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콰아아앙!
쇄도하는 붉은 오러가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키며 암피스바에나의 몸에 새겨졌다.
빠득! 빠득!
콰앙!
그 어떤 갑주보다 튼튼할 것만 같던 비늘은 산산이 깨져 흩어졌고 그틈 사이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네 녀석!]
그러나 녀석들은 고통을 호소하기는커녕, 양 머리를 움직여 일제히 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앙!
정면에서 날아온 일격을 칼은 비어벨을 들어 충격을 감쇄시켰지만.
쨍그랑!
불똥이 튀김과 동시에 비어벨이 부러졌다.
사아아악!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암피스바에나의 독이 칼의 피부에 주입됐다.
“쿨럭!”
칼은 가쁜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서 피를 토했다.
파르르르.
그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떨고 있는 다리를 쳐다봤다.
‘움직여.’
내면의 소리에도 팔다리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무리해서 쓴 검술의 여파와 중독으로 인해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앗!
몸 곳곳이 손상돼 큰 상처를 입은 암피스바에나는 두 개의 머리를 들이밀며 칼에게 말했다.
[크크크크크. 네놈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능히 우리를 집어삼켰겠지만, 네놈은 한낱 인간이야.]
[이제 저거 먹어도 돼? 아, 모처럼 강한 인간이라 맛있을 것 같아.]
스스스스.
그러나 그들의 말에도 칼은 쉽사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파고드는 독에 저항하기 위해 오닉스 스퀘어의 마나 연공법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간은 칼에게 있어서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근.
뛰고 있다.
심장이 그 어떤 때보다 격렬하게…….
머릿속으로는 마계를 멸망시켰던 마왕 벨리앗 시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꽈악!
그 장면을 상기한 칼은 주먹을 으스러질 듯 쥐었다.
당하고 있다? 내가?
최강을 자부하겠다고 한 칼리언트 슈타크가 한낱 쌍두룡 따위에게 당해 죽을 위기에 빠졌다.
[크하하하하 이 자식 표정 완전 죽이는데? 너 설마 우리한테 당하고 있어서 수치스러운 거냐?]
[케케케케 먹을 게 우리한테 져서 분한 표정을 짓고 있어.]
면전에서 굴욕을 주는 그 발언에…….
[다물어라. 암피스바에나.]
칼리언트의 입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맥캘리가 선물한 팔찌가 깨져나가며 붉은 마력의 파장이 지형 곳곳을 뒤흔들었다. 암반 곳곳이 쪼개져 지형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뭐, 뭐야?!]
[지, 지진이야. 지진!]
깜짝 놀란 암피스바에나가 서둘러 목을 뒤로 내뺐고, 그 순간 칼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끼릭! 끼릭!
콰앙!
일어난 이후.
가장 먼저 취한 제스쳐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몸을 보호해주던 슈미트의 갑옷을 스스로 벗은 것이었다.
싸늘한 냉기와 바람으로 인해 상반신에는 새하얀 성에가 뒤덮이려 했지만.
스스스스.
칼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심홍색의 마력이 단숨에 그것들을 녹여버렸다.
빠직! 빠직!
콰앙!
강대한 마왕의 마력이 근골을 크게 압박해 골격 자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암피스바에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놀이는 끝이다. 어떻게 죽여줄까?”
칼의 질문에 지능이 약간 모자란 한 개체가 칼을 힘껏 조롱했다.
[크하하하하하, 먹이가 우리보고 놀아준대!]
덥석!
그리고 그 순간.
약 1초도 안 되는 사이 허공으로 도약한 칼의 손이 암피스 바에나의 윗니를 손에 쥐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무게로 볼 때 절대 움찔거리지도 않을 것만 같은 암피스 바에나의 몸뚱이가 통째로 칼의 힘에 이끌려 왔다.
[뭐?]
당황한 녀석들이 동공을 부릅뜰 때.
콰아앙!
칼은 지체없이 암벽에 녀석들의 머리를 꽂아 넣었다.
엄청난 균열과 함께 암반에 뒤덮여 있던 눈과 바위가 암피스바에나를 짓눌렀다.
칼은 방금 전의 충격을 이용해 부숴버린 암피스바에나의 송곳니를 손에 쥔 뒤……
푸욱!
그대로 목 부근에 찔러 넣은 다음 기다란 몸을 타고 힘껏 달렸다.
[크아아아아악!]
붉은 오러와 뒤섞인 자신의 이빨이 몸을 엉망진창 들쑤시자, 암피스바에나는 방금 전과 달리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을 토해냈다.
