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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77화 (177/197)

제177화

로가하 연맹이 체결한 직후.

칼은 즉각 군사회의를 진행했다.

성지탈환을 위해 산크투아리움의 군사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건 다들 오랜만이군.”

칼은 에릭과 베르데, 델피나의 얼굴을 한 번씩 살펴보며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델피나의 대답을 시작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끄덕.

에릭과 베르데도 딱딱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막역하게 지내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공사를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시작하지.”

크게 내색하지 않고 회의를 주도하는 그 모습에 델피나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저게 저놈답기는 하지.’

베르데와 에릭은 익숙한 듯 회의에 집중했다.

* * *

사락!

산크투아리움의 성서라고 일컬어지는 언약의 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거신의 유해를 찢고 그 허물로 땅과 하늘을 만들었으니…… 모든 것의 탄생은 거신의 육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불안정하게 일군 하늘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았고 땅에서는 망령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조물주, 레아브라함은 번영과 균형을 불러올 나무를 심으셨다.

-나무의 이름은 세피로트. 세피로트는 새로운 종족을 낳고 번영했다.

(중략)

-중간계의 종족들에게서 신에 대한 불신이 트고 천계와 마계의 존재를 섬겼다.

-이에 크게 노한 신은 칠일 간 큰불을 일으키셨고, 중간계에서 세피로트는 소실됐고 중간계의 종족은 스스로 교배를 통해 개체를 유지했다.

(중략)

-한 지대에 격동을 일으킨 거대한 드래곤으로 인해 모든 것이 황폐해지고 불모지가 되었다.

-라일, 케모일, 락크트리움의 계보 끝에 대신관 싱클레어는 드래곤을 퇴치하고 번영을 일으킬 국가를 세웠다. 국가의 이름은 산크투아리움이었다.

첫날, 회의를 끝마친 칼은 집무실에서 산크투아리움의 언약의 궤를 빠른 속도로 읽고 있었다.

“첫날 회의, 만만치 않았죠?”

그 곁에서 같이 언약의 궤를 살피던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가하 연맹은 이제 막 물꼬를 틀기는 했지만.

칼의 강력한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로를 믿지 못해 단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회의 내내 서로 국가 간의 불신이 팽배하고, 손해를 떠안기 싫어한다는 거였다.

연맹체결 조건에서는 전장이 된 국가에서는 전쟁 후 각국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원상복구를 하겠다는 조약을 했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에 급급했다.

정작 국가의 수장들이 연맹을 체결했어도 그 뒤를 책임지는 것은 수뇌부가 할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복잡한 사정으로 연신 말다툼이 오고 가자, 칼은 매서운 눈초리로 모두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닥치고 내일까지 방법 강구해와.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놈은 군법으로 다뤄주지.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참모였던 릴리는 이마를 손에 얹으며 깊은 탄식을 했고.

각 국가의 수뇌부들은 칼의 기세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연맹의 맹주인 칼도 이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는지, 전쟁의 주체인 데제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어요.”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데제스푸아르의 정체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건데, 짐작 가는 거 있으신가요?”

“대강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언약의 궤를 덮은 칼은 팔짱을 끼며 델피나를 쳐다봤고, 그녀는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계보에 장난을 친 것 같아요. 디오만, 에레나, 세라핌, 에드거, 셀리나. 이 이름들의 앞글자 스펠링을 모아보면, 데제스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계보는 애초에 없었고 자신이 신성한 가문의 핏줄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적은 게 아닐까요?”

스스로 언급하면서도 델피나는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추측대로라면 데제스 싱클레어란 남자는 족히 수천 년을 살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무맹랑한 추측이지.”

“으윽! 그렇게 대놓고 핀잔을 주면 어떻게 해요? 하여간 기사가 됐어도 숙녀에 대한 예절은 눈곱만치도 없어요.”

델피나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칼을 노려봤다.

바로 그때, 칼이 진지하게 눈매를 좁혔다.

“……녀석은 아마 인간이 아닐거야.”

“인간이 아니라니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는지 델피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칼은 그렇게 생각한 추측들을 늘어놓았다.

“녀석은 나한테 종종 언급했었어. 자기한테는 세계를 장악할 명분이나 개연성을 손에 넣기 위해 파르테스에 입학한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얼굴은 잘생겼고, 모든 과목에서는 수석을 차지하고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지지해주는 모습이?”

“…….”

“뭐야? 그 표정은? 왜 나를 쳐다보는 건데?”

델피나가 노골적으로 ‘재수 없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선배는 음악이랑 예술, 그리고 동물 다루는 건 진짜 형편없기는 했었죠.”

“시비 거는 거냐?”

갑작스런 델피나의 발언에 칼은 이마에 드러난 핏줄을 다시 꼭꼭 누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녀석은 파르테스에서 늘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있어. 그것 때문에 메노스 템벨이랑 몇 번인가 다투기도 했었지.”

“타라(TARA).”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델피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칼이 언급한 부분과 언약의 궤를 조목조목 따져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타라랑 세피로트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세피로트는 이 세상에서 불타서 소실됐다고…….”

