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무엇을 잘못 한 거지?
어째서 저렇게까지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신앙심에 시녀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때, 한 사제가 차분한 언행으로 라이너의 화를 다스렸다.
“진정하십시오. 산크투아리움에서 사제님의 행동은 극히 올바른 행위이나, 이곳은 루콘 땅입니다. 이 흑마법사는 누군가의 소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숨통이 끊어졌다가는 리제타 공작님의 체면이 많이 구겨질 겁니다.”
이단 심문관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산크투아리움의 사제들은 최대한 자신의 화를 절제했다.
사제인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은 비틀릴 대로 비틀어진 타락한 세상이지만.
신의 안배 아래 인간을 중용하는 것도 교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인내심은 필수적인 덕목 중 하나였다.
움찔!
다행히 그의 설득은 효과가 있었는지 디아나를 짓밟았던 라이너가 발을 멈췄다.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기세등등했던 라이너는 가까스로 화를 죽일 수 있었다.
사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라이너를 중재했다.
“여기서는 치료비를 건네주고 사제님께서는 얼른 성지 순례를 떠나셔야죠.”
빠득!
“천박하고 더러운 것한테 이런 인심을 베풀어야 하다니…….”
라이너는 수중에 지닌 은화를 집어 던지고는, 쓰러진 디아나의 손을 짓밟으며 발길을 옮겼다.
뚜벅뚜벅.
그들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와들와들 떨던 시녀들은 뒤늦게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으세요?”
“…….”
몸 상태를 묻는 질문에 디아나는 통증 때문에 호소하면서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녀 중 한 명은 동료 시녀를 보며 물었다.
“어, 어떻게 하지?”
“이, 일단 옮겨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의견을 나눈 뒤 힘을 합쳐, 디아나를 옮기려는 그때.
콰르르르르.
갑자기 엄청난 기세가 그녀들을 짓눌렀다.
덜덜덜덜.
손발이 떨리고 이마에서는 서늘한 땀이 흘러내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압박감에 그녀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뻣뻣하게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칼리언트가 분노가 깃든 눈으로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짓이지?”
“그, 그건…….”
섣불리 대답하다 화근이 될 것이라고 자각했는지, 시녀들은 재빨리 입을 닫았으나…….
“말해.”
칼은 묵인을 용인하지 않았다.
오싹!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그녀들은 깨달았다.
결코 자극해서는 안 될 무언가 깨어났다는 것을…….
저 말을 거슬렀다가는 자신들 역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결국 시녀들은 시선을 내리깔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리제타 공작님의 외동아들, 라이너 리제타 도련님입니다.”
“쿠라빌.”
화르륵! 히이잉!
칼이 호명하기 무섭게 허공에서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바이콘,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는 아무것도…….”
위험을 느낀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베풀었다.
스스스스.
쿠라빌은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디아나의 악몽을 흡수한 뒤, 칼에게 그녀의 악몽을 보여주었다.
과장도 거짓도 없는 진실.
머릿속으로 무자비한 귀족 남성의 폭력에 구타를 당한 디아나의 모습이 새록새록 연상됐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했고, 망설일 생각 따위는 없다.
“……디아나를 치료해라.”
“네, 네. 어떻게든 치료하겠습니다.”
시녀들은 공포에 몸을 떤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칼이 발을 떼려고 할 때.
“……카, 칼리언트 님. 저, 전 괜찮아요.”
디아나가 힘겹게 칼리언트를 붙들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앞으로 어떤 일이 초래될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그녀의 목소리에 칼은 조금 기세를 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부당한 폭력에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동료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살아왔겠지?”
울컥!
그 한마디에 디아나는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외지의 횡포에 맞서지도 못하고 홀로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빠직!
그녀의 눈물은 칼의 분노에 더욱 불을 지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가슴 속의 화를 떨쳐내야만 했다.
“디아나. 그때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해야 될 거다. 너는 나의 가신이고 슈미트에게는 딸과 같은 존재며 그 녀석들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콰앙!
발설 직후.
쿠라빌의 양발이 지면을 강하게 두들겼다.
화르륵!
푸른 화염이 확산하며 피어오르며 칼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믿기 어려웠는지 시녀들은 눈을 깜박거렸다.
“흑흑.”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는지 디아나는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 * *
연회가 개최된 이후로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환희가 찾아왔다.
리제타 공작은 자신을 찾아오는 귀족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하다 곧 눈매를 좁히며 한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리제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베허트. 자네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조금 의외이구려.”
작위는 자작, 루콘에서 부여된 그의 직책은 이실리아와의 교류를 책임지고 있는 외교 관료로 정직한 성품 때문에 꽤나 신망이 높은 사내였다.
정치적 성향은 보수도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루콘에 제일 득이 되는 방법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립적인 성향이었다.
