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칼을 본 리제타 전 공작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고작 며칠.
고작 며칠 만에 왕조가 뒤바뀌고 그의 권력이 실추됐다.
반면, 공작가 능멸이라는 죄목으로 구금돼 있던 칼의 죄는 말끔히 사라졌다.
왕위 서열 12위, 칼리언트 슈타크.
몬스터들이 들끓는 땅, 알테어를 점령한 최초의 기사.
신분은 물론 백성들의 신망까지 이제는 모든 것이 칼이 우위에 서게 됐다.
“이, 이게 어찌.”
털썩!
믿기지 않는 사실에 리제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그림은 압도적인 힘 앞에 산크투아리움에게 모두가 무릎을 꿇는 광경이었다.
빠득!
분통이 터진 리제타는 핏발이 선 눈으로 칼을 쳐다봤다.
“처음부터 네놈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네 아들 실수를 나한테 뒤집어쓰지 마.”
칼은 가까스로 인내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리제타를 노려봤다.
오들오들.
감옥 전체를 떨게 만드는 그 압도적인 기운에 리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성은 부정하고 있지만, 인정하고 만 것이다.
이 남자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가는 죽는다.
“……내기는 자네가 이겼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말해. 데제스에 대해서……”
“……그건가?”
애초에 칼이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리제타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데제스 싱클레어. 그 이름은 수천 년 전에 이미 언급됐던 이름이지. 산크투아리움의 언약의 궤에 발췌…….”
부연 설명을 덧붙이려고 할 때.
콰직!
무언가 짜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리제타가 입에서 한 움큼 피를 쏟아내며 죽음을 맞이했다.
스릉!
기묘한 증상에 마틴이 검을 들며 주변을 경계할 때.
칼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하도록 이미 그 녀석이 손을 쓴 거겠지.”
“……데제스. 대체 그자는 누구지?”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음에도 마틴은 진심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에클라 세트로서 동격이라고 볼 수 있는 에클라 세트에 대해서는 칼이나 릴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실리아의 창잡이, 에릭 듀란트.
오닉스 스퀘어의 수장, 맥캘리.
파라디스의 수호자, 베르데.
마도 왕국의 공주, 델피나
아직 그 힘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마르첼 발렌티노.
검은 교황, 데제스 싱클레어.
이 중 데제스 싱클레어에 대해서만큼은 칼은 단 한 번도 얕보는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는 왜 부른 거지?”
“……힘을 부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래.”
씨익!
마틴의 말에 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틴은 푸욱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전에 너 때문에 놀란 녀석을 좀 다독여야지.”
“누굴?”
부하로서가 아닌 친구로서 건네는 말에 칼은 조금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감옥에서 나온 칼은 햇볕을 맞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괴츠와 헤이젤이 예를 갖췄고, 릴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야.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내가 얼마나 간 떨어질 뻔한지 알아?”
“잘하면서 왜 투정이야?”
“지금 또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
볼을 쀼루퉁하게 부풀린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칼은 익숙한 듯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못 들은 척했고, 릴리는 ‘말을 말아야지.’라고 중얼거리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칼은 나무 뒤에서 머뭇머뭇거리며 숨어있는 디아나를 찾았다.
“뭘 눈치를 보고 그래? 나와.”
움찔!
칼이 서슴없이 자신을 부르자, 디아나는 크게 당황해 도망을 치려다가…….
“맹수한테 쫓기고 싶은 거 아니지?”
얄궂게 내뱉는 릴리의 한마디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의미한 도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디아나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는지, 힘겹게 칼에게 걸어왔다.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빠직!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은 분노가 솟구쳐 괴츠와 헤이젤을 노려봤다.
“그 자식 어떻게 됐어?”
“제가 두고만 봤겠습니까? 다리 뭉댕이를 아주 아작내버렸습니다.”
“그걸로 분이 안 풀려서 부하들이랑 잘근잘근 짓밟았습니다. 마틴이 숨만 쉬어도 때려 대서 그 녀석 원래 얼굴은 아예 형체도 찾아볼 수 없겠더라고요.”
“반란이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서 얼마나 초조했다고.”
아찔했던 그 상황을 상기한 릴리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헤이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내뱉었다.
“참모님도 구타할 때, 소리 들리지 않게 아예 방음 결계를 치지…….”
“닥치세요.”
“……넵.”
눈 밑에 음침한 그늘이 서려 있는 릴리를 본 헤이젤은 공포에 입을 꼭 다물었다.
“…….”
정신없는 상황 속에 디아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죄, 죄송해요. 칼리언트 님. 저 때문에 일이…….”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사과하지 마.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넌 알테어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재야.”
“흐윽, 흐윽.”
칼의 말에 긴장이 놓였는지 디아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던 릴리는 칼에게 핀잔을 줬다.
“이럴 땐, 그냥 가족이라고 하면 되잖아.”
“새삼스럽게.”
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발길을 옮겼다.
