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빠직!
오랜만에 듣는 단호박 대답에 릴리는 잠시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래. 이래야 칼이지. 이래야 칼이긴 한데.’
나름 아카데미 수석에 학생회장으로 파르테스를 이끌어 왔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하니, 가슴 속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긍 못 하겠는데. 이유라도 말씀이라도 해주시죠. 사.령.관.님.”
그렇기에 릴리는 언짢은 심정을 담아 칼을 노려봤다.
‘역시 보통 여자는 아니구나.’
은근슬쩍 헤이젤이 눈치를 볼 때, 칼이 입을 뗐다.
“위험해. 너에게 지급할 급여도 만만치 않을 테고”
“급여는 양심껏 최대한으로 주시면 그만이고, 스스로 몸을 지킬만한 여력 정도는 있으니까 일하게 해주시죠.”
“너 평소에 고집불통이라는 이야기 많이 듣지?”
“처음 듣는데요?”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말했다.
“존댓말 하지 마. 직급으로도 부르지 말고.”
“공과 사는 가리셔야죠. 사령관님, 확답을 들을 때까지 여기서 계속 발붙이고 있을 거예요.”
‘왜 떼를 쓰는 거야. 이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던 칼은 한 차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말고 다른 녀석들한테 인정받아야 될 거야.”
세계 최고의 결계술사의 마법을 계승 받은 데다, 엘리트 집단인 파르테스에서 학생회장을 지낸 이력을 보면 릴리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세간의 시선은 변화를 준비 중인 알테어에서 갑자기 끼어든 기회주의자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로 인해 합심해야 하는 알테어에 내분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칼의 마음을 간파한 건지, 릴리가 물었다.
“시험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래. 세 달 안으로 모두가 널 인정할 정도의 재능을 보여봐. 내 권한을 지닌 참모대행으로 말이지. 자신 없으면 말아.”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릴리는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줬다는 느낌이 무척 언짢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릴리의 대답에 칼은 ‘귀찮은 녀석’이라고 툴툴댔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헤이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칼은 영지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뽑았기에 신분의 귀천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포섭력은 결국 이 험한 오지, 알테어를 정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한데, 그런 칼이 친분으로 자신의 친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쉽사리 납득 되지 않았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헤이젤은 걱정스런 기색으로 릴리를 엿봤지만.
머잖아 그것은 무척이나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 *
릴리가 칼리언트 슈타크의 참모대행으로 발탁된 후.
그녀의 행보는 무척 빠르면서도 모두의 표정을 바뀌게 했다.
부임 첫날.
행정관, 제이크는 그녀의 급여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것과 자신의 업무와 겹치는 것에 나름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릴리는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업무에 전념했다.
먼저 보급품 상태와 수량을 확인한 그녀는 제이크에게 말했다.
“보급품에 대한 관리가 미숙해요. 사소한 일탈 행위가 자꾸 겹치다 보면, 결국 이렇게 손실이 날 수밖에 없죠.”
눈앞에는 물통과 담요, 그리고 밀가루 포대 등이 놓여 있었는데.
나름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음에도 숫자가 맞지 않거나 어떤 건 헌것과 몰래 교체되어 있기도 했다.
우웅!
릴리는 즉각 보급창고 전체에 결계를 쳐둔 뒤 말했다.
때마침 창고에 들어오려던 개미는 갑자기 생성된 결계에 뒤로 밀려나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다.
“근 반년간은 번거롭더라도 한 달에 두 번은 검사를 진행할 거예요. 보급품도 기존에 거래했던 상회가 아니라 경쟁을 할 만한 상회를 몇 군데 더 선정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에 맞춰 실행한 결과, 보급품에 대한 관리는 대폭 개선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으로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두드리며 펼친 농지 및 작물의 재배였다.
“알테어의 지배자를 물리친 뒤, 이곳 기후도 조금씩이지만 변하고 있어요. 농사를 준비해야 돼요. 예산이 다소 소모되겠지만, 룩스 솔리에 학파에서 만든 작물의 씨앗을 사들여서 심어보죠.”
약 반년 뒤, 알테어에서는 난생처음 풍년이라는 것을 맞이했다.
그 외에도 릴리는 단기 계획과 장기 계획을 나눠 교육기관의 설립, 치안 강화, 재해 대피 시설 구축, 병사들의 복지 개선 등. 인재를 적극 배치해 영지를 관리했다.
‘……미쳤다.’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이크는 믿기지 않는지 눈을 깜박거렸다.
칼이 거침없이 요새를 강화하는 전략을 펼쳐 내실을 다졌다면…… 릴리는 칼이 쌓은 기반을 토대로 요새를 확장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몸소 지켜보고 있던 제이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변하고 있어. 알테어가…….”
* * *
카앙! 카앙!
알테어의 무기를 생산하는 대장간.
그곳에서는 슈미트가 시뻘겋게 달궈진 기둥을 해머와 조각칼을 이용해 깎아 내려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칼은 뒤에서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어도 모자를 판국에 제 몸 하나 사리지 않는 모습에…….
“칼리언트님. 감기 걸려요!”
디아나가 짜증 반, 걱정 반이 서린 표정으로 코트를 가져와 칼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고마워.”
“네, 네!”
의외의 대답에 디아나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카앙!
듣는 귀는 열려있었는지, 슈미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죽고 나서 뭔가 개심이라도 했나?”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쪼잔하지는 않아.”
칼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뒤, 슈미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지금 만지고 있는 그건…….”
“네가 쓰러뜨린 녀석의 이빨이다.”
명검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이 땅을 지배했던 맹독의 악마, 암피스 바에나의 이빨이었다.
“어째서 조각을 하고 있는 거지?”
