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휘이이이잉!
스산한 바람이 성역, 디바인의 전역으로 펼쳐졌다.
우우웅!
그 중심부에 뿌리를 뻗은 유사 세피로트에 맺힌 열매는 기이한 공명음을 내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정정, 긴장감을 고조시킨 것은 바로 칼과 데제스였다.
꿀꺽!
두 사람이 맞닥뜨린 순간, 먼발치서 이를 지켜보던 릴리는 고인침을 삼켜 넘겼다.
지금 자신은 라흐만 대륙에 기록될 하나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드래곤과 그것을 지키는 기사.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인 것 같아.’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정말 동화같은 건 지는 확신은 못 하지만.
이 두 남자의 싸움으로 차후 대륙의 역사가 정해진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이 두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데제스는 혐오스런 표정을 지으며 칼에게 말했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 전에 질문을 하나 하지. 넌 날 죽이기 위해서 이곳에 온건가?”
칼은 같잖다는 듯 비웃으며 답했다.
“외교적인 해법으로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냐?”
“지금 상황에서 나라의 기틀이 무슨 상관이지?”
“그러시겠지. 내 목적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면, 답해주지.”
싱긋!
칼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맺힌 열매를 모두 베어버릴 거야. 이것들은 태어나면 안 되는 것들이니까.”
“역시 네놈은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을 기점으로 데제스의 살기가 급격히 팽배해지더니, 곧장 달려들었다.
카아아앙!
쩌저저적!
검격과 함께 대기를 응결시키는 빙결이 칼을 뒤덮었다.
카아앙!
그러나 칼이 뒤늦게 빼든 시엘로는 잔잔하게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며 데제스의 아르젠트 파우라를 막아냈다.
‘시작이다!’
이제껏 지체된 승부가 비로소 시작됐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데제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한 손을 들어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파사사사삭!
그 동작에 맞춰 대지에서 수많은 백색의 손이 튀어나와 칼을 붙들려고 했지만.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칼은 유유히 그것들을 피하고 베어나가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
채앵!
그리고 검 끝을 단숨에 데제스의 미간을 향해 찔러 넣었고, 데제스는 어렵지 않게 검날로 튕겨냈다.
주륵!
하지만 쾌속으로 휘두른 검격을 완전히 쳐내지는 못했는지 뺨에 긴 혈선이 그려졌다.
‘전과는 비교되지도 않게 강해졌군.’
자존심에 흔집이 간 데제스는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카앙!
칼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막아냈고 둘은 곧장 서로를 죽일 것처럼 난잡하게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카카카카카카캉!
한 합, 한 합 하나가 태동을 끊을만한 검격이 교차한다.
파장은 더욱이 커져 디바인 전역에는 어느새 시엘로와 아르젠트 파우라가 서로 공명하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기이이이이!
누군가에게는 이 격전에 기이한 이명을 들었고, 또 누군가는 두 사람의 살기를 감지하고는 숨조차 쉬기 버거워했다.
승부는 쉽사리 갈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데제스가 말리고 있다.
‘지금 만든 이 몸은 라흐만 대륙의 영웅들의 한계치를 훨씬 뛰어넘은 육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한테 밀리는 건가.’
카아아앙!
다시 한번 마주친 두 검격이 고막을 찢어버릴 만큼 살벌한 공명을 일으켰다.
‘벽을 만났다.’
데제스 싱클레어.
지금까지 라흐만 대륙의 역사를 조작하고 모든 것을 쟁취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해악.
그 행보에는 지금까지 막힘이 없었고, 이제 곧 성공이란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만큼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벽 앞에서 데제스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현재 끝없는 낭떠러지로 영원히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있을 수 없어.”
애써 부정해보지만.
카앙!
검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칼과의 차이를 현격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앙! 카앙! 카앙!
쇄도하는 검날를 주고 받는 사이, 조금씩이지만 몸에 생채기가 생기고 있었다.
“있을 수 없어.”
중얼거리면서 내뱉는 부정은 어째서인지 수긍인 것처럼 들렸다.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우우우웅!
격변한 데제스가 일갈을 내뱉은 순간, 데제스의 피부 곳곳에 드래곤의 비늘과 꼬리, 날개가 튀어나오며 드래고니안 같은 모습이 되었다.
빠득! 빠득!
콰아아앙!
드래곤의 힘을 반쯤 해방하기 무섭게 칼의 몸은 정신없이 지면을 튕기고 있었다.
“칼!”
“나오지 마!”
당황한 릴리가 소리를 지르며, 결계를 치려고 할 때.
빠직! 콰앙!
칼은 일갈을 내지르며 맨주먹을 데제스의 복부를 꽂아 넣었다.
오러가 실린 권격에 비늘에 금이 갔지만, 데제스는 우악스런 손아귀로 칼의 팔뚝을 잡아 으스러뜨렸다.
[부족해, 부족해! 내가 위야! 신이 되기 위한 내 계획을 방해하지 마!]
우위를 점한 데제스는 한층 더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는 아르젠트 파우라가 데제스의 덩치에 맞게 크기가 점차 확장됐다.
쇄액!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휘두른 그 검합 하나, 하나에 파공성이 터지며 칼을 질풍처럼 몰아붙였다.
카앙! 카앙! 카앙!
시엘로로 데제스의 검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는지, 칼의 몸이 다시 연거푸 지면을 튕겼다.
주륵!
“인간의 몸으로는 역량이 부족하니까, 인간의 틀을 깨버렸군.”
터진 입술에 흘러나온 피를 소매로 닦은 칼은 곧장 시엘로를 입에 물었다.
스릉!