귀가 묘하게 빨간 것을 눈치챈 릴리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 *
라흐만 대륙에 다시 유혈과 공포의 시대가 왔다.
신성 국가, 산크투아리움이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라흐만 대륙을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 마법을 토대로 강화한 성기사, 그중 마스터 클래스에 이른 성기사는 일반 소드 마스터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 수는 무려 50명에 육박한다.
그리고 그들이 성지로 삼은 마도유산의 힘을 이용해 더욱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이미 대륙의 삼할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항전투쟁을 한 나라의 결말이 몹시 비참했기 때문이다.
이교도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이들은 고문과 농락을 당했고 고작 세 달도 안 돼서 죽은 이들의 숫자가 삼십 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기세에 기겁한 루콘의 왕가가 산크투아리움에게 굴복하려는 순간.
새로운 왕조인 슈타크가 들어섰다.
국왕이 된 루드거는 산크투아리움의 침략에 저항하는 국가들과 연맹을 맺었다.
로가하 연맹.
교역을 중심으로 구축한 국가, 이실리아의 힘과 슈타크 왕조의 강력한 기백에 이겨낼 수 있다고 판단한 국가가 연맹에 가입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연맹이 체결된 것은 에클라 세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연맹의 맹주가 바로 국가의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클라 세트도 아니었다.
연맹의 수장 격이라고 하나 각국의 입장은 동등했기에, 수장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에클라 세트가 인정하는 수장이라고 한다면?
맹주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은 실로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에클라 세트의 평가는 대략 이러했다.
-그 남자가 아니면, 난 연맹에 가입하지 않겠다.
-데제스를 경계, 아니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배, 아니 그분밖에 없지 않아요?
-오직 여왕 폐하의 명에 따르겠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 남자의 힘은 필수불가결이지.
-말투 험하고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이 없어서 짜증나는 놈 있지. 아 제자라고 추켜 세워주는 건 아니다.
-그 남자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
별의 수혜를 입은 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세상의 시선을 오직 한 곳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는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혹한의 땅, 알테어를 정복한 데, 성공한 남자.
불의는 광기로 잠재워버렸고 어떤 권력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기준의 왕가가 묻히고 슈타크 왕가가 들어서는 데는 그에 대한 백성의 두터운 신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잉!
각 국가의 수장과 에클라 세트가 집결한 루콘의 후방 요새.
쌀쌀한 바람에 로가하 연맹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였고, 그 가운데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길을 걷고 있었다.
심홍색의 눈빛과 머리칼은 주변의 색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모두의 앞에서 루드거는 칼리언트를 보며 말했다.
“라흐만 대륙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 칼리언트 슈타크. 그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연맹의 맹주로서 그 포부와 연맹의 의의를 밝혀라.”
로가하 연맹의 맹주, 칼리언트 슈타크.
“…….”
이 자리에 참가한 많은 이들이 입을 꼭 다물며 칼을 지켜봤다.
지금까지 그를 무시하고 외면해왔던 슈타크가의 혈족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칼의 기세에 짓눌려 멍하니 관망하고 있었다.
에클라 세트로서 이 자리에 참가한 베르데와 델피나의 표정에도 긴장이 한껏 묻어나왔다.
칼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지 따위는 없다. 위선자의 혀 굴림에 라흐만 대륙 전체가 휘둘리는 것뿐이지.”
‘망했다.’
거침없는 발언에 릴리는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쉬었지만.
칼의 연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당한 폭력으로 무고한 이들이 억압을 받고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치는 것뿐이지. 그 분야에 대해서 난 누구보다 자신 있고 기사로서 응당 해야 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발언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가고 마침내 격정을 참기 어려웠는지 칼의 발이 힘차게 대지를 찍어 내렸다.
콰앙!
강렬한 굉음에 누군가는 귀를 막았고, 알테어의 기사단은 흥분한 얼굴로 지켜봤다.
“로가하의 용사들이여! 너희들은 이 부당한 횡포를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거절한다.”
“거절한다.”
평상시처럼 묻는 질문이었기에, 알테어의 병사들은 익숙하게 대답했고, 연맹의 군사들은 따라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잃고 지켜볼 텐가?”
“거절한다!”
“거절한다!”
목소리부터 기백까지, 점차 동조된 병사들의 음성은 성 전체에 메아리가 될 정도로 울려 퍼졌다.
꿀꺽!
한순간에 전의를 끌어올린 칼의 언변에 각국의 수장들 얼굴에는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파르르르.
반면 루드거는 전율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이게 내가 보고 싶었던 광경이었어.’
모두의 기대 속에서 칼은 폐부가 터질 정도로 소리쳤다.
“내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 로가하 연맹의 맹주로서 승리를 약속하지. 나를 따르라!”
크아아아아앙!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바그로바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와아아아아아!!!”
저릿저릿!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함성에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베르데에게 말했다.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변하지 않았네요. 선배는…….”
“기백 하나만큼은 변한 거겠지.”
베르데는 기대가 된다는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