칼의 질문에 슈미트는 힘껏 망치로 조각칼을 때리며 말했다.
“녹지 않아서 그러지. 소재 중에 아주 최악이야. 손이 얼얼해서 나갈 지경이야.”
“투박한 검이 되겠군.”
칼의 냉소적인 평에 슈미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비어벨보다 더 대단한 명검이 탄생할 거다. 두고 봐.”
“…….”
암피스바에나와 전투 중 부러진 비어벨을 떠올리고는 칼은 인상을 홱 찌푸렸다.
칼의 기량을 전부 채워줄 정도의 명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험한 오지를 정복하는 데 있어서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검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하기 하나보군.”
“미안하기는.”
칼은 투덜거리는 표정으로 슈미트의 시선을 피했고, 슈미트는 다시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바그로바가 맥캘리를 태운 채, 칼에게 다가왔다.
“어허! 이놈. 천천히 가야지. 나 넘어지면 어쩌려고.”
“…….”
바그로바의 갈기를 잡으며 즐기고 있는 그 모습을 칼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표정 풀어! 자식아! 그 동정 섞인 표정은 뭐야!”
뒤늦게 시선에 노출되었음을 깨달은 맥캘리는 얼굴을 홱 붉히며 칼을 노려봤다.
근 이 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호통에 칼은 벌써 질리기 시작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고마워.”
그리고 말끝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한마디를 읊조렸다.
“…….”
새삼 변해버린 제자의 모습에 맥캘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두 분 다 부끄러워하는 거겠지.’
옆에서 두 사람의 심리를 간파한 디아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맥캘리는 곧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 국제 정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아직 접한 건 없어.”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칼도 정보 길드의 정보를 사들이고 있지만 그 한계는 명백했다.
“산크투아리움에서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는 칼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현재 산크투아리움의 교황은 이반 2세이지만.
그는 노쇠하고 병약했기에 나라를 운영할 힘이 없어 자신의 대행을 임명했다.
그 이름은 데제스 싱클레어, 바로 산크투아리움의 차기 교황 내정자이자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이었다.
“조금 놀란 눈치네. 그럴 거야. 나도 그렇게까지 빨리 권력을 장악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맥캘리는 미묘하게 경직된 칼의 얼굴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맥캘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녀석이 선정한 성지는 어떤 곳이지?”
맥캘리는 즉답을 하는 대신 몇 가지 유추할 수 있는 대답을 늘어놓았다.
“숫자는 확실히 적지만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각 국가에서 어떻게든 수호하는 곳이지.”
주어진 정보는 얼마 없지만, 머릿속에서는 쉽사리 답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미 칼이 정보를 한 번 이상 접했으며, 발을 내딛기까지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각성의 샘, 리스벨리오 폰테.
진리의 폭포, 게스턴 비블리오.
바로 고대 시절의 힘을 간직한 마도 유산이었다.
파르르르.
정답에 도달한 칼의 심홍색 동공은 미칠 듯이 흔들렸다.
마도 유산을 성지라는 이름으로 탈환하겠다는 것은 곧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미친 새끼였어.”
“알고 있었잖아. 그런 놈이란 거. 정세를 보면서 결정을 내리겠지만 정답이 없다 싶으면 여왕 폐하께서는 차선책으로 백기를 들 생각도 하고 계셔.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어. 녀석들의 신성 군단이 움직이는 그 순간을…….”
“멍청한 놈들.”
단순히 지켜본다고 한들,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서둘러 연합군을 편성해 데제스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맥캘리는 평소와 달리 진지하면서 날카로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알테어를 정복했다고 해서 만족했나? 제자야. 이미 더한 무대가 마련됐다고.”
“너가 여기에 온 이유는…….”
“첫 번째는 제자를 살리기 위해서, 두 번째는 이실리아의 특사로서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어. 목적은 에클라 세트의 규합. 여왕 폐하께서는 칼리언트 슈타크와 에클라 세트의 결합으로 데제스의 야망을 저지하고 싶어 하셔.”
* * *
뿌우우우우.
전의를 들끓게 하는 뿔피리의 소리에 산크투아리움의 깃발을 내건 성기사단들이 일제히 집결했다.
라우크 산맥에 집결한 숫자만 해도 무려 3만으로 그들의 눈빛은 무척이나 험악했다.
석장을 들고 그들을 바라보던 교황, 이반 2세는 엄숙한 표정으로 선포했다.
그동안은 데제스가 그의 대행으로 이들을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사기를 끌어 올리는 차원에서 그가 몸소 나섰다.
“그동안 나는 어리석은 이단들을 교화시키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자비에도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지를 토대로 해괴망측한 망상을 꾸미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묵인할 것인가!”
“거절한다!”
“거절한다!”
그들은 단합하여 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저릿저릿!
그 함성에 이반 2세는 피부가 미미하게 떨렸지만, 쉴 새 없이 연설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단행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엄숙한 신의 심판을!”
“엄숙한 신의 심판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이반 2세는 숨이 막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가까스로 약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기도가 끝난 후 성전이 개막될 것이다. 모두 합심하여 기도하도록 해라.”
그의 선포에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적이 길어질 때, 이반 2세는 그런 병사들을 살피다가 곧 계곡 부근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콰직! 콰직!
거대한 동굴 안에서는 엄청난 크기를 한 그림자가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파르르.
이반 2세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가까스로 입을 뗐다.
“데, 데제스 님. 식사 중 죄송합니다. 연설은 끝이 났으니 진군의 목표를 정해주십시오.”
그러자 거대했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데제스가 으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 갑주를 걸치고 있던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차갑고 냉소적으로 보였다.
“그래. 처음으로 정복할 곳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