그러고는 엉망진창이 된 왼팔의 부상은 뒤로 하고 허리춤에서 인페르노를 뽑아들어 시엘로와 결착했다.
데제스의 역량에 맞게 아르젠트 파우라도 강제로 성장한 만큼, 시엘로만으로는 격이 떨어졌다.
‘저건?!’
두 자루의 검이 하나가 된 광경을 지켜본 데제스는 눈을 부릅떴다.
데제스가 처음 디바인에 당도한 뒤, 브레스를 쏘아낼 때 그의 브레스를 벤 것과 똑같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벨 수 없어!’
스스스.
콰아아앙!
데제스의 입안에 맺힌 브레스가 단숨에 칼을 덮쳤다.
쇄애애애애액!
휘몰아치는 백은의 섬광을 검으로 가르고 있던 칼은 씨익 웃어 보였다.
“딱 이 느낌이야.”
‘웃어?!’
당황한 데제스가 눈을 부릅뜬 순간!
지이잉!
콰치이잉!
시엘로와 인페르노가 일으킨 마나브레이크가 데제스의 브레스를 파편째로 흐트러뜨렸다.
서걱!
콰아아앙!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공에 그어진 검로는 지금까지 패도적이기만 했던 검격과는 상이했다.
고고한 붉은 검로를 그리며 데제스 싱클레어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겨우 한 팔로 날 벴어?!’
데제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서걱! 서걱!
붉은 참격이 다다른 곳은 유사 세피로트에 맺힌 수많은 열매였다.
[끼에에에에엑!]
열매에 갇혀 태어나기를 고대했던 무언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터져나갔다.
그것도 무려 수백 개나…….
후두둑 과육을 흘리며 터지는 그것들을 보며 데제스는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네놈!! 감히!!”
우우우우웅!
더 이상 자비는 없다.
더 이상 이 녀석과 검을 나눌 필요는 없다.
압도적인 힘으로 뭉개면 그뿐이다.
우우우우웅!
다시 한번 폴리모프를 한 데제스의 몸은 완전히 본체로 현현하기 위해 점차 몸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성역, 디바인의 대기가 폭주한 데제스의 마력에 의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칼!”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릴리가 멀찍이서 다시 한번 칼을 불러 세웠지만.
지이잉!
무아의 경지에 접어든 칼은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데제스로부터 그녀의 모습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 결전은 시간 꼬맹이와 전투 전에 치르는 가벼운 전초전에 불과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힘의 차이를 깨닫지 못했느냐! 난 신의 경지에 다다른 드래곤이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낱 인간일 뿐이야!]
아직 완전히 모습을 화하지 못한 데제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로 반박했고, 칼은 날카롭게 그를 직시하며 답했다.
“네가 뒤지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네놈은 아직 절망을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 칼리언트 슈타크!]
스스스스.
끼에에에에엑!
완전히 현현한 데제스는 은백색의 꼬리와 날개, 그리고 드래곤 피어를 내뿜으며 칼을 위협했다.
저릿저릿!
그 모습을 목격한 칼의 전신은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싸라기눈처럼 매서운 폭주한 마력은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 마력의 폭풍 속에서도 릴리는 걱정의 눈으로 칼을 쳐다봤고, 칼은 이지적인 눈빛으로 데제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마나 기관 발동.”
그 한마디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마나로 결집 된 기관을 깨웠다.
치직!
체내에 정착된 서킷들은 제멋대로 엮이기 시작하더니…….
화악!
어느 순간 칼의 등에는 여섯 장의 붉은 날개 형체를 띤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 색은 희미했지만.
“나는 재액을 지우는 검, 또한 악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마왕일지니........”
칼 스스로 내뱉은 언령에 힘을 받아 강렬한 붉은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 * *
성역, 디바인.
대륙의 역사가 결정되는 이 전장 속에서 모두가 험난한 격전을 펼칠 때.
별빛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지닌 소년은 유유히 낚시를 즐기며 중얼거렸다.
“절대 안 변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 인생의 가치를 찾았나 보네. 벨리앗.”
“이게 다 당신 공로라고 자랑하고 싶으신 거죠?”
그 옆에서 같이 낚시를 하고 있는 도도한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드네.
바로 이 세계의 시간를 관장하고 있는 여신이었다.
“물론 내 공로지.”
여신을 앞에 둔 소년은 희희낙락 웃음꽃을 피웠다.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덜 떨어지고 근본도 모르는 잡신에게 협조를 하고 있는지, 저 자신에게 화가 나요.”
“우와! 지금 인격, 아니 신격을 모독했어. 사과해!”
“큰소리치지 마세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이 세계에 영향을 주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고요!”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녀의 말은 곧장 실현됐다.
소년의 한마디는 무수한 부상을 입은 씨보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
격분한 씨보그는 눈에 띄는 소년과 아리아드네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그들이 씨보그의 입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씨보그의 몸은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년이 발휘한 시간 정지의 권능 때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모습이 마음이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내가 관장하고 있는 세계에서 이 정도의 신위를 발휘할 수 있는 거지?’
탑을 제하고는 어떤 세계든 그 세계의 신이 아니라면 신위를 발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근본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시간의 신에게는 아예 그런 법칙이 통용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쯧 혀를 차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저 무시무시한 벨리앗이 정말 이 세계를 구원할 거라고 보시나요? 차이트?”
“물론. 아마 아리아드네, 너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그게 무슨 소리죠?”
의미심장한 말에 아리아드네가 눈매를 좁히는 순간.
쿠콰아아아앙!
성역, 디바인 중심 부근에서 거대한 붉은색의 기류가 용오름 치며 하늘까지 광대하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