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시퍼런 빛무리가 시야를 뒤덮었다.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감싼 순간, 시간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칼의 귓가에 낯선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은 슈타크가의 역사와 비보가 깃들어 있는 곳. 이 모든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 홀로 도전해야 된다.]
“바그로바, 쿠라빌.”
음성이 지목한 것이 영체화 된 자신의 신수들이란 것을 눈치챈 칼은 입을 뗐다.
그러자 칼의 주변에서 맴돌던 검은빛의 구체와 붉은빛의 구체가 칼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크르릉.
적색의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 바그로바.
히이잉!
두 개의 뿔을 가진 바이콘, 쿠라빌.
그들은 시련 중 들려오는 음성에 불만이 가득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이걸로 됐나?”
칼은 오만한 시선으로 고개를 추켜세우며 물었고 음성의 주인은 답했다.
[슈타크의 도전자로 받아들이지. 시련 도중 포기하고 싶다면, 스스로 문까지 걸어 나와야 할 것이며 한 번 빠져나온 자는 다시 도전할 수 없다.]
‘라마스와 키이라가 다시 도전하지 못 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슈타크가의 두 거물이 포기를 한 것일까?
뚜벅뚜벅.
호기심이 증폭됐지만, 어차피 앞으로 걸어가면 분명 그 답의 실체가 보인다.
스릉.
검집에서 뽑혀져 나온 비어벨에서 청아한 음색이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빛무리가 거두어지고 눈앞에 드러난 것은…… 새빨간 핏빛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엇을 인지하기 전에 몸에 이상 전조가 보였다.
왈칵!
칼은 식도를 역류하며 흘러나온 피를 토하며 비어벨의 검신으로 자신의 눈을 살폈다.
평소 짙은 심홍색의 홍채는 그대로였지만, 흰자는 완전히 충혈돼 있었다.
“독이군.”
상황파악을 마친 칼은 마나 연공법으로 체내에 있는 독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아직 소량이어서 그런지 독은 칼의 거친 마나에 금방 타버렸다.
싸아아아.
그와 동시에 칼의 전신에는 김이 피어올랐다.
“저 녀석이군.”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칼은 대기 사이에 매캐한 독을 섞은 실체를 찾을 수 있었다.
크르르르.
얼음의 공동에서 존재감을 내비는 것은 청광색으로 반짝이는 단단한 비늘을 갑옷처럼 두른 존재였다.
몸길이는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고 거대했으며…….
머리는 두 개인 쌍두룡이었다.
“……암피스바에나(amphisbaena)”
실체를 확인한 칼은 주먹을 연신 쥐었다 폈다.
암피스바에나.
그 몬스터는 그 외형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드래곤으로서 돌연변이로 취급돼 외면당해왔다.
슈타크가의 역사에서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이 유적이 생겨난 기록을 살펴봤을 때, 초대 가주가 이곳에 봉인시켜놓은 것으로 추측했다.
크르르르르.
독이 깃든 숨결을 내뿜던 암피스바에나.
그 두 개의 머리 중 하나는 곧장 칼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는 입을 뗐다.
[크크크 슈타크가의 머저리가 또 들어왔군. 지난번에는 계집이더니 이번에는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이야. 형.]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대화할 수 있는 지능은 있나 보군.’
[죽어! 슈타크!]
다른 머리를 가진 녀석 쪽은 상당히 성급한 성격을 가졌는지, 곧장 자신의 머리로 칼이 있던 얼음 지반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얼음 지반이 박살 나 쪼개졌고, 칼은 부서진 얼음 더미들 사이로 발을 내디딘 뒤, 검신에 붉은 오러를 둘러 그 개체의 목을 향해 내려쳤다.
키키키키키키킷!
카아앙!
하지만 비늘의 강도가 오러에 버금가는지, 불똥만 요란하게 튀길 뿐.
부서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크크크크크, 네 녀석 한 입 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데.]
제일 먼저 칼을 식별한 개체는 음산한 웃음을 내보이며 입을 쫙 벌리더니…….
콰직!
순식간에 칼을 삼켜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대로 물어뜯어 소화시키는 일만 남았다.
칼날보다도 예리한 녀석의 이빨이 갑옷을 파고들었지만.
콰드드득!
녀석의 이빨은 칼의 견고한 갑옷을 살짝 우그러뜨릴 뿐, 완전히 파고들지는 못했다.
