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칼이 혹한의 땅, 알테어를 점령한 이후.
루콘에서는 ‘용을 쓰러뜨린 붉은 기사’라는 서사시와 연극이 유행을 하게 되었다.
그 파급력은 루콘의 수도, 라바니아로까지 확산됐다.
거리에 떠도는 아이들은 검을 들며 칼을 자칭하며 전쟁놀이에 흠뻑 빠졌고, 상인들은 알테어와 교류를 통해서 얻는 이익을 생각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팔락!
때마침 수도의 거리에서는 용을 쓰러뜨린 붉은 기사의 홍보 전단지가 거리를 휘날렸다.
“가지고 오거라.”
마차에서 거리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중년 남성의 명에 하인 중 한 명이 재빨리 전단지를 갖다 주었다.
“슈타크 일가 중에서 독보적인 천재가 나타난 건가?”
전단지를 빤히 바라보던 중년 남성, 주세페 리제타 공작.
루콘에서 가장 강경한 보수파 대표인 귀족으로 그 영향력은 루콘 절반의 귀족을 아우를 수 있었다.
왕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권력의 소유자.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 남자의 성향이 오만불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결코 꺾을 수 없는 강대한 가문이 있었다.
“빌어먹을 슈타크 놈들.”
루콘 최강의 무가를 언급한 그 입에서는 경박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절로 흘러나온 분노는 자연히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고.
꽈악!
전단지는 그대로 구겨져 바닥에 버려졌다.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건지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금발의 벽안을 지닌 남성은 차분한 표정으로 리제타 공작을 쳐다봤다.
이름은 미카엘라.
산크투아리움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성기사로 어떤 용무로 리제타를 찾아온 상태였다.
차분한 음색에 이성을 되찾은 리제타 공작은 양손에 깍지를 끼며 미카엘라에게 말했다.
“제안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깊은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화를 낸 이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만?”
“내 고심이랑 직결되는 부분이오. 나는 야망이 아주 큰 남자고 산크투아리움에 협력하면 얻게 될 지위는 충분히 탐이 나오.”
“…….”
매국의 소지가 충분한 발언이었지만.
리제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감춰놓았던 욕망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루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소. 특히 국방에 관해서는 말이오. 왜냐면 그쪽의 실권은 슈타크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다혈질에다 검에 미친놈들이죠. 그 기세는 언제나 절 위협해왔고, 날 하찮은 쥐새끼로 만들어버리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
“회유는 불가능한 겁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슈타크 가문은 몇 번이고 루콘의 위기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켜왔소. 그것이 조국에 대한 충성심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용도인지 알 길은 없소.”
“…….”
리제타 공작의 말에 미카엘라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제안을 해보죠. 그동안 루콘이 산크투아리움에게서 안전했던 것은 우리가 그럴 마음이 없었을 뿐이지. 결코 슈타크가가 두려워서가 아니니까요.”
“설득이 된다고 생각되오?”
“가능합니다.”
“…….”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에 리제타 공작은 말문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아직 데제스님의 힘을 몰라봐서 그렇습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신다면, 번견을 길들여 보겠습니다.”
우웅!
자신의 말이 결단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건지, 미카엘라의 전신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쿠구구구구.
발출된 신성력은 주변의 지형을 미미하게나마 떨게 만들었다.
히잉!
위화감을 느꼈는지, 마차에 매달린 말들이 요란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주륵!
그 힘을 직접 목격한 리제타 공작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게 신성 제국 내에서 굴지의 강자로 알려진 황도 12궁의 기사, 백양의 미카엘라.’
지금까지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루콘과 산크투아리움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대중들 사이에서 늘 회자되는 이야기는 용을 쓰러뜨린 기사에 관한 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각 나라의 최강의 기사단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는 거였다.
거기에 항상 언급되는 게 슈타크 일가와 산크투아리움의 황도 12궁의 기사였다.
‘이 녀석이라면 슈타크라고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겠어.’
고심 중에 리제타 공작은 결국 산크투아리움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실패의 대가는 참혹하지만, 성공하며 막대한 부와 번영을 손에 넣게 된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기사단이 자신의 편에 선다고 하면, 성공할 확률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제안을 수락하겠소.”
“협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당신의 가문에 주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대화를 끝마친 미카엘라의 눈에는 음산한 웃음기가 드러났다.
* * *
깊은 밤.
아우우우우.
알테어의 영지에서는 아울 베어의 울음소리가 산맥 곳곳에 울려 퍼지며 자고 있는 영지민들에게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스윽.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영지에 접근하려던 몬스터들은 결계 근처에 진입하기도 전에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공포로 떨고 있는 시선이 한데 모인 곳에는 붉은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 바그로바가 있었다.
올 테면 언제든지 와라.
바그로바는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이 이 영역에서 최강의 포식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걸로 됐어.”
이때 칼이 흥분한 바그로바의 갈기를 쓰다듬자…….
그르릉.
어느새 낮게 깔던 짐승의 울음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안 어울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괴츠와 헤이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덩치 큰 강아지인줄 알겠다.”
