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로가하 연맹이 체결된 직후로부터.
무려 한 달이 넘게 흘렀고, 전황은 속속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 무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산크투아리움의 군세는 각 분쟁 지역에서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제 1주둔지에서 머물고 있던 어두운 낯빛으로 데제스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차기 교황임과 동시에 사실상 군권 역시 장악했기에 주변에 있던 수뇌부들도 적잖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쓸데없이 눈치를 보다가는 즉각 군법으로 사형을 당할 것이다.
데제스 싱클레어라는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자에게만큼은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고전을 겪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한 정보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끔찍하게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다.
꿀꺽!
따라서 현 상황을 알려야 하는 참모진의 어깨는 자연히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고인 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보고를 시작했다.
“……보, 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재 고전을 겪는 이유는 로가하 연맹의 움직임이 놀랍게 빠르기 때문입니다. 판도가 뒤흔들리게 된 계기는 바로 이곳.”
그는 지도에 표기된 리잔티 왕국의 수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성지탈환을 진행 중이던 드웨인 경이 연맹군에게 패한 게 컸습니다. 이곳의 지형적인 가치는 군사들의 이동 경로 중 딱 중간이었다는 것이 컸습니다. 본래는 미리 앞질러 가서 성지 탈환을 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최단 시간으로 식량을 보급할 보급로로 확충할 계획이었지만. 연맹 쪽에서 선수를 쳐서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콰앙!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황도12궁의 기사 중 한 명인 헤르손이 입을 열었다.
“그곳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 지휘관인 드웨인에게 마도 유산을 맡긴 거 아니오! 한데, 겨우 나흘 만에 그 요충지를 강탈당하다니! 지금까지 뭣들 한 겁니까!”
그의 분개에 많은 지휘관들이 공감했다.
드웨인의 손에 쥐어진 마도 유산은 일당백, 아니 일당천을 상대할 정도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기를 쥐여줬음에도 패했다는 것은 납득 할 수 없는 결과였다.
“드웨인 경의 목을 직접 벤 키이라 슈타크의 방해가 컸습니다. 또한 즉각 대응하기 위해 수만의 군대를 보냈지만,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인 마도 왕국의 공주, 델피나의 기만전술에 크게 당했습니다. 그녀는 인비저블 마법으로 헬가하스에 있던 로가하 연맹군을 전부 숨겨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던 병사들은 무심코 적들이 이 요충지를 버리고 갔다고 판단했다가 적들의 손에…….”
참담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에 참모진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다이만테 해상전에는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인 베르데의 활약으로 배가 망가져 수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데제스는 이제야 접한 사실이었지만, 베르데의 전략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꼭 다물었던 입을 열며 그 상황에 대해 늘어놓았다.
“육상전과는 달리 해상전은 지휘관의 역량이 현격히 드러나지. 잘못된 해류를 만나면 배가 크게 손상되기도 하니까. 베르데는 일발필중의 궁신이자 무류의 화신이라고 불렸던 남자. 지휘관을 저격해 해상전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지.”
“마, 맞습니다.”
참모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데제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전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읊어보았다.
“하지만 베르데만의 활약으로 보기는 어려워. 분명 해상전에서 최강인 이실리아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클리브스의 도움이 있었겠지. 그리고 브리핏 대전에서는 황도 12궁 기사들이 무려 다섯 이상 투입됐어도 에릭 듀란츠 때문에 점령지에 발도 못 붙이고 있지. 그의 날개가 되어준 것은 샤텐의 기갑병들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모두 깨닫고 만 것이다.
여기서 데제스는 그 누구보다 전황을 유력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 이상으로 연맹의 결속이 강하군.”
“성지 탈환을 위해 노력을…….”
당황한 참모진이 고개를 조아리며 의지를 내비쳤지만.
데제스는 손을 턱으로 집으며 깊은 고심에 잠겨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연맹의 맹주는 어디 있지?”
“네? 그, 그야 본진에…….”
“확실한 정보인가?”
“그, 그것은…….”
데제스가 눈매를 좁히며 묻자, 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것은 결국 정보전이다.
상대의 위치와 전략, 그리고 군세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을 해야 승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적의 수장, 로가하 연맹의 맹주 칼리언트 슈타크는 아직까지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지 않고, 에클라 세트와 슈타크 가문의 기사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데제스는 그 점이 크게 신경 쓰였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상대를 잘 알았다.