이 때문에 보수파 중에서도 그를 꺼려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를 욕심 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리제타 공작의 경우는 후자의 관점에서 베허트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찾아온 용건은 무엇인가?”
“일단 초청장을 받았으니, 찾아뵌 것도 있지만 의중을 묻는다면, 오늘의 구도가 조금 신기해서 찾아왔습니다.”
“구도라면 역시 슈타크가를 말하는 겐가?”
매국의 낌새를 눈치챈 걸까?
아니면, 이례적인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있는 걸까?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리제타 공작은 뻔뻔하고 일관적인 자세로 그를 대했다.
베허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슈타크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데, 조금 신기했습니다.”
“정치라는 게,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는 법이네. 번견도 길들일 때가 됐네.”
“……길들이는 건 무리입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친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산크투아리움의 힘을 빌린다면, 찍어 누를 수는 있겠죠.”
“…….”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추측성 발언에 리제타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작가의 위세에 산크투아리움의 힘까지 빌렸는데, 하는 말이 가까스로 굴복시킨다는 게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아직 베허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외람되는 말씀이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칼리언트 슈타크만큼은 절대 무릎을 꿇릴 수 없을 겁니다.”
‘칼리언트?’
“허허허 예상외로군. 가주인 루드거 슈타크가 아니라 그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언급될 줄이야. 그는 대체 어떤 사내기에 자네가 그렇게 평가하는 건가?”
리제타 공작의 질문에 베허트는 진중한 눈빛으로 짤막하게 평을 남겼다.
“그것은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광견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앙!
콰아앙!
거대한 사자의 포효와 함께 거센 굉음이 공작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달그락, 달그락.
성지 순례를 위해 마차에 올라탄 라이너는 깊은 고심에 잠겨있었다.
“죽여야 됐었는데.”
존재 자체를 용납하기 어려운 마녀가 자신의 저택에 있다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를 보며 사제가 말했다.
“연회가 끝난 이후 미카엘라님이 합류하실 겁니다.”
“그러겠지.”
스승의 이름이 언급되자, 라이너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고행을 끝내면, 더 강해진 모습으로 공작가에 귀환하리라.
그리고 신의 안배 아래 이름을 떨치고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연회가 펼쳐지는 정원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라이너는 그 모습을 단단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강경한 보수파 귀족의 일원들.
그들은 연회를 즐기는 척 바깥으로 떠나는 자신의 모습에 힐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조만간 네놈들 전부 내 휘하에 넣어주지.’
길지도 짧지도 않을 것이다.
‘곧 그들의 위에 서게 될…….’
하지만 앞선 그의 생각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순간이 다가왔다.
크아아아아앙!
고막을 찢는 포악한 짐승의 포효 소리.
“꺄아아악!”
사람들은 일제히 귀를 막거나 테이블에 부딪치며 혼란스러워했다.
히이이잉!
마차를 끌고 있던 말들은 동공을 크게 뜨며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사자, 바그로바를 보며 기겁했다.
크르르르르.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눈빛에는 살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빨리 마차를 세워!”
당황한 사제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린 그 순간.
콰직!
콰앙!
옆에서 대뜸 나타난 칼이 마차를 발로 걷어차 말과 함께 통째로 날려버렸다.
주르르륵.
콰앙!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면을 휩쓴 마차는 그대로 주륵 미끄러져 연회석 한자리를 풍비박산 날려버렸고.
마차와 연결되어 있던 말들은 피투성이인 채로 바닥을 구른 뒤 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억, 허억!”
공작가에서 갑작스레 벌어진 습격에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특히,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던 라이너는…….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곧장 공작가의 권위를 내세워 습격을 가한 칼을 멈춰 세우려고 했다.
희번득!
하지만 눈 깜짝할 새 다가온 칼은 광분한 눈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마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마치 접시를 깨뜨리는 것마냥 마차를 산산조각으로 깨뜨려버렸다.
* * *
굶주린 야성을 일깨우는 것은 주제도 모르는 들짐승의 발길질이다.
평소에는 눈에 거슬릴 뿐이기에 건들지도 않지만.
살찐 짐승이 주제도 모르고 야수의 영역에 침범할 경우 그 대가는 가혹한 법이다.
뚝뚝.
라이너는 온몸에 피를 흥건히 흘리며 공포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라이너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칼의 모습이었다.
전신이 새까만 기운에 뒤덮인 채, 흉흉한 붉은 동공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악마가 이 세상에 현신한 것 같았다.
“허억, 허억,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이상 나에게 손을 대다가는 네놈도 네놈의 가문도 끝장이야.”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건지, 라이너를 보호하기 위해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칼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 세웠다.
칼이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쏘아보자, 마찬가지로 칼을 바라보고 있던 미카엘라가 싸늘한 표정으로 경고를 읊조렸다.
“여기서 멈춰야 할 겁니다. 제 에스콰이어를 건드렸다가는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