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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75화 (175/197)

제175화

칼이 감옥으로 압송되기 전.

릴리에게 남긴 말은 이러했다.

-기왕 사고 친 거, 더 크게 사고 쳐보지. 아버지께 루콘의 왕좌를 차지하라고 설득해봐.

왜 사고를 치는 놈은 따로 있고 뒷수습을 하는 이는 따로 있는 거지.

망했어.

진심으로 망했어.

출세를 위해 선택한 길이 낭떠러지 끝이라니…….

살아생전 자신의 입으로 반란의 꾀하자는 권모술수 같은 한 마디가 튀어나올 줄 상상이라도 해봤으랴.

당연히 못 해봤기에, 릴리는 멀미를 느끼며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크크크크크.”

반면 릴리의 말을 들은 루드거 슈타크는 흥분으로 인해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그러다가 저택이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버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루드거의 모습에 혈족들은 심히 당황했다.

잠시 후.

루드거는 흉흉한 붉은 눈빛을 발산하며 중얼거렸다.

“가문의 숙원을 이뤘으니, 나 따위는 퇴물이 될 바에야 권좌에나 앉아서 자신을 보필하라는 말이군.”

“……네? 그,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은 적 없는 데요.”

릴리는 아까까지 냉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루드거를 보며 적잖이 당황했다.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군.”

루드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왕이 돼주지.”

그것은 적절한 시점에서 과감하게 내린 결단이었다.

칼의 난동으로 이미 보수파의 귀족들은 결속은 엉망진창 흐트러졌다.

더 나아가 키이라 슈타크는 각 외교 관료들이 각별히 신경 쓰는 산크투아리움의 관료, 그중에서도 교황의 핵심 무력기반인 황도 12궁의 기사의 목을 베어버렸다.

머잖아 이를 죄목으로 삼아 산크투아리움은 루콘을 침략해 올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싶은 루콘의 왕가는 슈타크가를 제물로 삼을 게 뻔한 일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왕가로서는 그 이상의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콰앙!

결단을 마친 루드거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의 혈족에게 선포했다.

“루콘은 여기서 끝났다.”

“…….”

“산크투아리움의 광기의 진격에 왕가는 전의조차 끌어올리지 못하고 궁색한 핑계로 굴복할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복을 하는 것이 마땅한가?”

항복.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온 슈타크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지켜온 이 땅에 대한 자주성과 주체성, 그리고 긍지가 무너지는 것은 피가, 본능이 거부하고 있다.

그 증거로 지금 슈타크의 혈족들이 눈에 불을 켜며 전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주륵.

그 기세에 릴리는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손에 땀을 쥐며 긴장하고 있었다.

“검을 쥐어라. 광기의 군사들이 도래하고 있다. 우리는 굴복을 거절한다.”

왕권을 찬탈하겠다는 선포가 떨어진 직후.

루콘 내에서 슈타크 가문이 일으킨 반란에 귀족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중 산크투아리움에게 투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수파의 귀족들은 일제히 목이 잘려 성의 입구에 걸리는 등 한동안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광경을 본 루콘의 왕가는 스스로 왕관을 내려두고 루드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찬탈이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은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 * *

타닥타닥.

검은 숯으로 뒤덮어버린 시체가 한가득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라의 존망을 걸고 싸운 군사들로 지금은 신성 국가, 산크투아리움의 깃발 아래 모든 것을 잃고 불살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지로 불리는 마도 유산 중 하나인 데스펄트에서는 검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흙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은 데스펄트의 저주로 오염된 망령들이었다.

데스펄트.

망령을 진흙의 몬스터로 바꿔 머물게 만드는 마도유산.

이런 곳이 어째서 성지로 취급되느냐는 말도 나왔지만, 이 땅의 본래의 용도에서 크게 변질되었으니 정화시켜야 한다는 말에 성기사들은 자연스레 납득 해버렸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이도 한 명 있었다.

마르첼 발렌티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서 여기를 점령한 목적은 뭔데?”

질문을 건넨 대상은 정갈한 사제복을 갖춰 입은 데제스 싱클레어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그 이유에 대해 답해주었다.

“데스펄트는 지배권을 손에 넣으면 저 진흙의 망령들을 조종할 수 있거든. 손에 넣은 마도유산은 유용하게 써야지.”

“그래서 공략 방법은 있나?”

마르첼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치 끓는 물처럼 기포가 가득한 검은 늪, 그곳에서 부유하고 있는 진흙의 망령들.

쉬이이이익!

검은 진흙에 빠진 유해는 그대로 녹아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르첼이 이렇게까지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저 검은 진흙이 의지를 갖추고 있는 망령 그 자체라는 거다.

쇄액! 쇄액!

화악!

그 증거로 검은 진흙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한 존재를 엮어 부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마르첼이 끌고 다니는 여우 수인, 이리스였다.

키에에에엑!

이리스는 살벌한 표정으로 포효하며 검은 진흙을 거칠게 걷어내려 하고 있었다.

꿈틀!

그러나 검은 진흙의 힘이 어찌나 강하던지, 끈끈한 액체가 이리스의 팔을 붙들었다.

“멍청한 녀석!”

마르첼이 이빨을 갈며 검을 뽑아 들려는 순간.

스윽.

그보다 일찍 데제스가 양손을 모으며 기도 자세를 취했다.