오싹!
전투 중 칼과 눈빛을 마주한 지능 있는 개체는 공포에 질겁했다.
“저리 꺼져!”
결국 그 공포를 떨치지 못하고 입안에 머금었던 독액을 힘껏 분사했지만.
서걱!
콰아앙!
송곳니을 통해서 형상화된 붉은 오러의 참격, 헬 플레어가 독액을 가르며 단숨에 암피스바에나의 목 부근을 길게 찢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악!]
포효는 일파만파 더 커졌다.
조금만 더 힘을 줬더라면, 목이 잘려나갈 판국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암피스바에나는 결국 몸을 버둥거리며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다.
하나, 어림없다는 듯 칼은 힘껏 몸을 날려 반쯤 목이 잘린 개체의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쫘아아아악!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던 머리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목이 찢어져 두 동강이 났다.
[형! 네 녀석!]
믿기지 않는 형제의 죽음에 남은 개체는 울분을 토하며 칼을 노려봤다.
때마침 지면에 착지한 칼은 동강 난 머리가 품고 있던 독니를 발로 걷어차 부러뜨린 뒤, 토막 난 이빨을 다시 검처럼 쥐었다.
이로써 두 개체에게서 각각 독니를 탈취한 칼은 싸늘한 눈빛으로 남은 개체를 노려보며 말했다.
“눈깔아.”
[으아아아아악!]
분을 참지 못했던 녀석은 다시 한번 요란하게 난동을 치려고 했지만.
서걱!
칼이 휘두른 오러의 참격에 허무하게 머리를 떨어뜨렸다.
* * *
시련의 문 앞.
“사령관님 괜찮으신 건가?”
그와 동행하고 있던 헤이젤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스스스스.
“어?”
위쪽을 쳐다보니, 모든 것을 꽝꽝 얼려 부스러뜨렸던 프로스트 결계가 어느새 자연스레 사라졌다.
끼익!
그와 동시에 시련의 문이 열리며 맨몸, 상반신을 노출한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온몸 곳곳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에 깜짝 놀란 헤이젤이 다가와 부축하려고 했지만.
“나와.”
칼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팔을 들어 그를 물렸다.
“걱정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섭섭하다는 그 표정에도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련은 끝났다. 승전을 기려야 되니 너는 저것들을 꺼내서 영지로 가지고 올 준비를 해. 독을 품고 있으니까, 신관을 고용해서 봉인작업을 해야 할 거야.”
시련이 끝났다니? 정말?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 스스로 방안을 살피던 헤이젤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황동빛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더욱 소스라친 점은 그 거대한 입 사이로 짙은 녹빛의 맹독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잔뜩 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부글부글.
“으아아아아악!”
바로 눈앞에서 독으로 인해 끓고 있는 얼음을 본 헤이젤은 엉덩방아를 찍으며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멀찍이서 보니, 문 부근에는 거대한 뱀의 머리 두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헤이젤은 재빨리 입과 코를 막으며 칼에게 물었다.
“아, 암피스바에나. 맹독을 지닌 알테어의 악마. 서, 설마 이것을 해치운 겁니까?”
“알고 있었냐?”
칼의 무뚝뚝한 눈빛에 헤이젤은 말을 더듬거렸다.
“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슈, 슈타크 가문의 초대 가주님께서 해치웠다는 전대미문의 몬스터 아닙니까? 옛날에는 알테어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닌 이 녀석이었다고요.”
“아, 그래.”
‘슈타크 가문의 역사에는 이 녀석을 봉인한 내용은 수록하지 않았나 보군.’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 진실은 묘하게 달랐다.
이 점을 참고해봤을 때, 암피스바에나는 오직 슈타크 가의 혈족을 시험하기 위해 초대 가주가 봉인을 한 후 혈족은 대대로 암피스바에나에 대해서 함구한 듯 보였다.
‘진실이 아무렴 어때.’
중요한 것은 초대 가주가 준비한 시련조차 칼은 거뜬히 극복했다는 것이다.
칼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알테어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 거군.”
“지, 진짜입니까?”
칼의 말에 헤이젤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피곤하니까. 뒤처리는 맡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이젤이 절도 있게 예를 갖추자, 칼은 피식 웃으며 근처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 * *
“세, 세상에.”
헤이젤의 소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테어에 포진하고 있던 병사들이 대거 던전으로 진입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던전의 크기가 놀랐다.
