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연회가 펼쳐지는 리제타 공작의 자택.
웅성웅성.
연회의 중심이 되는 정원에서는 벌써부터 이야기꽃이 활개 치고 있었다.
강경보수파를 대표한다는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닌 건지, 루콘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제타 공작은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다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그가 해야 될 것은 매국이다.
대의 명분상으로는 혁명이라고 외치는 입장이지만.
그렇기에는 자신 스스로도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결집한 귀족들 대부분은 자신의 뜻에 동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엄청나게 위험한 변수가 존재했다.
히이잉!
위험한 변수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변방을 수호하는 루콘 최강의 무가를 상징하는 슈타크 가의 깃발이 휘날리며 지금 이 자리에 슈타크 일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사이가 좋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건지, 그들은 모두 따로 모습을 드러냈다.
야성적이면서도 우아한 붉은 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는 키이라 슈타크.
강철의 기사단을 이끌고 튼튼한 군마 위에서 위엄을 떨치고 있는 라마스 슈타크.
이 둘은 가문의 위광과 상관없이 스스로 무력을 증명해냈고, 기사단까지 구축한 슈타크가의 혈족들이었다.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군요.”
때마침 등장한 미카엘라는 싱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슈타크가의 진가를 인정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이때 리제타 공작은 힐끔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들을 상대로 여유를 보일 수 있다는 건가?’
그것이 허세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리제타 공작은 잠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라이너의 훈련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건가?”
“역시 공작님의 아드님답게 훌륭하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요 며칠간 리제타 공작은 미카엘라의 힘을 빌어 자신의 아들을 훈육시키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그의 아들, 라이너 리제타는 파르테스 아카데미에 입학조차 하지 못한 범인이었다.
하지만 장차 후계를 이을 아들이 어떤 장점이나 이점 없이 크는 것은 아버지로서, 또 가주로서 결코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황도 12궁의 기사 중 한 명인 미카엘라에게 훈육을 맡겼다.
훈육을 한 기간은 약 세 달.
그사이 놀랍게도 라이너는 검술부터 비롯해 기품까지 모든 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없던 신앙심까지 우러러 나와 마음가짐은 벌써부터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와 유사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내 아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전에 반푼이 같은 삶을 사느니 산크투아리움에서 추기경 소리를 듣고 사는 게 나을 테지.’
그리고 연회가 펼쳐지는 오늘.
그의 아들은 성기사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기 위해 산크투아리움으로 떠난다.
“이제 곧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할 말은 없습니까?”
무릇 아버지라면 자식이 고행을 하러 떠나는 길을 배웅하며 챙기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잘 갔다 오라고 전해주게.”
리제타 공작의 반응은 다소 냉소적이었다.
이번 고행에서 사자가 되지 못한다면, 연을 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복잡한 표정을 짓던 리제타 공작은 곧 양손에 깍지를 낀 채,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마지막 슈타크가의 기사단장이 모습을 드러내는군.”
다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선 두 사람보다 훨씬 어린 외모를 갖추고 있는 소년이었다.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는 소년.
그 뒤에는 거대한 사자가 따라와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휘하에 있는 부하들이 차례,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걷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칼리언트 슈타크.”
“왔다. 루콘의 광견.”
“완전 잘 생겼잖아.”
“저렇게 어린데, 진짜로 알테어를 정복했다고?”
“어린 건 상관없어. 저 위광은 틀림없이 진짜야.”
뭇 어린 영애들은 칼리언트의 위엄 서린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흠모했고, 권위가 높은 귀족들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그들의 입장에서 슈타크가는 방위를 위해서라면, 신분과 위계질서조차 무시하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족속일 뿐이다.
그 무례한 행동 때문에 연회장에서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늘 불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미친 짓이고, 영지전을 벌이자니 득이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파든 진보파든 상관없이 슈타크가는 어떤 가문과도 결코 뒤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관계라는 것이다.
칼리언트 슈타크를 주목하고 있던 미카엘라의 평은 이러했다.
“……저건 위험하군요.”
그는 앞서 목격한 두 명의 슈타크 남매보다 칼리언트를 더욱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 보였다.
“길들일 수 없는 건가?”
“길들일 수 있습니다. 길들이지 못하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고요.”
미카엘라는 싱긋 웃으며 리제타 공작의 걱정을 달래주었다.
* * *
연회장에 도착한 칼의 일행은 폭주하듯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런 값진 술을 먹을 수 있는 건, 얼마 만이래.”
괴츠는 연회장 곳곳에 놓인 술을 싹 쓸어가 목을 축였고…….
콰직!
바그로바는 큼지막한 소의 뒷뼈를 즐겁게 뜯고 있었다.
“천박하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민망했던 건지,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어.”
처음에는 디아나와 자신을 포함해서 셋이 오려고 했으나, 호위 한 명을 대동해야 되지 않겠냐는 괴츠의 생떼에 어쩔 수 없이 승인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릴리는 어쩔 수 없이 칼을 쳐다보며 물었다.
“칼 주의 정도는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버려 둬.”
칼은 와인을 홀짝 마시며 말했다.
