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웅성웅성.
“방금 뭐가 떨어진 거지?”
“어마어마하게 큰 게 떨어진 것 같은데?”
성역, 디바인을 수호하는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너진 신전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마도 유산이자, 성역인 디바인.
동시에 이곳에는 산크투아리움의 역사와 유물이 숨 쉬듯이 녹아들어 있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신전 중 하나가 허공에서 추락한 무언가로 인해 박살 났으니, 성기사들은 자연히 긴장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모락모락 나는 연기 사이로 어떤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
당황한 성기사 중 한 명이 검을 들이대려는 순간.
콰앙!
언제 모습을 드러낸 건지,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인 마르첼이 그의 검을 쳐내며 말했다.
“검을 거둬라. 네놈들의 눈에는 누가 보이는 거지?”
저벅저벅.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기 사이로는 오른쪽 얼굴에 피가 잔뜩 튄 데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 데제스님!”
그제야 자신이 큰 실책을 범한 것을 깨닫고는 성기사는 즉각 예를 갖췄다.
반면 데제스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이곳에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마르첼은 누구도 들리지 않게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데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쯤 되면 눈치 채지 않았나?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웠는지, 데제스는 마르첼에게마저 살의를 품고 말하고 있었다.
스릉!
보통이라면, 그의 기백에 짓눌려 뒷걸음질 치기 마련이지만.
마르첼은 검을 뽑아들어 데제스의 목젖을 겨누었다.
“일단 이성을 차리시지. 당신답지 않아.”
“네놈!!”
“당장 검을 거두지 못할까?!”
모두가 격노해 검을 뽑으려는 찰나, 데제스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한 뒤, 물었다.
“나다운 게 뭐지?”
“지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 남자. 달리 더 필요한 말이 있나?”
“…….”
그 말을 들은 직후, 데제스의 눈에서 살벌했던 기운이 사라졌다. 대신 차갑고 이지적인 푸른빛의 눈동자로 돌아
“지금부터 내가 이 자리에 오는 것에 어떤 의심도 하지 마라. 너희들은 이곳을 사수하는데, 주력한다.”
지이이잉!
그의 목소리를 들은 모든 기사단은 초점이 모호해지며 천천히 세뇌되어갔다.
세뇌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마르첼은 그 광경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데제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가하 연맹의 맹주가 이곳에 도달해 있다. 서둘러 적을 섬멸한다.”
“연맹의 맹주라면…… 그 녀석이군.”
머릿속으로 칼을 떠올린 마르첼은 데제스가 이렇게까지 흥분하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라흐만 대륙을 온통 들쑤신 거대한 전쟁.
그러나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을 종지부가 찍히는 곳이 침략해 들어온 산크투아리움의 내부라는 것이다.
산크투아리움의 실체적 주체인 데제스 싱클레어.
그런 산크투아리움과 맞닥뜨리기 위해 각종 국가가 연합한 로가하 연맹의 맹주, 칼리언트 슈타크.
파르테스 아카데미에서 줄곧 이어져 온 이들의 악연은 바로 이곳에서 결판이 난다.
그 사실을 데제스도 모를 리 없었다.
스릉.
데제스는 아공간에서 냉혈의 마검, 아르젠트 파우라를 꺼내든 뒤, 어깨에 걸쳤다.
치료 마법을 읊으니, 몸에 입은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고 상륙한 적을 향해 병사들을 포진했다.
“엄청나군.”
데제스의 말에 복종하며 산개하는 군사들을 보며 마르첼은 마음속 깊이 감탄했다. 이후 데제스는 또 한 명의 충신의 이름을 언급했다.
“……모리스.”
“부르셨습니까?”
호명하기 무섭게 그림자처럼 숨어있던 모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힘으로 칼리언트 슈타크를 쓰러뜨린다. 마르첼과 함께 나서도록.”
“데제스님께서는…….”
“나는 어떤 곳에서 그 남자를 맞이할 것이다. 그 남자와 마주쳐도 그냥 보내줘.”
“하지만 그건!”