단지 합장을 했을 뿐인데, 신성력이 쏟아지려고 하자 검은 진흙의 망령들이 일제히 데제스를 향해 몰려왔다.

그 반응은 서둘러 천적을 제거하기 위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거라면 대답이 되겠지.”

데제스가 싱긋 웃으며 신성력을 발산하는 순간.

콰아아아앙!

검은 늪지 전체가 신성력에 휘말리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늪지의 망령들은 고통을 호소하다 속속히 모습을 감췄고, 이리스를 구속하던 진흙도 산산이 부서졌다.

늪지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망령의 기운을 품은 단검이 나타나더니 데제스에게 날아왔다.

그것을 손으로 집은 데제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르첼에게 말했다.

“이게 지금까지 데스펄을 구성하고 있는 마도 유산, 펜텀슬링거.”

“그게 데스펄의 실체라고…….”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지 마르첼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네.”

“…….”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마르첼은 쉽사리 말문을 잇지 못했다.

“대답 못 할 것도 없지. 이건 내 동포가 만든 거니까.”

“?!”

예상치 못한 진실에 마르첼이 눈을 부릅떴다.

마도 유산, 데스펄이 생긴 것은 족히 수천 년 전이다.

한데, 데스펄을 형성시킨 펜텀슬링거를 만든 게, 그의 친구라고 하는 것은 데제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지금 와서 뭘 깨닫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데제스는 싱긋 웃으면 그대로 마르첼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사, 사령관님!”

정복지를 정리하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사색이 된 상태로 데제스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데제스를 대신해 마르첼이 용건을 묻자,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루콘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

그의 말투에서 어떤 불길한 전조를 느꼈는지, 마르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남자는 긴박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루콘, 이실리아, 파라디스를 포함한 각 나라에서 결집해 동맹을 선포했습니다. 결성된 연맹은 로가하 연맹으로 불리며, 연맹의 맹주는…….”

발언이 떨어진 직후.

무거운 침묵이 데제스와 마르첼을 뒤덮었다.

그러나 무거웠던 분위기도 잠시.

싱긋.

데제스는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재밌게 국면이 전환되는군.”

* * *

칙칙한 지하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낸 걸까?

빛 한 줌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

그 안에 갇히면, 사람들은 잡념에 사로잡혀 서서히 미쳐간다.

눈을 떴음에도 실명을 하지 않았을까?

눅눅하게 핀 곰팡이와 물비린내에 두통에 시달린다.

특히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공포는 그 사람을 폐인으로 사로잡기 충분했다.

달그락, 달그락.

“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빠져나갈 수 있어.”

강경한 보수파의 대표로 손꼽히던 리제타 공작은 손톱을 물며 그 공포에 가까스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에게 마실 물과 식사를 내주던 간수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맛탱이가 갔군.’

그동안 그는 누군가의 사주로 리제타 공작을 돌보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해봤으랴.

‘이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지?’

반면에 그 옆의 철창에 갇힌 칼은 어떤 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말을 붙이면 닥치고 꺼지라는 면박만 들었다.

‘누가 간수고 누가 죄수인 거야?’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간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칼에게 비아냥거렸다.

“머저리 같은 놈. 네가 지금은 귀족이지만 조만간 가문에서 쫓겨나는 건 기정사실이야. 근엄한 척을 해도 네놈은 구덩이에 빠진 개새끼에 불과해.”

스윽.

그 말에 그동안 좀처럼 반응이 없었던 칼이 눈을 뜨며 반박했다.

“지금 한참 내전 중이겠지? 결과는 어떻게 됐지?”

칼의 말에 간수는 크게 당황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슈나크 가문이 난을 일으켜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와 혈족들의 목이 잘릴 거라고 생각하면 네놈의 오산이다.”

콰앙!

“이, 입 닥쳐! 주제도 모르고 광분한 개새끼가!”

자신을 괄시하는 그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간수가 밥그릇을 걷어차며 분개하는 순간.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히익! 도, 도망가!”

감옥 문이 완전히 박살 나며 햇볕이 드리워졌다.

그와 동시에 문밖으로 비릿한 혈향이 가득 풍겨 나왔다.

“어,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한 간수가 뻣뻣하게 창을 들며 경계 자세를 취했지만.

저벅저벅.

햇살을 등지며 나타난 기사는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그 기사는 다름 아닌 마틴이었다.

칼은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알테어는?”

“지금 리슈타 슈타크님께서 대리로 관할하고 있습니다. 알테어의 가신들은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습니다.”

“아버지는?”

“왕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국왕 전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뭐?! 차, 찬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냐!”

옆의 우리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리제타 공작이 철창살을 붙잡으며 기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반면, 그의 말을 흡족하게 듣던 칼은…….

“이야기 끝났네.”

철컹!

콰앙!

결박돼 있던 구속구를 강제로 끊어낸 뒤, 쇠창살을 걷어찼다.

“히, 히익! 오, 오지 마!”

그 기세에 깜짝 놀란 간수가 황급히 칼에게 창을 찔러 넣으려고 했지만.

콰앙!

칼은 그의 얼굴을 벽에 힘껏 찍어버린 뒤, 쓰레기처럼 갖다버렸다.

그 뒤, 칼은 쇠창살을 붙들고 있는 리제타 공작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내기는 내가 이겼네. 어떻게 할까? 리제타. 이제 공작도 뭣도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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