“어차피 기품이나 예의를 지켜봤자 이미 밉상으로 찍힌 데다, 내 체면을 생각해서 자중하라는 말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해석하자면, 굴릴 대로 굴린 부하를 쉴 때, 제대로 쉬게 해주고 싶다는 거네.”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부정했지만…….
“그런 말 한 적 없어.”
“푸훗!”
릴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어?”
“가끔 보면 귀여운 것 같아서.”
“…….”
솔직담백한 한마디에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주변을 훌쩍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리제타 가문에서 마련해준 방으로 먼저 들어갔어.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 조금만 있다가 몸이 진정되면 온대.”
“뭘 다시 내려오라 그래? 그대로 쉬라고 해.”
“그럴게.”
릴리가 발을 떼는 순간, 칼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됐어. 내가 직접 갈게.”
“갑자기 왜?”
탁.
칼은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손에 든 채, 말했다.
“……일하기 귀찮으니까. 저 녀석들 좀 상대하고 있어.”
“저 녀석들?”
칼이 시선으로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던 릴리의 몸이 흠칫 굳었다.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키이라와 라마스가 마치 칼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칼에게 익숙한 릴리라고 해도 저들의 사나운 기운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홱!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며 칼의 팔을 붙들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먼저 상대하는 게 맞잖아?”
“사령관의 명령이야.”
“으아아아, 평소에는 존댓말도 하지 말라며. 이 웬수야.”
“내 편의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싫으면 참모직 내려두면 돼.”
“으으윽! 비겁해.”
그만두는 것은 싫었는지, 릴리는 어쩔 수 없이 칼의 명에 수긍했다.
“간다.”
칼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발길을 옮겨 사라졌고, 릴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경직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이,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사령관님의 직속 참모, 릴리아나 아베티스트입니다.”
치맛자락을 살짝 잡으며 건네는 그녀의 인사에 키이라와 라마스는 조금 당황했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 * *
방안으로 성큼성큼 걷던 디아나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 고통에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빠.”
몸 상태는 리제타 공작의 자택에 들어온 뒤, 급속도로 나빠졌다.
딱히 누군가 저주를 흩뿌린 것도 아니고 병이나 질환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두통을 유발하는 것은 조금 더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뚜벅뚜벅.
때마침 그녀의 불안을 자극시킨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사제복을 갖춰 입은 남성들.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는 그들을 본 디아나의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 남자들이 생각이 나.’
칸투버그를 죽이기 위해 이실리아로 부하들과 이동할 때, 자신을 습격한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들.
그들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해 저절로 속이 메슥거렸다.
잔인하게 동료들을 죽이고 인두로 살점을 지지고 톱으로 뼈를 도려내는 고문을 망설임 없이 한 악마 같은 족속들…….
“우웁!”
그 광경을 떠올리자,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꺄아, 괜찮으세요?!”
연회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시녀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디아나를 부축하려고 할 때.
“이런 괜찮습니까?”
디아나의 공포를 유발하는 사제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오들오들.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저희는 신의 사제니까요.”
얼굴에 있던 면사를 거둬내자, 시녀들은 깜짝 놀라 예를 갖췄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딱딱한 인사는 이 자리를 더 긴장하게 만드는데.”
도련님이라고 불린 사제는 다름 아닌 리제타 공작의 아들, 라이너 리제타였다.
상냥한 미소를 짓던 그는 연신 떨고 있는 디아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신의 안배 아래 편안하게 있으면 됩니다.”
성호를 그려 넣으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은 신성 마법을 펼치는 순간.
파직!
콰앙!
“꺄악!”
디아나의 몸에 깃들어 있던 흑마법의 마력이 신성력에 반발하듯 튕겨냈다.
주륵!
그 여파로 디아나의 팔에는 작은 화상과 함께 피까지 흘러내렸다.
“…….”
싸아.
그 순간을 기점으로 주변은 얼어붙을 듯 싸늘해졌다.
라이너는 표정을 순식간에 바꿔 시녀와 사제들을 험악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냐? 신성한 저택에 이 부정한 것을 들여놓은 것은?”
“그, 그게…….”
시녀들과 사제들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때.
퍼억!
“쿨럭!”
라이너는 있는 힘껏 디아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갑작스런 기습에 디아나는 각혈을 하며 땅바닥에 철푸덕 넘어졌다.
꽈악!
라이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디아나의 머리채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디서 보낸 거지? 추잡하고 더러운 마력으로 감히 이 저택을 더럽히다니…….”
빠득!
실핏줄이 터진 라이너의 눈빛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것 같았다.
“이, 이것 놓으세요.”
디아나는 발악하듯 라이너의 손을 붙들었지만.
퍼억! 퍼억! 퍼억! 퍼억!
오히려 그 행위는 라이너의 가학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불러왔다.
라이너는 앞뒤 가리지 않고 디아나에게 모질게 구타를 하다 주변의 사제에게 말했다.
“메이스를 갖다 주세요. 지금 당장 이 년의 머리를 부숴서 이곳을 정화해야 됩니다.”
“…….”
서슬 퍼런 광기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