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날이 밝고 다시 로가하 연맹의 회의에 모두가 소집됐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들은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국가에 피해를 덜 보는 방법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해보였다.
하지만.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회의에 참가한 모든 이는 현재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가장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무언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검은 뼈가 훤히 드러난 채, 고통에 힘겨워하다 부식된 인간의 시체였다.
“이, 이건 뭡니까?”
수뇌부 사이에서는 자연히 동요가 흘러나왔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 칼에게 질문을 건넸다.
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을 해주었다.
“리잔티 왕국에 잠입한 부하가 보낸 주검이다. 마도 유산을 한 번 사용한 것으로 이런 시체가 하루에 수백구나 나오고 있지. 보고 느낀 점 있나?”
웅성웅성.
칼의 한마디에 로가하 연맹의 일원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이런 짓도 죄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다는 건가?”
“그 녀석들은 이미 성국이라는 국가 의의 자체가 뒤틀렸어. 녀석들은 악마야.”
그들의 입에서는 이런 학살을 벌인 산크투아리움에 대한 욕설과 비난이 흘러나왔다. 그걸 가만히 듣던 칼은 조용하게 한마디를 흘려보냈다.
“이건 너희들이 멍청한 짓으로 하루를 보낸 대가다. 아직까지 손익을 계산하고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언행의 무게는 가히 무거웠다.
적의 무자비함에 내부의 이권 다툼은 무의미한 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칼의 말대로 신속하게 결단하고 움직였더라면 이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새 생각한 너희들의 계획은 집어치워. 이길 수 있는 전략 따위 나올 수 없으니까.”
“그, 그건?!”
그렇다면 어째서 하루의 여지를 주었단 말인가? 그런 불만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 칼이 입을 열었다.
“난 수세만 펼칠 생각 없어. 난…….”
칼은 밤새 생각한 치밀한 전략을 말했고, 그의 말에 한순간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특히 칼의 가신인 괴츠, 헤이젤, 마틴은 크게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듣다 못한 이실리아의 클리브스 제독이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불가능하오! 이 노장은 맹주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숱하게 사선을 넘어왔소. 그건 신의 도움 없이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잠잠히 지켜보고 있던 에릭 듀란츠는 클리브스 제독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모두가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였지만.
칼은 오만한 표정으로 클리브스 제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숱하게 사선을 넘었다고? 나의 기사단, 크림슨 게일은 악마들이 거닐었다고 하는 땅, 알테어를 정복했다. 그런 나에게 경험으로 조언을 할 생각인가? 클리브스.”
왈칵!
칼의 대꾸에 클리브스는 얼굴만 찌푸릴 뿐.
어떤 대답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자신이 평생 바쳐온 전장과 죽음의 사선, 알테어를 비교한다면,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의 뒤에 있는 가신들을 쳐다보니, 저마다 이 상황이 어색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기개를 살펴보니 모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자들은 산크투아리움의 황궁 12기사단과 견줄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물론 무력 뿐만이 아니라 지휘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꿀꺽!
그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살펴본 클리브스는 칼의 역량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칼이 로가하 연맹의 맹주로 선포된 것은 스스로의 힘을 입증한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칼은 다시 한번 손을 모으며 입을 뗐다.
“작전은 신속하고 은밀하게 펼쳐야겠지. 이번 전쟁의 승리를 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두 가지. 하나는 에클라 세트의 활약.”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에 회의에 참가한 에릭, 베르데, 델피나, 마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두 번째는 너희들이다.”
이후 칼이 쳐다본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형제.
바로 슈타크 일가였다.
“…….”
자신들이 호명되자, 이들의 대표 격인 라마스와 키이라가 슬그머니 눈매를 좁혔다.
칼은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그런 핏줄이잖아.”
이것은 단순히 가족을 지지하는 발언이 아니었다.
그저 근본을 언급하는 것뿐이다.
혈연에서부터 내재 돼 있는 슈타크가의 전투본능.
누군가는 그것을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죽고 죽이며 경쟁해오고, 승리를 갈증하게 되는 영원한 저주의속박 같은 운명이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왕족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니 왕족까지 됐으니, 그 피의 갈증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꿀꺽!
‘쉽게 될까?’
하지만 이 와중에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인 관점에서 칼리언트 슈타크는 모든 것을 인정받고 손에 넣었다.
지위도 무력도 역량도 명예도 그리고 뛰어난 부하까지…….
애석하지만 누가 봐도 라마스와 키이라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정도로 칼의 존재는 우뚝 솟은 산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혈족들끼리 동족상잔을 해온 슈타크가 형제들의 특성상 당연 이 상황이 달갑지 않고 질투를 느낄 것은 너무나 뻔했다.
뚜벅뚜벅.
그렇게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칼이 라마스와 키이라 사이에 발을 우뚝 멈추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안심해. 난 왕의 자리에는 욕심이 없으니까. 너희 둘 중에 한 명이 쟁취해도 난 관여 안 할 거야.”
“?!”
“?!”
예상치 못한 칼의 말에 라마스와 키이라는 눈을 부릅떴다.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가운데, 계승자로서 가장 유력한 위치에 놓인 칼이 스스로 왕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난 반드시 만나야 될 녀석이 있거든.”