“상상력을 조금 보태볼까? 지고지순한 존재가 세피로트를 복원시키려다 실패한 결과물이 타라라고 하면 그림이 제법 재밌지 않아?”

“?!”

칼의 말에 델피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문득 떠올리고 만 것이다.

호기심이 많고 지적인 생물, 마법에 정통하며 인간을 능히 흉내 낼 수 있는 지고지순한 존재를…….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려낸 형상은 피막의 날개와 단단한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말도 안 돼.”

칼이 말하고 싶은 것을 깨달은 델피나는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스윽.

칼은 검지로 정확히 ‘드래곤’이라는 글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을 낳은 나무, 세피로트. 종의 기원이기도 하지. 그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일까?”

“지금은 성지라고 우겨서 점령하고 있는 곳.”

물론, 그곳은 바로 마도 유산이었다.

억지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했던 짝이 조금씩 맞춰지자, 델피나는 칼의 가설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라흐만 대륙에 있는 마도유산을 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똑똑한 부하들을 만들어 전 세계에 풀어놓으면 그만이다.

이 또한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혼자서 찾는 것보다 시간은 훨씬 단축될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델피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제아무리 세상이 인정하는 에클라 세트라고 해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것이다.

“……선배. 이길 수 없어요.”

대놓고 포기하자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지만.

표정은 그녀의 생각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칼의 태도 또한 강건했다.

“이기지 못하면 포기해야 하는 건가? 녀석이 하는 만행을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건가?”

데제스 싱클레어.

그는 수많은 군사를 동원해 대륙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었다.

저항하는 자도 굴복하는 자도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죽였다.

애초에 쉽사리 체결될 수 없는 로가하 연맹이 체결된 것 또한 데제스의 잔혹한 행동 때문이었다.

“……선배는 줄곧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셨죠?”

“이미 기사야.”

델피나는 파르르 손을 떨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도 문학에서 용을 쓰러뜨린 기사 이야기도 다 산크투아리움의 언약의 궤에서 따온 이야기에 불과해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 용을 쓰러뜨린 싱클레어 가문의 사람이 산크투아리움의 교황이 됐다. 이건 그 영악한 인간, 아니 드래곤이 짜고 친 놀이판에 불과하다는 거잖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농락당해왔던 거라고요!!”

“…….”

정론에 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거짓도 전설도 아니야.”

“……선배.”

델피나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칼을 쳐다보자, 칼은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지금부터 완성될 이야기야.”

어째서? 어째서 이 남자는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갖추고 있는 거지?

델피나가 조금 혼란스런 표정을 짓자, 칼은 서슴없이 말했다.

“녀석한테 이건 한낱 유희가 아니야.”

“그, 그럼요?”

“일생을 걸고 벌이는 아주 격렬한 유희지.”

“말장난하자는 거 아니죠?”

샐쭉한 표정을 짓는 델피나에게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데제스가 드래곤으로 변해서 대륙을 휩쓰는 건 그 녀석 스스로 긍지를 포기할 때야. 인정하기 싫지만, 그 녀석도 나도 자존심은 엄청 세서 말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걸.”

잇몸을 드러내며 한 칼의 답변이 델피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해할 수 없어요. 선배는 공포란 감정이 결여된 건가요?”

“있어. 무서운 것쯤은.”

“…….”

스스럼없이 내뱉는 한마디.

그 한마디에 델피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뭔데요?”

“지키고 싶은 게 부서질 때야.”

“…….”

묘한 한마디에 델피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칼을 쳐다봤다.

우연의 일치인지, 칼 역시 델피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 선배 전쟁 통에 이러시면…… 아, 안 되는데요.”

그 강렬한 눈빛에 델피나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으나.

뚜벅뚜벅.

칼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지금 이야기는 아직 공표하지 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니까.”

냉담하게 걷는 그 모습에…….

“아, 그럼요. 그래야죠.”

빠직!

델피나는 아주 잠깐 헬파이어 마법 영창을 읊조릴까 고민했다.

* * *

침소에 드나드는 길.

칼은 발을 멈춘 뒤, 자신의 방문 앞에 기웃거리고 있는 릴리를 쳐다보았다.

이미 모두가 잠들 정도로 고요한 시간이건만.

그녀는 옷깃을 세우며 기사단 제복을 걸친 채, 칼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자고 뭐해?”

“왜 나는 언약의 궤 연구에 참여시켜주지 않는 거야? 마법에 대한 소양은 몰라도 지식 면에서는 나도 델피나 못지않게 쌓아왔다고.”

“고급인력을 낭비하고는 싶지 않아.”

칼은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름 자신을 인정해주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데제스의 정체. 알아낸 거지?”

“감은 잡았다고 하자.”

릴리는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분명 기밀이라는 것은 짐작했으나, 그렇다 해도 섭섭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나한테도 가르쳐주기 어려운 거야?”

“어렵지 않아. 시기가 안 맞는 거고. 그러니까 이제 좀 비켜주시지.”

툭.

칼이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툭 치고 릴리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성가시다는 표정 짓지 마.”

“아마 넌 평생 동안 성가실걸. 그러니까 부서지지 마라.”

릴리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은 칼은 잠시 쓰다듬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부서지지 말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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