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나는…….”
정체를 묻는 릴리의 질문에 칼은 예상외로 솔직하게 답했다.
전생에 마족을 멸망시킨 마왕, 벨리앗 시절부터 현재의 칼리언트 슈타크의 모습까지 생각보다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릴리의 낯빛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두려운 건가?’
이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델피나를 통해 릴리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도 있지만, 썩 내키는 방법도 아니었다.
늘 진심으로 자신을 대한 릴리였기에 칼 역시 진심으로 답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릴리가 입을 뗐다.
“……칼은 앞으로 뭐가 하고 싶은 거야? 그 차이트란 신을 만나서 다시 한번 결판을 내고 싶은 거야?”
“그게 나의 유일한 낙이니까. 이 세상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아. 연회는 적당히 즐겨둬.”
칼은 씨익 웃으며 경쾌하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꽈악!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고 했지만, 릴리가 칼의 소매를 붙들었다.
딱히 강하게 힘을 쥔 것도 아니다. 대신 강한 고집이 서려 있어 칼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칼이 눈매를 좁히며 쳐다보자, 릴리가 침울하게 입을 뗐다.
“칼은 이곳을 떠날 거야?”
“…….”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칼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칼과 알고 지냈던 만큼 릴리는 그 속내를 너무나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응.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후퇴 없는 답에 릴리는 절박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나도 데려가줘.”
“너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 거야.”
차이트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각 차원에서 내로라하는 신과 강자, 달인들이 집약한 곳이었다.
그리고 어떤 세계보다 컸다.
그런 곳에 릴리를 데려가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릴리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안…….”
“돼!”
그 때문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릴리는 어거지로 밀어붙였다.
상대가 누구라도 언변을 제압할 수 있는 칼이었지만, 울음이 섞인 그녀의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쫓아오려는 거야?”
“좋아해! 좋아한다고! 이 바보야! 모른 척하지 마! 평생 같이 있고 싶으니까!”
얼굴이 잔뜩 상기됐지만,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강하게 외쳤다.
“…….”
칼 역시 크게 당황해 어물쩍거리는 순간.
퍼억!
“크읏! 너!”
고백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버린 릴리는 있는 힘껏 칼의 복부를 때렸다.
기습을 허용한 칼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을 때.
후다닥!
릴리가 힘차게 도주했다.
그런 그녀에게 손길을 뻗으려던 칼은 곧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벽구석 쪽네는 마틴을 비롯해 헤이젤, 괴츠, 디아나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헤이젤은 퍽퍽한 감자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대놓고 칼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으휴! 저 둔탱이! 저렇게 괴팍한 성격 이해해주고 만나주는 여자가 흔한 줄 아나?”
“그러니까 그냥 자신 있게 ‘내 여자다!’라고 선포하면 되는 거 아니야?”
괴츠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두,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마틴과 함께 눈치를 보던 디아나는 두 사람의 언동에 주의를 주었지만.
빠드드득!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칼이 주먹의 관절을 풀고 있었다.
* * *
연회가 어느 정도 끝난 시점.
“…….”
“…….”
괴츠와 헤이젤은 눈탱이 밤탱이가 된 채,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었다.
그래도 크림슨 게일의 기사단, 중추인 만큼 아랫사람들이 전혀 발을 들일 수 없는 칼의 방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마틴은 아직까지 이빨을 빠득빠득 갈고 있는 칼에게 종용했다.
“두 분 다 죽을 정도의 벌을 받았지만, 한 번만 아량을 베푸시는 게…….”
옆에서 그런 마틴을 거드는 디아나였지만.
“아니. 이게 뭐라고 죽을죄야!”
헤이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강하게 항변했다.
“닥치고 일어서.”
그때, 칼이 음허한 표정으로 다그치자…….
벌떡!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물며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마틴은 못 말리겠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칼을 쳐다봤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칼은 뚱한 표정으로 마틴을 쳐다봤고 마틴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게 끝이야?”
마틴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디아나와 헤이젤은 심각하게 고뇌를 했고 괴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끝나지 않았어.”
“?!”
그 말에 모두가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칼은 그런 부하들에게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마저 했다.
“아직 이 대륙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또 다른 적이 올 예정이거든.”
“또, 또 다른 적이 있는 건가요?”
디아나가 두려운 표정을 지을 때, 칼은 목에 착용하고 있던 펜던트를 들어 보였다.
“인사해. 적의 내막을 알고 있는 존재다.”
“…….”
칼의 갑작스런 행동에 헤이젤은 속으로 ‘이 인간이 아주 정신이 나갔구먼.’이라고 생각할 때쯤.
펜던트에 부착된 옥석에서 굵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리바이어라고 하네.]
“우어어어어어어!”
그 한마디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데제스 싱클레어의 음모를 저지한 뒤.
칼은 곧장 성역, 디바인에 이탈하지 않고 탐색을 시도했다.
그리고 해저 동굴 부근에 봉인돼 있던 에고스톤, 리바이어와 마주했다.
드래곤들의 사념을 계승해온 에고 스톤, 리바이어.
하지만 그 찬란한 역사를 지닌 리바이어는 데제스에게 유린당해 마법에 대한 기억을 갈취당해했었다.