지금의 위기는 단지 지나야 하는 관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차이트와 재대결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욕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물론 이런 칼의 생각을 알 리 없던 라마스와 키이라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휘익!
그 한마디를 끝으로 칼은 등을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어물쩍 거리는 것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전세를 역전하는데, 전념하도록.”
그 강력한 기백과 통솔에 로가하 연맹은 진정한 결속을 이루었다.
* * *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한 산크투아리움의 진군은 라흐만 대륙을 들쑤셨다.
전후좌우.
그들은 침략이 가능한 모든 경로를 이용해 침공을 개시했고, 단 한 달도 안 돼서 네 개의 국가가 파멸에 이르렀다.
리잔티 왕국 수도, 헬가하스.
화르르륵!
이곳 역시 산크투아리움의 군에 의해 철저히 짓밟혀 도시 전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수도를 방위하던 총사령관, 1왕자, 클레하드는 기겁하며 그들이 벌이고 있는 짓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부글부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진흙 속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생물들이 날리는 진흙에 맞은 시민들은 몸이 부식되었다.
“끄아아악!”
진흙을 잔뜩 뒤집어쓴 노인은 경악하며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피부를 보며 절규했다.
“히익! 어, 엄마!”
“닉!”
검은 늪에 빠진 아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직접 수렁으로 들어오는 여인.
검은 진흙 속에서 있던 기괴한 생물들은 즉각 여인과 아이들의 몸을 붙잡으며 끌어내리고 있었다.
히죽!
산크투아리움의 군인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자, 이단심문관을 겸하고 있는 드웨인은 무척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 의문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단검이자, 마도 유산인 ‘데스 슬링거’가 들려 있었다.
빠득!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클레하드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만 둬! 아녀자와 어린아이들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이건 대륙을 정화하는 행위입니다. 크크크크.”
치이이익!
“꺄아아아악!”
드웨인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검은 진흙의 늪에서 몸이 서서히 끓어가는 여인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는 천천히 죽어가는 것에 대한 희열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그늘에서 이걸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말했다.
“좋네. 이 구도. 그럼 우리는 대륙을 오염시키는 악이겠네.”
“지금 무슨 궤변을…….”
드웨인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쇄액!
질풍처럼 쏟아진 붉은 일섬이 데스 슬링거를 들고 있는 드웨인의 팔을 절단내버렸다.
쏴아아아아!
드웨인은 잘린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피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끄아아아악!”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누, 누구냐!?”
당황한 산크투아리움의 병사들은 그의 팔을 베어낸 키이라에게 일제히 창을 겨누었지만.
탁.
키이라는 허공에 빙그르르 떨어지는 데스 슬링거를 손으로 집으며 입을 뗐다.
“이렇게 쓰는 건가?”
데스 슬링거를 집은 손아귀에 힘을 쥐자…….
-키에에에엑!
파앗! 파앗! 파앗!
검은 늪 속에 잠들어 있던 진흙들이 일제히 산크투아리움의 군세에게 쏟아졌다.
“끄아아아악!”
“막아! 막으라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검은 진흙의 공격에 산크투아리움의 병사들이 점차 부식되기 시작했다.
“너, 너는 대체…….”
놀랄 만치 빠르게 마도 유산의 사용법을 터득하는 키이라 모습에 드웨인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만한 강자가 소리소문도 없이 이곳으로 들어온 거지?’
그는 한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병사들을 주둔시켜 도시 자체를 외부와 단절되도록 봉쇄한 다음, 도시 안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한데, 키이라는 어떻게 그 봉쇄를 뚫고 들어온 것일까?
“궁금한가 보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피식.
키이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눈빛에 흉흉한 붉은 빛을 품어내던 그녀는 그 답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에 침투한 방법은 간단해. 루콘 최강의 무가이자 왕가의 혈통들이 작정하고 쳐들어왔으니까.”
“슈, 슈타크?! 설마 네년이 미카엘라를 벤 키이라 슈타크!”
그녀의 정체를 언급하기 무섭게 도시 곳곳에서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슈타크가의 혈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쇄액! 쇄액! 쇄액!
파아아앗!
일반 기사단과는 격이 다른 솜씨를 지닌 그들은 산크투아리움의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나가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이 괴물들!”
도시 자체를 묶어두기 위해 펼쳐진 봉쇄진을 펼쳤던 병사들이 일제히 겁을 집어먹고 중심부 쪽으로 대피하는 것도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와, 왕가의 혈통들이 몸소 이곳에 당도했단 말인가?”
드웨인은 스스로 언급한 사실에 경악을 토했다.
키이라는 아리따운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직접 검으로 베고 찢으며 슈타크는 스스로 존재를 자각해. 그렇기에, 우리는 피에 미치고 혈육마저 집어삼키지.”
그것은 드웨인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가문에 대한 생각을 읊조리고 있었다.
“생각해봐. 그렇게 강한 혈통을 지녔음에도 정점에 군림할 수 없었어. 부정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저주의 굴레에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야.”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스릉!
키이라는 검신에 붉은 오러를 발산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슈타크 내에서 가장 강력한 계승자가 탄생했어. 그것으로 우리는 저주의 굴레를 깨뜨리고 결속할 수 있게 된 거야.”
서걱!
그 말과 동시에 드웨인의 목에 한 줄기의 빗금이 그려지며 그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