칼리언트 슈타크는 절대 정적일 수 없는 사나이다.
만약 그가 조용하다면 그것은 태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녀석의 의도. 녀석의 의도.’
따라서 데제스는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칼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칼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의표를 찌를 것인가?
고심하고 있더 도중 참모진 중 한 명이 한마디를 건넸다.
“방금 접한 정보입니다만, 이실리아의 함대가 저희 군의 함대를 격침한 다음, 수상한 배 한 척이 레이가 항로를 지났다고 합니다.”
“……?!”
그 순간 처음으로 데제스의 표정이 크게 무너졌다.
* * *
우우웅!
강철로 제작된 의수에 서킷이 활성화되며 괴츠의 의지에 따라 검지, 중지, 약지가 순서대로 움직여주었다.
“이 서킷이란 기술 연비만 조금 더 개선되면, 진짜 좋은 기술이네.”
갑판 위에서 갑주를 갖춰 입은 괴츠가 본격적인 전투를 임하기 전에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이젤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소질 없다고 겁나 맞으면서 울었던 건 기억하냐?”
“닥쳐!”
그의 말에 괴츠는 얼굴의 붉으락푸르락 변해 괴성을 내질렀다.
의수에 서킷을 심어준 사람은 칼이었지만. 결국 운용을 하는 것은 괴츠의 몫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괴츠는 오러나 마나 등은 감으로 사용할 뿐이지.
원리를 간파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서킷 같은 숙련도가 높은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무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칼의 해결책은 무척이나 간단명료했다. 될 때까지 폭언, 욕설, 폭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것이었다.
괴츠는 그때 겪었던 악몽 같은 추억을 되짚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것 때문에 돌대가리, 닥쳐, 꺼져, 죽고 싶냐며 얼마나 호되게 질타받았는데.”
“눈물까지 핑 돌았잖아.”
“안 울었다고. 자식아! 그만 깐족거려!”
사실 눈물까지 돌기는 했지만, 쪽팔리기도 하니 괴츠는 끝끝내 우기기로 했다. 때마침 분주하게 움직이다 그 모습을 본 릴리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칼이 그렇게까지 짓궂진 않아요.”
“…….”
“…….”
순간 두 남자는 동시에 분노에 찬 눈으로 릴리를 쳐다봤다.
“왜, 왜 그래요?”
당황한 릴리에게 헤이젤은 말했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사령관님이 유일하게 애틋하게 대해주는 게 참모님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당연히 저희랑 다르죠.”
“아이참 아니라니까요.”
왠지 모르게 창피해진 릴리는 어설프게나마 그 말을 부정할 때.
“마틴도 추가.”
괴츠는 뒤늦게 마틴의 이름을 언급했다.
“위치가 다르잖아. 세기도 더럽게 세고.”
헤이젤은 질투가 가득한 표정으로 괴츠의 말에 수긍했다.
기사단 서열 2위, 마틴. 그는 칼이 친애하는 최강의 검이기도 했다.
“단순하게 너희들이 맞을 짓을 많이 해서 그렇지.”
그때 등에 망토를 두른 마틴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의 손에는 상당히 묵직한 헤비랜스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가지고 나온 거냐?”
헤이젤이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마틴은 랜스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시선이 느껴져. 금방 덮쳐올 거야.”
“결계에 잡히는 것은 아직도 없는데요?”
당황한 릴리가 배 주변에 구축된 결계로 탐색을 시도했지만, 감지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투명 결계를 쳐서 탐색 되지 않을 텐데.’
그러나 기감을 극대화한 마틴에게는 무언가 다른 것이 포착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
그 한마디에 산만했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레이가 항로를 거쳐 마침내 배가 도달한 곳은 한 섬이었다.
섬의 이름은 디바인.
바로 신성 국가 산크투아리움에서 수호하고 있는 마도 유산이었다.
데제스 스스로가 성지로 삼은 곳인 만큼 경계 또한 삼엄했는데, 해역 곳곳을 상당한 수의 함선들이 지키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릴리가 쳐둔 결계 때문에 배를 식별하지 못하고 유유히 통과시켜주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 전쟁 중에 로가하 연맹에서 가장 중요한 칼과 그의 기사단이 이곳에 있을까?