데제스가 언급한 남자가 칼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리스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데제스는 인상 한 번 구기지 않았다.
“이건 신이 나에게 남긴 최후의 체스판이야. 왕과 왕끼리 결판을 내야 모든 게 끝나야 묘미가 있지 않겠어?”
“…….”
다시 활력을 찾은 그 미소에 마르첼과 모리스는 하려던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저벅저벅.
데제스는 부서진 신전에서 홀연히 남아있는 석상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녀석의 기고만장함을 눌러 줄 필요는 있겠어. 이쪽이 당한 것도 있으니, 되갚아줘야지.”
이내 데제스는 오만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으며 기도문을 읊었다.
[아아, 신이여! 당신의 위대함을 몰라보는 것들이 지상에 가득 몰려있나이다.
주제도 모르고 신에게 반역하는 어리석은 것들.
이교도의 행사에는 항상 일침을 날려야 하며…….
단 한 줌의 새싹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기준에 어긋난 것은 응당 처치해야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그 죽음조차 숭고한 희생입니다.
마땅히 저희는 하늘에서 큰 보상을 받을 것을 굳게 믿나이다.
그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없고, 죄의 깊이만큼 징벌이 저희를 가호하리라.]
“세크루스?!”
데제스가 읊는 기도문에 마르첼과 모리스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신성 마법, 세크루스.
사제 혹은 성기사의 영향력에 따라 상대에게 금제를 가할 수 있는 성역지정 마법.
그것을 교황급 신성력을 지닌 데제스가 사용하고 있으니, 그 효과가 어떻게 적용될지는 미지수였다.
우웅!
잠시 후, 데제스의 전시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줄기가 디바인 전체에 내비쳐졌다.
* * *
“와아아아아아!”
지상 최강의 기사단을 자처하는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과 크림슨 게일이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다.
둘 다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기사단인 만큼 그 실력은 호각일 것이라고 판단하나, 그 양상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씨보그를 처치한 마틴이 슈미트가 만든 명검, 리히트 베가를 들고 성기사단을 닥치는 대로 썰어 넘기고 있었다.
파앙! 파앙! 파앙! 파앙!
그 뒤를 이어 헤이젤이 허공 곳곳에 파공성을 터뜨리며 군세를 흩뜨려 놓고 있었다.
와아아앙!
콰아앙!
기사단이 밀집된 장소에서는 괴츠가 강철 의수에 서킷을 적극 활용하며 적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칼은 후방에서 기사단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칼의 부상을 살피던 디아나는 수심이 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리언트님. 이 상처는…… 저주가…….”
단순히 뼈가 부러진 것에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긋난 뼈를 강제로 틀어 맞추고 치유 마법을 퍼부어봤지만, 칼의 상처는 호전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스스스스.
칼의 팔을 옭아매고 있는 새하얀 끈 같은 마력이 칼의 상처를 들쑤시고 있었다.
“죽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마.”
스스스스.
무덤덤하게 말을 한 칼은 즉각 전면에서 덮쳐오는 불길한 기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아아아악!
새하얀 돔을 형성하고 있는 빛줄기, 그것은 이단심문관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역 지정 마법 ‘세크루스’였다.
찌릿!
“뭐, 뭐야?!”
아직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펼치기도 전임에도 결계술사인 릴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칼은 지그시 눈매를 좁혔다.
세크루스는 신성 마법의 주체인 시전자가 지정한 죄목에 해당되는 모든 대상에게 금제를 가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위력은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
하지만 그것을 교황, 아니 이미 인외를 넘어선 데제스가 썼으니, 그 효과는 상상도 채 되지 않았다.
“칼 피해야 돼! 결계로 못 막아!”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릴리가 다급한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파직!
화아아아아악!
물론 칼도 일찌감치 반격을 위해 성역 디바인 전역에 서킷이 깔아둔 상태였다.
“반격한다. 릴리, 아군에게 올 반동을 최대한 막아내.”
칼은 냉소하며 즉각 트리거를 발동했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힘과 힘이 충돌했다.
