옆에서 건네는 릴리의 질문에 마르첼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답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까.”
전쟁 당시 데제스의 오른팔로 전쟁을 일으킨 사내.
하지만 의외로 전쟁의 내막을 파악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마르첼의 명성은 미미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약자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기에 원한을 덜 사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는 엄중하고 무겁다.
칼이 그에게 내린 처분은 신분을 노예로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목에는 이리스와 똑같은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이 구속구에는 착용한 자에게 금제를 가할 수 있는데, 금제가 발동 시 구속구를 착용한 당사자는 숨을 쉴 수 없는 격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이 구속구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범주로 에클라 세트를 구속시키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물론, 칼 역시 이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마르첼이 이실리아에서 머무는 것은 스스로 선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리스와 평등해지고 싶은 거지?”
“…….”
마르첼은 쉽게 답변하지 못했고, 릴리는 피식 웃어보였다.
“너 가만히 보면 자존심 센 게, 칼이랑 똑같네. 근데, 그런 무뚝뚝한 점이 더 알아보기 쉬울 때가 있다.”
“건방지군.”
마르첼은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끼며 쯧 혀를 찼다.
쫑긋!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이리스가 잽싸게 다가와 마르첼의 목을 감싸 안았다.
“뭐야? 뭐야? 무슨 말했어?”
“떨어져.”
“대답해줘!”
마르첼이 귀찮다는 내색을 보이자, 이리스는 그의 귀를 깨물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마르첼은 그녀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쥐어박았고 이리스는 ‘히잉’ 소리를 내며 그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아이들은 다 보냈으니, 저녁 먹으러 가자. 레인이 오늘은 이리스가 좋아하는 고기로 잔뜩 해준다고 했으니까.”
“좋아!”
이리스는 얼굴에 보조개를 피우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릴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길을 걷던 도중.
‘어?’
눈앞으로 치렁치렁한 검은 로브를 덮어쓴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신장은 2미터를 훌쩍 뛰어넘어 크나큰 위화감을 주었다.
‘저 사람들이 왜 이런 곳에…….’
불안한 마음에 초점이 흔들릴 때.
“멈춰.”
마르첼은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들은 못 듣는 척,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스릉!
마르첼은 검을 들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신장이 가장 큰 남자는 무척이나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마르첼에게 불쾌감을 표시했다.
“크르르르!”
이 때, 이리스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건지 이를 내세우며 강하게 적의를 표시했다.
“……마르첼. 왜 그래?”
범인을 초월한 감각으로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런 직감이 든 릴리는 언제든지 결계를 내세울 준비를 했다.
마르첼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이곳은 통행을 할 수 있는 길이 아니야. 거주지만 있지 여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용무로 지나가는 거지?”
“……길을 잘못 들었나 보군.”
“움직이지 마.”
스릉!
마르첼의 의지에 맞춰 검에서 검명이 울려 퍼졌다.
심상치 않은 검기에 로브를 뒤집어쓴 일행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마르첼이 다시 심문했다.
“……너희 낮부터 우릴 쫓고 있었잖아. 우연인 척 시늉은 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
“무엇보다 은은히 흘리고 있는 그 마력. 인간의 것이 아니야.”
희번득!
쇄애애액!
그 사이 결단을 끝마친 건지, 마르첼은 과감하게 장신의 인영에게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눈치가 보통 빠른 게 아니군. 썩어도 에클라 세트는 궤가 다르다는 건가?”
하지만 그 일격은 어떤 것도 베지 못하고 상대의 손목에 가로막혔다.
지이이잉!
검이 서서히 떨리며 공명음을 낼 때, 마르첼은 다시 한번 불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더 이상 대답을 회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히죽 웃으며 입을 뗐다.
“프리메이슨. 마족의 계약자지.”
콰아아아앙!
동시에 그의 커다란 주먹이 냅다 건물의 벽을 내려치며 단숨에 건물을 붕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