“성깔도 저 정도면 완전 이중인격이잖아. 아니 이중수격이라고 해야 하나?”
“바그로바가 얼마나 착한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릴리는 두 기사에게 핀잔을 주었다.
“참모님. 저놈 성격 몰라서 그렇습니다.”
괜스레 억울했던 괴츠는 구태여 한마디를 더 했다가…….
찌릿!
날카롭게 직시하는 릴리의 눈빛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가 기사단의 참모로 부임한 지, 어느덧 세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맥으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인상을 주었기에, 모두가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얼마 안 가 그들은 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재를 영입한 건지 깨닫고, 그녀를 자연스레 참모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뭘 그렇게 떠들고 있어. 들어가서 잠이나 자지.”
칼이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자, 릴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사령관님.”
“……뭔데?”
그녀의 존댓말이 무척 어색한지, 칼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빌레 레오네 특성은 주인의 힘에 영향을 받아 힘이 커지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사령관의 힘이 더 강해졌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그렇지.”
대답 후 칼은 알테어를 살펴본 뒤, 말했다.
“이제 날 견제할 수 있는 녀석은 없어.”
오만한 발언에도 누구 한 명도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칼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은 내심 안심했다.
“여전하시네요.”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은 뒤, 다른 화제를 언급했다.
“최근에 한 서신을 받았어요. 초청장이더라고요.”
“누구한테 온 초청장인데?”
“리제타 공작으로부터요.”
예상치 못한 남자의 이름이 언급되자 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루콘의 귀족으로 살아가는 이상,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제타 공작가는 슈타크가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수상쩍은 꿍꿍이가 느껴지는군.”
“거절할까요?”
“네 판단은 어떤데?”
의중을 묻는 질문에 릴리는 성심성의껏 생각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령관님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남에게 증명이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소문을 접한 이들 중에 그들도 몰려올 것 같거든요.”
의미심장하게 거론한 ‘그들’은 당연 데제스를 제외한 나머지 에클라 세트들이었다.
파르테스 졸업 이후.
그들은 각자가 있는 자리를 지키며 힘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 범인을 뛰어넘은 초월자들로 한때, 평화와 약자 수호란 명목 아래 서로에게 협조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실리아가 하마터면 괴멸할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로…….
타라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고대 마물 중 하나로 분류되는 게어트너를 사냥할 때였다.
그때 게어트너를 단독으로 잡은 것은 필시 칼이었지만.
칼이 게어트너를 뛰어넘을 때까지 활약을 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현재 데제스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이실리아는 에클라 세트와 그들이 속한 국가하고 조속히 동맹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클라 세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칼을 선택했다.
‘딱히 녀석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야.’
마음만 먹는다면, 단신의 힘으로 능히 데제스를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입을 피해가 너무나 막대했다.
“어쩔 수 없지.”
칼은 한숨을 쉬며 리제타 공작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때 칼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건지, 릴리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은 그러면서도 역시 친구들이 보고 싶은 거죠?”
“시끄러워.”
괜스레 귀가 빨개진 칼은 릴리의 이마를 검지로 툭 때리며 발길을 옮겼다.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괴츠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헤이젤에게 물었다.
“왜 우리가 장난치면 빡인데, 참모님한테는 툭이냐?”
“너 같으면 저렇게 아리따운 미녀분을 때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스스로 답을 뱉은 괴츠는 그렇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닥쳐?”
물론 이 말을 못 들을 리 없던 칼은 무척 불쾌한 표정으로 두 남자를 째려봤다.
쩌적!
강렬한 압박에 두 사람의 몸은 얼음처럼 경직됐다.
“칼.”
릴리가 자제하라는 듯 말하자 칼은 곧 눈빛에 독기를 빼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저 녀석이랑 용건은 다른 것 같은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즉각 당혹감을 감추고 각각 함을 들어보였다.
“슈미트 님께서 만든 또 하나의 명검.”
“그 힘은 비어벨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며 슈미트님이 스스로 스승의 명검을 뛰어넘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들고 있던 함의 뚜껑을 열었고.
반짝!
함 안에는 서슬 퍼런빛을 내뿜고 있는 두 자루의 명검이 있었다.
칼은 그중 한 자루를 집으며 물었다.
“이름은?”
“인페르노와 시엘로입니다.”
“마검의 성향을 띠는 게, 인페르노. 그리고 성검의 성향을 띠는 건, 시엘로라는 거겠지.”
휘릭!
인페르노를 집어 든 칼은 단숨에 알테어 인근에 얼씬거리는 몬스터들을 향해 참격을 휘날렸다.
집결한 붉은 오러는 마치 쇄도하는 뱀처럼 구불거리더니…….
콰아아앙!
단숨에 지면을 쓸어버리며 몬스터들의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치이이이익!
참격과 닿은 주변의 눈은 즉각 녹으며 영지를 가릴 만큼 거대한 수증기가 곳곳에 피어올랐다.
“…….”
모두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때.
“손맛이 좋군.”
오직 칼만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새로운 검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