그건 칼이 회의에 내뱉은 말로 때문이었다.
-전쟁은 여러 상관관계가 얽혀있지만, 산크투아리움만큼은 의도가 너무 뻔해서 읽기 쉽지 않아?
처음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연맹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했다.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재개했다.
-모든 것은 데제스 싱클레어의 의지로 정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그 녀석의 생각만 간파하면 의도는 아주 쉽지.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릴리의 말에 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침략을 당하기만 하면 곤란하지. 우리도 침략해보자고. 분명 이곳을 찌르면 녀석은 절대 가만있지 못해.
지도에 표기된 곳은 당연 마도유산, 디바인이었다.
“……하하”
그때의 일을 상기한 릴리는 곤란한 낯빛을 내비쳤다.
설마 연맹의 맹주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적의 심장부를 와서 찌를 생각을 하다니…….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는 사태의 주역이 자신이 되니, 릴리는 무척이나 기분이 낯설고 신기했다.
꿈틀!
하지만 방심하는 것도 잠시.
릴리는 곧장 결계를 건드리며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조심해요. 뭔가가 결계를 뚫고 왔어요.”
“위, 위치는 어디입니까?”
헤이젤의 질문에 릴리는 심각하게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심해입니다.”
콰아아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산크투아리움의 함선이 심해에서부터 치솟은 거대한 물기둥에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가, 갑자기 씨보그가 왜 날뛰는 거야?!”
당황한 산크투아리움의 병사들은 기울어지기 직전의 배의 기둥을 붙들며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끼에에에에엑!
거대한 물살을 가르며 튀어나온 것은 일각수의 거대한 고래로…….
그것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명백하게 결계를 두르고 있는 칼의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계 해제해!”
콰아앙!
더이상 감춰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마틴은 곧장 배를 박찬 뒤, 헤비랜스로 씨보그라고 불리는 몬스터의 옆구리에 일침을 가했다.
콰아앙!
쏴아아아!
오러의 파장이 가득 실린 그 일격에 씨보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거대한 물살을 일으켰다.
마틴은 부서진 함선들에 발을 내디디며 즉각 씨보그와 교전을 치렀다.
범인이라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익사할 테지만.
에클라 세트라는 명성이 허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건지, 마틴은 놀랍게도 호각 이상의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저, 저건 뭐야?!”
“마틴. 저거 완전 정신 나갔네.”
괴츠와 헤이젤이 경악했다.
“성역, 디바인을 지키고 있는 수호 몬스터야. 일전에 알테어를 지배하고 있던 암피스 바에나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면 돼. 물론 그것보다는 약하지만.”
저벅저벅.
칼이 팔짱을 끼며 마틴과 씨보그의 교전을 관망했다.
“괘, 괜찮아?! 도와주지 않아도 이러다가 마틴 경이 당할 거야.”
릴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릴 때, 칼은 두 자루의 검 중 하나인 마검 인페르노를 빼 들며 말했다.
“난 이 뒤에 오는 것을 경계해야지.”
눈앞에 있는 씨보그는 적조차 아니라는 건지, 칼의 초점은 좀 더 멀리 있는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 * *
마틴과 씨보그가 격전을 치를 때.
두둑.
데제스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산크투아리움에 세워진 마도 유산 중 하나인 디바인을 지키기 위해 수호 몬스터인 씨보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씨보그의 주인인 데제스는 씨보그와 정신적 교류를 통해 이 사실을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침략을 당할 바에야 침략을 하시겠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칼리언트.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데, 데제스님!”
데제스의 기묘한 변화를 눈치 챈 모두가 눈치를 보기 시작할 때.
파아아아앗!
데제스의 전신이 발광하며 곧 거대하면서 위엄있는 드래곤으로 변했다.
“히익!”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수뇌부들이 경악할 때.
“유희는 끝이다.”
화르르르륵!
데제스는 입에 푸른 브레스를 토해냈고 화염을 몸에 두른 인간들은 비명을 지를 틈새도 없이 녹아내렸고, 요새는 초토화됐다.
콰아아앙!
이윽고 데제스는 곧장 성역, 디바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