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신전도시, 디바인.
이곳은 과연 어떤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칼은 아직 내지 못했다.
지금 그는 스스로 내딛는 길로 튀어나온 성기사단들을 베어 넘기며 냉철한 표정을 지었다.
도심 곳곳, 건물에서 석궁으로 칼을 표적 삼아 쏘아대는 무리들.
또한 정면에서 방패를 내세우며 막아서는 가디언들.
지금까지 라흐만 대륙의 공포로 불리는 기사단이었건만, 지금은 큰 낭패를 보고 있었다.
챙! 챙! 챙!
“으아아앗!”
“잡아!”
현재 그들이 적으로 삼은 것은 악마가 서식한다는 땅, 알테어를 정복한 기사단인 크림슨 게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티잉! 티잉!
혹시 모를 눈먼 볼트가 그들에게 꽂히려고 할 때면, 릴리가 생성한 결계가 볼트를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난잡한 전장.
그 속에서 칼은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없이 마도 유산 디바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벽면 너머에 새록새록 새겨져 있는 찬란한 드래곤 벽화.
곳곳에 이끼가 끼어, 조금씩 지워지는 문자들.
칼은 그것들을 신속하게 조합해 읽어 내리며 분석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세피로트로 인해 다양한 종족이 탄생했다. 녀석은 종의 기원을 찾기 위해 세피로트를 모방한 타라를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칼은 신전 곳곳에서 있는 부서진 알과 거대하면서도 가는 드래곤의 골격을 보며 혀를 찼다.
마치 동족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처럼 녀석은 알껍질에 이런 글귀를 새겨놓았다.
「오랜 세월, 마계의 문은 수호자란 사명을 지닌 드래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됐다.」
「그들이 일군 평화는 나에게 영원히 끝이 없는 지루함을 주었다.」
「따라서 나는 어리석은 동포들에게 일깨워줄 참이다. 그들이 스스로 일군 평화를 다시 부숨으로써…….」
글귀를 본 칼은 생각했다.
데제스는 미쳤다.
평화로운 시대에 너무 맞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타고나는 바람에 그 힘을 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에 절망했다.
경위는 모르지만 아마 동족과는 교류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그렇게 한참 고심에 빠질 때.
성기사단을 진압한 릴리와 크림슨 게일의 기사단들이 칼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데제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지? 가르쳐줘. 그가 사람이 아닌 건, 이미 델피나에게 들었어.”
릴리가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칼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녀석은 정신 나간 사춘기를 겪고 있어.”
* * *
섬광 같이 쏘아대는 볼트들이 크림슨 게일 기사단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카앙!
그 볼트의 궤도를 틀어낸 검은 연신 구부러지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지만.
카앙! 카앙!
그것은 곧 유려하게 볼트를 튕겨내며 화려한 불똥이 튀었다.
마틴 뵈제하워.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으로서 아직까지 대중에 그 이름이 전파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뒤쫓고 있는 디아나와 기사단의 눈은 경외로 물들어 있었다.
칼리언트 슈타크가 인정한 기사단 서열 2위.
사실상 새로 건국한 슈타크 왕국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한 무력을 갖춘 이가 바로 그였다.
촤아아아악!
쿠쾅!
“크아아아악!”
본인 스스로 구태여 그것을 증명할 생각 없지만.
지면에 발을 미끄러뜨리며 전신의 근력을 쥐어짠 횡베기는 아예 건물 안에 있는 적을 베어내는 수준을 넘어 건물 자체를 붕괴시켜버렸다.
“이러다가 우리가 먼저 데제스 그 자식의 수급을 취하겠는데?”
기사단 중 한 명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고고 있었다.
이 속도로 계속 질주한다면 중심부에 위치한 데제스 싱클레어에게 가장 먼저 도달하는 것은 마틴일 거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
쇄애애애액!
콰직! 콰직! 콰직!
“……어?”
질풍같이 쇄도하는 검격에 앞서 걸어가던 기사의 사지가 잘려나가기 전까지 말이다.
피 분수가 치솟는 광경에 디아나는 말을 잃었다.
끼에에에에엑!
쇄애애액!
얼핏 보이는 것은 거대한 그리폰 위에 올라탄 한 신형이 검을 빼 들고선 그녀의 목을 베려 한다는 것이다.
카앙!
불시의 기습이지만, 눈 깜짝할 새 상황을 파악한 마틴은 곧장 검격을 날려 적을 견제했다.
“…….”
아직까지 상황을 간파하지 못한 디아나는 동공을 떨고 있었다.
“정신 차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 알테어에서 흔하게 겪은 일이잖아.”
마틴의 차분한 어조에 디아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팔락!
눈앞에서는 새하얀 그리폰의 위에 올라탄 마르첼 발렌티노가 파도처럼 굽실거리는 검을 쥐고서 서 있었다.
짙은 흑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청년.
그 기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실로 어마어마한지라 크림슨 게일의 기사단원들도 한껏 주저하며 경계하고 나섰다.
오싹!
“에, 에클라 세트, 마르첼 발렌티노.”
그가 별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달은 디아나는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저 신수. 노빌레 레오네랑 동급으로 여겨지는 신수, 그라지아종 그리폰이야. 마틴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이 격차는 넘을 수는 없어.’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이곳에서 마르첼과 호각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은 마틴밖에 없었다.
허나 승패의 판가름은 이미 마르첼의 승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올라탄 그리폰 자우버는 질풍과도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마틴이 고군분투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날아다니는 상대를 어찌할 수 없었다.
“마틴. 여기서는 마법으로 대응을…….”
“소용없어. 너가 영창을 읊는 사이에 결과가 나버리니까.”