그러나 칼에 의해 모든 함정들이 대거 제거했기에 안도하고 어렵지 않게 맨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쩌적!
프로스트의 결계가 사라졌음에도 얼마 안 가 모두가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던전 맨 밑에는 거대한 쌍두룡 암피스바에나의 절단된 머리와 육신이 비춰졌다.
“이, 이걸 칼리언트님 혼자 잡았다고요?”
“와아!”
던전의 최하층부.
모두가 칼과 암피스바에나가 벌인 격전의 흔적을 보고는 경악했다.
지형 자체를 망가뜨리는 인외의 강함.
정녕 이 괴물을 잡은 자가 우리의 사령관이라는 말인가?
딱히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계조차 측정할 수 없었다.
다만, 암피스 바에나가 그만큼 크고 두려운 존재였다.
화들짝!
뒤늦게 제정신을 되찾은 디아나는 즉각 헤이젤에게 달려갔다.
“칼리언트님은 어디 계신 거죠!”
“저기서 쉬고 계셔. 오지 말라고 하시는데.”
헤이젤이 인근 동굴을 가리키자, 디아나는 즉각 동굴 쪽을 향해 달려갔다.
“칼리언트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디아나가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오지 마.”
어둠 속에서 기척을 드러낸 칼이 나른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허리를 숙인 디아나는 왠지 모르게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맹독의 악마를 쓰러뜨린 후야. 몸 상태 괜찮은 거 맞아?’
평소라면 감히 품을 수도 없는 생각이지만, 불길함에 디아나는 즉각 라이트를 시전해 동굴을 환히 밝혔다.
갑작스런 빛에 눈이 부신 칼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너답지 않게 말을 안 듣네.”
탁.
그 한 마디가 떨어짐과 동시에 디아나는 들고 있던 완드를 떨어뜨렸다.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난 칼리언트의 온몸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든 데다 핏줄이 비정상적으로 팽창돼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상태로 소리쳤다.
“카, 칼리언트 님!”
“오지 마라. 중독되니까.”
“사, 사령관님!”
뒤늦게 사태가 급박한 것을 깨달은 건지, 마틴이 달려왔다.
“너, 너!”
“별거 아냐.”
주륵.
새삼스럽다는 표정과는 별개로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하아.”
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맥캘리를 불러와. 지금은 그 녀석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겠네.”
발설 직후.
스르륵.
칼은 그대로 눈을 감으며 의식을 잃었다.
* * *
근 수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알테어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칼리언트가 방위하고 있는 요새로부터 반경 20km 내의 몬스터들이 서식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눈이 쌓였던 지대 중 일부가 녹아내리며 맨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콘에게 있어서 이는 무척이나 희소식이지만 성을 방위하고 있던 괴츠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암피스바에나를 쓰러뜨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나저나 그 인간은 몸은 괜찮은 거야?’
현재 그의 마음은 무척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알테어 최강의 기사라고 불리는 칼리언트가 큰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누운 지 벌써 20일 가까이 지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야이씨! 안 비켜!”
성문 근처를 배회하던 중, 투덕거리는 소리에 괴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와 봐.”
그리고 강철의 의수로 주변 인파를 헤치며 소란이 벌어지는 곳을 살폈다.
그곳에는 연분홍빛 머리칼을 지닌 어린 영애가 검은 드레스와 모자를 걸친 채, 씩씩거리며 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다짜고짜 저 아가씨가 사령관님의 스승이라고 보내달라잖아요.”
“인마, 여기 인장 안 보여! 초청장 있잖아! 대체 왜 안 믿는 건데!”
어찌나 답답했는지, 맥캘리는 슈타크 가문의 인장이 박힌 초청장을 연신 흔들어 보였다.
“스승?”
괴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보다 한참 작은 맥캘리를 쳐다보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꼬맹이가 어떻게 스승이야? 초청장 위조니까 거들떠도 보지 마.”
“꼬맹이라고 하지 마! 그리고 위조는 뭔 위조야! 네가 무슨 감정사라도 돼!”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쳐오른 맥캘리가 다시 한번 빽 소리를 지를 때.
갸르르릉!
어디선가 달려온 바그로바가 그대로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바, 바그로바!”
잡아먹히는 건가?
긴장한 괴츠가 바그로바를 떼려고 했지만.
할짝, 할짝.
바그로바는 모처럼 만난 맥캘리의 얼굴을 혀로 연신 핥고 있었다.
“이놈 자식! 얼굴에 침 묻잖아! 그만해!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