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칼이 머물고 있는 곳은 마나 연공식을 통해 진입한 자신의 체내이자, 심상세계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숨에 칼을 즉사에 이르게 만드는 파편이 있었다.
파편에 휩싸여있는 광포한 암피스바에나의 영혼.
그것은 필시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이 요 며칠 사이 고통을 겪은 것은 독 때문이 아니었다. 암피스바에나의 영혼이 칼을 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 몸을 들쑤시고 있었던 것이다.
‘……이딴 녀석들한테 당하고 있었다는 게 열 받는군.’
칼은 여러모로 분통이 터졌다.
맥캘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필시 녀석에게 도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전생 마왕 시절에는 마력을 팔다리처럼 조종할 수 있었다지만, 인간인 지금은 마나 연공식을 통해 마력을 통제해야 했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마나 연공식일까?
까놓고 말하자면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칼은 아직 스승인 맥캘리보다 마나 연공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정해졌다.
‘뛰어넘어주지. 맥캘리.’
우웅! 우웅!
가까스로 감정을 통제한 칼은 서킷을 통해 손실된 기로를 강제로 연결했다.
지금부터는 저 파편을 부수는 것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암피스바에나의 영혼은 그런 칼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네놈은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
그것은 자신을 죽인 것에 대한 강렬한 격노.
그 여파로 칼의 몸이 다시금 독기에 휩싸였다.
주륵!
견뎌낼 여력이 전혀 없던 몸은 모공 곳곳에서 독기가 흘러나왔고, 입에서는 한 움큼의 피를 흘렸다.
엄청난 격통에 온몸이 찌부러질 것 같았지만, 칼은 인상 한 번 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네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을 기점으로 마왕 벨리앗의 기운과 체내의 독기가 부딪쳤다.
동시에 마치 쏟아지는 격류를 바다가 가뿐하게 집어삼키는 것처럼 독기가 빠르게 소멸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걷잡을 수 없는 마왕의 마력에 암피스바에나의 영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움찔거렸고.
전신에 붉은 기운이 감돌던 칼은 자신의 사념을 그에게 전달했다.
“이해했다. 인간으로서 마왕의 힘을 통제할 방법을…….”
[크하하하하, 허세가 심하구나. 인간. 네놈이 날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해! 네놈의 육신은 내가 가져주지.]
칼의 몸을 육신으로 삼아 부활을 꾀했던 암피스바에나는 쉽사리 물러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영혼의 힘을 크게 발휘해 강렬한 독기를 피우며 크기를 키웠지만.
꽈악!
칼은 단숨에 그 영혼을 으스러질 정도로 쥐어 잡았다.
[무, 무슨?!]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믿을 수 없는 힘에 크게 당황한 암피스바에나는 동공을 부릅떴다.
스스스스스.
몸에 축적되기 시작한 마나를 천천히 각성시키고 있던 칼은…….
“사라져라. 쓰레기.”
한마디만을 남기며 트리거를 발동했다.
콰아앙!
[크아아아아악!]
격렬한 붉은 마력의 파장에 영혼의 절반이 파괴된 암피스바에나는 몸이 부스러지고 있는 와중에 중얼거렸다.
[네, 네놈. 대체 정체가?]
“…….”
구태여 대답을 할 가치조차 못 느꼈는지 칼은 시선조차 건네주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자태,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충만한 심홍색의 눈빛.
단지 그것만으로 암피스바에나는 깨달았다.
저것은 절대로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무언의 압박 속에 암피스바에나의 영혼은 사라졌다.
스스스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칼을 악질적으로 괴롭힌 독기가 모조리 증발됐고, 그 자리를 흉포한 마력이 점거했다.
화아아아악!
그것은 독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모든 걸 파괴할 듯이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날 쓰러뜨리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건가.”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기운에 맞서기 시작했다.
* * *
콰앙!
이변은 갑자기 일어났다.
“젠장!”
칼에게 심법을 구사하고 있던 맥캘리는 느닷없이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칼의 몸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주륵.
그러나 충격은 피할 수 없었는지 그녀의 입에서는 한 움큼의 피가 흘러나왔다.
“장난 아닌데…….”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칼을 지켜봤다.
쿠구구구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칼의 몸에서는 짙은 적색의 기운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직! 파직!
콰앙!
주체할 수 없는 그 기운에 방안에서 형성했던 릴리의 결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교수님 피하세요.”
상황이 긴박해지자 릴리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제자 주제에 건방지네. 너 혼자서 어쩌게?”
스스스스.
맥캘리의 말에 릴리는 대답 대신, 즉각 다른 결계를 구사했다.
먼저 칼의 주변으로 삼각형 모양의 결계가 생성되며 칼의 마력을 차단했고, 그와 동시에 각종 결계가 중첩되며 칼의 마력을 통제했다.
“제, 제법이군.”
믿기지 않는 그녀의 실력에 맥캘리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교수님한테 배운 덕분이죠.”
“크흠. 아니 뭐 내가 가르친 거는 맞다만. 엄연히 페트로 그 양반의 마법이니…….”