그 정도 계산은 상대 역시 이미 끝냈을 것이다. 마틴은 검을 고쳐 잡으며 마르첼을 노려봤다.
“……인상 더러운 놈이군.”
“더러운 건, 네놈 주군의 인상이지.”
희번득!
자신도 모르게 격분한 마틴은 검을 빼 들어 그에게 오러의 참격을 날렸고, 마르첼 역시 거의 동등한 속도로 검을 찔러 넣었다.
파아아아앙!
범인을 초월한 기사들의 눈으로도 쉽사리 식별할 수 없는 검속.
그 위험한 공격을 서로 주고받으며 합을 이루니, 고막이 찢겨나갈 것 같은 금속음이 사방으로 펴졌다.
화르르르륵!
거기에 더해 디아나가 파이어볼을 연신 날렸다.
파앙!
물론 그것이 어림없다는 듯, 자우버가 날갯짓으로 일으킨 회오리바람에 파이어볼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건 예상외군.”
마르첼은 조금 당혹스런 표정으로 디아나를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동료의 죽음에 크게 당황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녀가 쌍심지에 불을 켜며 기습한 것은 솔직히 예상은 하지 못했다.
빠직! 빠직!
디아나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불쾌한 이유에 대해 친히 늘어놓았다.
“감히 내 앞에서 칼리언트님을 모욕하다니? 그냥 넘어갈 거라고 본 건가요?”
“어지간히 존경해라.”
분노가 서린 그녀의 모습에 마틴은 쯧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고, 마르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건가? 도망가도 모자랄 판국이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이지. 우리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너 정도는 나 한 명으로 충분해.”
“자우버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할 텐데?”
“따라잡을 수 있어. 이 녀석이라면 말이야.”
마틴이 피식 웃는 순간.
화르르륵!
달그닥!
허공에 느닷없이 푸른 화염이 피어오르며 검은 발굽으로 지면을 내디딘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르!
쿠라빌은 눈앞에 있는 자우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투레질을 했다.
“펜텀 스티드와 혼혈종이라 나는 것도 가능하지. 내 생각에는 아마 그 녀석보다 더 빠를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파직!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에 크게 분노한 것일까?
마틴이 쿠라빌의 등에 올라타자…….
콰앙!
쇄애애애액!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디, 디아나님. 이건.”
기사단이 어리둥절해 할 때, 디아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명령을 내렸다.
“서로 등을 마주보고 전력으로 경계합니다. 지금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어, 엄청난 싸움이라니요?”
파앙!
질문이 끝난 순간, 쿠라빌과 자우버가 서로 부딪치며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 * *
저릿저릿!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속도에 마틴은 눈조차 제대로 뜨기 어려웠다.
다그닥!
신전 기둥 사이를 두고 자우버와 쿠라빌이 허공을 비행하고 있었고, 마르첼의 검이 마틴을 강하게 옥죄여왔다.
카카카카캉!
기세 좋게 파고든 마틴은 마르첼의 검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내며 한 획을 그려 넣었다.
키키키키키!
물론 이를 그대로 허용할 리 없던 마르첼이 손목에 힘을 줘 그 궤도를 가볍게 빗겨내며 기다란 불똥이 튀었다.
휘릭!
그와 동시에 자우버가 날개를 휘저으며 쿠라빌보다 한발 빨리 앞서나갔고, 마르첼은 그 틈을 타 소지하고 있던 단검 중 하나를 마틴의 이마에 투척했다.
주륵!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혔으나 마틴의 이마에는 상처가 조금 벌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검에 특화된 계열은 아니야. 이 녀석은 죽이는데, 특화돼 있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약간이지만 쿠라빌이 기동력 면에서 자우버보다 한 발 뒤처진 것도 한몫했다.
푸르르르.
그 점이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쿠라빌은 투레질을 하며 박차를 가했다.
끼에에에에에엑!
자우버는 이미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빠져 자신이 우월하다는 눈빛으로 쿠라빌을 쳐다보다가…….
화르르르륵!
곧 입가에 맺힌 브레스를 쏘아냈다.
“젠장!”
마틴이 검격으로 파훼를 시도해보았으나.
콰아아앙!
완전한 파훼는 불가능했는지, 직격당한 쿠라빌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고 마틴은 그대로 낙마해 땅에 몸을 뒹굴었다.
쇄애애애액!
파아아앗!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우버가 다시 한번 브레스를 뱉으려고 했다.
서걱!
콰아앙!
마틴은 어림없다는 듯 지면에 검격을 그려 넣어 흙먼지를 일으켰고, 단숨에 자우버의 시야를 흩뜨려 놓았다.
쿠구구구.
콰아앙!
자우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레스를 내뱉었다.
끼에에에엑!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아예 끝장을 내기 위해 그대로 흙먼지 속으로 돌입하려고 했지만, 마르첼이 재빨리 그의 고삐를 당겼다.
“서두르지 마.”
이것이 마틴이 판 함정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던 마르첼은 마틴의 기척을 쫓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연기 사이로 백은의 칼날이 자우버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카앙!
그걸 포착한 마르첼은 재빨리 자신의 검으로 그것을 튕겨내다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만?”
놀랍게도 마틴이 튕겨낸 것은 홀연히 날아온 마틴의 검 한 자루였다.
‘녀석은 어디?’
히이잉!
푸욱!
찰나의 순간, 바로 옆에 있던 검은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비집고 튀어나온 쿠라빌이 거대한 뿔로 자우버의 옆구리를 거세게 들이받았다.
“하찮은 게?!”
분노한 마르첼이 재빨리 쿠라빌의 목을 절단내려고 했으나…….
카앙!
마틴의 건틀렛이 그의 검격을 튕겨냈다. 마틴은 곧장 마르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