쿠구구구.
콰아아앙!
‘존재 자체가 이단인 자’에게 심판을 가하는 세크루스.
그리고 그런 세크루스의 기세를 깨뜨려는 칼의 서킷과 트리거가 서로 물고 늘어지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성역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울컥!”
“크아아아악!”
그 파장에 휘말린 성기사단과 크림슨 게일의 기사단이 격통에 토혈을 했다.
빠직! 빠직!
“크아아아아악!”
이 두 거대한 존재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이들은 소드 마스터 급 이상의 강자뿐이었다.
* * *
두 차례의 공격이 충돌하고 지나간 뒤, 산크투아리움의 기사단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데제스의 성역 지정 마법, 세크루스가 아군까지 범하는 사태까지 일어난 건 아니었다.
칼이 일으킨 서킷과 트리거의 연쇄작용으로 체내의 신성력이 산산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털썩!
반면, 산크투아리움의 기사단은 릴리의 결계 덕에 심신이 크게 지치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의식을 잃는 것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야, 괜찮냐?”
끼익! 끼익!
괴츠는 서킷이 부서진 의수의 손가락을 일일이 수동으로 접었다 피며 몸을 점검했다.
“죽었어. 나 죽었으니까 내 유지는 너가 이어줘.”
헤이젤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풀썩 쓰러지며 지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지랄하고 있네. 빨리 안 일어나! 딱 봐도 멀쩡하구먼!”
그게 꾀병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던 괴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 산만하니까 둘 다 닥쳐!”
마틴은 호흡을 갈무리하며 칼 쪽을 쳐다봤다.
저벅저벅.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오던 칼은 갑갑했던지, 망토와 건틀렛 등을 벗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적장인 데제스 싱클레어의 목을 벨 것이다. 일어서지 못 하는 녀석들은 빠지고 남은 녀석들만 쫓아와.”
충성을 바쳐오며 싸워온 기사단에게 다시 전장을 강요하는 게, 다소 잔인한 게 아닐까?
뒤에 있던 릴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모두를 지켜본 순간이었다.
꿈틀꿈틀.
빠지라는 말이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크림슨 게일 기사단 전체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다들 싫어하면서도 칼을 좋아한단 말이야.’
그것이 흔한 말로 남자들의 자존심인 건가 생각한 릴리는 피식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성역, 디바인은 신전 도시로 도심 곳곳에 성기사단이 적재적소 배치돼 있을 겁니다. 방금 전의 광역 마법의 여파로 군의 여력을 잃었지만, 그것도 적 역시 마찬가지. 전쟁의 최대 주적, 데제스 싱클레어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나눠 중심 부근에 다다라야 됩니다.”
“하지만 그건?!”
적도 아군도 병력은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수성을 하는 성기사단이 상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군세를 쪼개 각개 격파에 성공한다면, 이보다 효율적인 작전은 없었다.
하나, 로가하 연맹의 맹주인 칼의 신변에 어떤 위협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헤이젤이 이의를 제기하려 할 때였다.
“누굴 걱정하는 거지?”
칼의 차가운 어투에 곧 꼬리를 내렸다.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하냐?’
작전이 확정되자, 릴리는 곧장 세세한 명을 전달했다.
“남아있는 병력은 약 삼천, 여기서 삼 분할을 해서 마틴 경이 천을 통솔하고, 헤이젤 경이 천을 통솔합니다. 괴츠 경은 헤이젤 경과 같이 움직여 주세요.”
“명령을 받듭니다.”
세 기사는 즉각 예를 갖춰 명을 받들었다.
‘바그로바, 쿠라빌. 쫓아가라.’
칼은 영체화해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두 마리의 신수에게 명을 내렸고, 붉은 불빛은 헤이젤과 괴츠에게…….
검은 불빛은 마틴의 주변을 맴돌았다.
“쓸데없는 짓을…….”
마틴은 마음에 안 든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합을 내질렀다.
“돌격하라!”
“우와아아아아아!”
그 소리에 맞춰 기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디바인으로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