약 20미터에 다다른 옥색 빛을 띠는 바위.
그 주변으로 데제스가 쳐둔 강력한 사슬에 의해 결박돼 있었지만.
칼은 시엘로와 인페르노를 꺼내 들어 봉인의 사슬을 끊어냈다.
[그대가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드래곤, 데제스 싱클레어를 쓰러뜨린 마왕이군. 어째서 날 풀어주는 거지?]
봉인에서 벗어난 리바이어는 빛을 발하며 무덤덤한 음성으로 칼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녀석의 유희는 끝이 났으니까, 수습은 해야 되지 않겠어?”
칼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으며 장시간 동안 리바이어와 대화를 나누었다.
리바이어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리바이어 역시 까마득한 세월을 보냈기에 정신적인 역량이 얼추 비슷했기 때문이다.
[……난 그 아이에게 많은 부담을 줬어. 그리고 의도치 않게 잘못된 가치관과 사랑이 결여한 채로 키웠지.]
리바이어는 대체적으로 데제스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는 대신 깊은 탄식을 남겼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데제스를 사랑으로 키웠다면?
결코 오늘날 같은 만행을 일으키지 않았으리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이에 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녀석의 한계였을 뿐이야. 묻겠다. 리바이어여. 네놈이 데제스에게 짊어지게 한 부담이 뭐지?”
[나에게 손을 얹어라. 기억을 공유해주마.]
리바이어의 지시에 칼은 가볍게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매끌매끌한 감촉과 희미하게 남은 따뜻한 감촉이 손까지 타고 올 때, 리바이어의 기억이 칼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대 시절에 벌어진 드래곤들의 전쟁이었다.
시대는 인간이 국가를 설립하기 이전의 시대로 당시 드래곤들은 중간계를 침공한 마족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리바이어는 기억 속의 풍경을 보여주며 동시에 상황을 해설했다.
[드래곤이 중간계의 수호자로 번성했을 당시에는 마족이란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불변의 존재에게 소멸당했기 때문이지.
“…….”
그 불변의 존재가 자신을 일컫는 것임을 직감한 칼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마계에 남아있던 세피로트는 일곱 개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어. 당시에 드래곤들은 마계에 흥미조차 없었던 시절이기에 간과하고 말았어. 칠대마왕의 출현을…….]
칼의 머릿속으로 또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몬과 계약한 프리메이슨의 간부, 슬링거의 모습이었다.
‘열매에서 부화한 녀석들은 곧장 힘을 강화하기 위해 중간계의 존재와 계약한 거군.’
[그렇다.]
리바이어는 칼의 추측에 수긍하며 연이어 말했다.
[칠대마왕은 궤가 다른 강함을 가졌고, 드래곤들 대다수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금까지 수면기를 진행 중인 드래곤이 있는 건,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지.]
당시 전쟁으로 드래곤은 가까스로 칠대 마왕이 강림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의 정신을 계승한 리바이어는 훗날의 위험을 대처해야 했다.
칠대 마왕은 다시 이 땅에 강림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드래곤을 키워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데제스군.”
[하지만 녀석은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성장했지. 또 다른 악으로…….]
에고 스톤 주제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지, 음성에는 침울한 기색이 엿보였다.
칼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칠대 마왕이 앞으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장담할 수 없다. 마계 상황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이미 녀석들 중 몇몇은 탑으로 넘어갔고 강인한 두 존재만이 남아 있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다.]
“오호라. 네놈은 탑을 알고 있군.”
[나 역시 신의 영역에 다다른 지혜를 갖춘 자. 모르는 게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발설 직후.
칼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최종 목표였던 차이트와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탑에 진입해야 됐기 때문이다.
[나와 계약해도 좋다. 칼리언트 슈타크여.]
그리고 리바이어는 용케 칼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위 주제. 건방지군.”
칼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가만 방치할 리도 없었다.
차이트와 만나기 전에 칠대 마왕의 습격으로 이 세상이 혼란으로 뒤덮이면 계약이 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약은 어디까지나 칼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 조건을 제시해라. 리바이어.”
고개를 추켜세우며 오만하게 발언했다.
-두 가지를 제안하지. 하나는 그대 손으로 드래곤의 소멸을 막아다오.
“데제스는 소멸했다만?”
-아직 그가 깨뜨리지 못한 알이 있다. 세월이 꽤 흘렀고 이제 곧 부화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아이를 맡아다오.
사랑과 정성이 결여된 상태로 괴물을 키운 만큼 이번에는 결단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됐다.
“보모 역할이냐?”
칼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입을 열었다.
“좋아.”
스스스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바이어가 발휘한 전송 마법으로 드래곤의 알이 전송됐고, 칼은 그대로 알을 껴안았다.
[두 번째 조건은 칠대 마왕의 현신을 막는데, 협조해 다오. 지금 중간계를 수호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그대뿐이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의견이 일치한 순간, 리바이어는 제단에 놓인 펜던트에 의식을 심었다.
* * *
에고 스톤, 리바이어와 겪은 일에 대해 부하들에게 털어놓은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더 물어보고 싶은 건?”
“…….”
마틴을 비롯한 모두는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할 뿐.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리바이어는 눈치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용자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