지난 2년간, 우연히 파르테스 안에 있던 은폐된 페트로의 공방을 찾아낸 맥캘리는 그의 연구 자료를 복원해냈고, 그 마법을 릴리에게 전수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릴리의 재능이 결계를 생성하는 데 특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저한테 맡겨주세요.”
‘강해졌군. 정말 금방 커버린다니까.’
맥캘리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릴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안 나간다. 스승으로서 제자는 끝까지 지켜야지.”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금 칼의 마력이 요동치며 릴리의 결계를 부숴버렸다.
지잉! 지잉! 지잉!
릴리는 즉각 허공에 파문을 그리며 결계를 생성했지만.
크르르르르르.
입에서 심상치 않은 짐승의 소리를 토해낸 칼은 거침없이 팔을 휘저었다.
콰아앙!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그 손짓에 결계는 대번에 박살 났고, 칼은 마치 사냥감을 찾는 것처럼 발을 떼기 시작했다.
“위험해!”
당황한 맥캘리가 서둘러 마법을 시전하려고 할 때.
스윽.
릴리는 그 사이로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크아아악!”
눈앞에 사냥감이라고 인지했는지, 칼이 주먹을 뻗으려는 순간.
“적당히 안 하면 화낸다.”
콰앙!
릴리의 한마디에 조금의 이성이 남았는지 주먹은 애꿎은 벽을 박살 냈다.
그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방문까지 통째로 날려버리며 밖에 있는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카, 칼리언트님.”
“너, 너 괜찮은 거야?”
모두가 칼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두려워했지만.
릴리는 그 모습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더욱 진지한 눈빛으로 칼을 쳐다봤다.
“……돌아와, 칼리언트 슈타크. 이건 네 모습이 아니야.”
그리 말한 릴리나느 칼을 와락 껴안았다.
더 이상 결계를 형성하는 것은 의미 없다.
칼의 강력한 마나 브레이크는 어떤 것도 가볍게 타파해버릴 테니까.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작은 저항밖에 없었다.
오들오들.
그래도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는지, 작은 새처럼 몸을 떨 때.
툭.
칼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다.
“?”
무슨 일인가 싶어 릴리가 눈을 뜨며 고개를 위로 들자, 그곳에는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칼이 있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겁 없는 여자라니까.”
나른한 그 말투에 릴리는 칼이 이성을 되찾은 것을 깨닫고, 얼굴에 화색을 피우다 곧 샐쭉한 표정으로 답했다.
“쓸데없다는 건, 뭐야. 쓸데없다는 건……. 하여간 입이 문제라니까.”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안 무서워?”
“안 무섭다.”
망설임 없는 그 한마디에 칼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야. 지금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 긴장시켰으면, 미안하다고 할 줄은 알아야지.”
릴리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칼을 쳐다보다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아악!
아주 잠깐이지만 칼의 등에서 여섯 장의 날개가 돋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착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슬쩍 맥캘리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자각했다.
어째서인지 그들의 눈은 묘하게 음흉해 보였다.
특히 디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화악!
“떠, 떨어져. 바보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릴리는 뒤늦게 자신이 칼을 껴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재빨리 칼에게서 떨어졌다.
* * *
암피스바에나의 독기를 이겨낸 칼은 곧장 업무에 복귀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마틴에게 지휘를 맡기고 침대에서 강제로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 지루해지려는 찰나.
업무 보고로 와 있던 헤이젤은 아주 얄밉게 칼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사령관님. 그 아리따운 분은 사령관님의 여자입니까?”
“아닌데.”
칼은 즉각 부정했고, 헤이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2년간 본 칼리언트 슈타크란 남자가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좀처럼 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디아나나 레인은 시종이어서 그런지, 친근하지만 그녀들이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연인 같다는 느낌은 전혀 주지 못 했다.
반면, 릴리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렇기에는 느낌이 달달하다는 느낌이었는데. 혹시 이 인간, 첫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인간 같지도 않고 냉혈한이니까.’
“갑자기 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칼이 우드득 주먹의 관절을 풀 때.
움찔!
헤이젤은 황급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 사령관님은 혹시 릴리아나 님이 다른 남자랑 혼약을 맺는다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
칼은 입을 꼭 다물며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어라?’
그 모습에 헤이젤은 적잖이 당황했다.
평상시라면, ‘알바냐?’라며 고민은커녕 업무에 전념할 인간이 이런 애정 관계로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만.”
“…….”
칼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바로 그 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골똘히 해?”
움찔!
바로 그때 열려있는 문으로 릴리가 들어왔고 헤이젤과 칼은 깜작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 갑자기 왜 들어와?”
헤이젤과 칼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감췄고, 릴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왔는데. 딱히 비밀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아서.”
“크흠.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왔는데?”
칼은 드물게 헛기침을 했고 릴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출세하고 싶거든. 나 여기로 취직시켜줘. 자부하는 게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는데, 나 능력은 제법 출중하거든.”
뜬금없는 제안에 헤이젤은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고,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