‘슈미트 녀석에게 나중에 거하게 술을 사줘야 되겠군.’
칼은 남아있는 마지막 스크롤을 입으로 거침없이 쥐어뜯었다.
그와 동시에…….
화르르륵!
콰아아앙!
암피스 바에나의 입에서 거대한 불꽃이 분출되며 이빨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한 새끼를 집어삼켰군.]
순식간에 입안에 화상을 입은 녀석은 불쾌하다는 어조로 칼을 뱉어냈다. 온몸에 독액이 묻기는 했지만, 칼은 깃털처럼 가뿐하게 지면에 착지했다.
콰아앙!
물론 조금의 여유도 승낙할 수 없었는지, 암피스 바에나의 거대한 꼬리가 채찍처럼 칼의 몸을 강타했다.
콰앙!
공기마저 압축시켜버리는 그 일격에 칼은 온몸에 피를 흘리며 지면을 뒹굴었다.
“하아, 하아, 쿨럭!”
엄청난 격통에 칼은 힘겨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게어트너보다 훨씬 강해.’
콰앙!
그러나 여기서 꺾일 수 없었기에 칼은 억지로 몸에 기력을 불어넣으며 몸을 일으켜 매서운 눈으로 암피스바에나를 노려봤다.
[크크크크 다른 녀석들은 격차를 깨닫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던데. 넌 아닌가보네.]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슈타크!]
흉포한 네 개의 눈빛이 칼의 온몸을 더듬었지만.
“퉷! 끝이냐?”
칼은 입가에 검은 피를 토해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크크크, 오만하네. 슈타크 녀석들은 싸가지없고 흉포하기만 할 뿐이지. 이런 품격은 없었는데. 초대를 빼면 말이야.]
스르르륵!
오랫동안 대화가 궁했는지, 암피스바에나는 곧장 칼을 죽이기보다 서서히 압박하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왜 이곳에 갇혀있는지 알아?]
“몰라. 말해.”
[고민은 해봐도 되는데 말이야. 뭐 좋아. 우리는 한때 이 알테어를 지배하던 드래곤이었어. 이곳 주변을 서성이면, 아직 우리를 모시던 신전도 존재한다고. 이렇게 봉인된 된 것은 너희 슈타크 일족이 나의 위험성을 알아봤기 때문이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애완동물로 길들여졌다는 거냐?”
[그 입 닥치지 못해!]
콰아앙!
아까보다 성미가 급했던 또 하나의 머리는 곧장 칼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무언가 부서지는 전조는 없었다.
놀랍게도 붉은 오러를 두른 비어벨이 암피스 바에나의 이빨과 거칠게 충돌하며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예상을 초월한 칼의 저력에 공격을 한 개체는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고.
말이 많은 또 하나의 머리는 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후후후, 애완동물이라 그것도 어쩔 수 없네. 우린 녀석에게 패배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달리 하자면 녀석조차 우리는 죽일 수 없었다는 거야.]
스스스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은 한 개체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칼을 덮쳤다.
콰앙!
저릿저릿!
재빨리 검을 뺀 칼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지만.
콰앙! 콰앙! 콰앙!
암피스바에나는 굽이굽이 헤엄치듯 칼의 뒤를 바싹 따라붙어 일격을 가해왔다.
콰아앙!
그러다 녀석들의 머리가 칼을 꿰뚫어 버릴 듯 몸 전체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심하게 충격을 가해왔다.
“쿨럭!”
칼은 고통스러운 듯 피를 토해냈지만.
화르르륵!
녀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입안에 거대한 마나를 밀집하더니…….
콰아아앙!
그대로 독이 깃든 브레스를 토해내 지반 전체를 초토화하는 기염을 선보였다.
* * *
빠직!
균열이 일그러지는 소리에 암피스바에나, 쌍두룡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의 전황이면 그 조그마한 슈타크의 혈족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거늘, 브레스가 직격한 것은 바로 암피스바에나의 본체였다.
[어, 어째서 우리가?!]
[이건 말도 안 돼! 슈타크!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지잉!
그 대답을 대신 해주는 것은 암피스바에나 본체를 두른 심홍색의 서킷이었다.
브레스가 닿기 일보 직전.
기지를 발휘한 칼은 서킷을 통해 브레스를 모조리 암피스바에나의 본체에 흘려보냈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앙!
어떻게 된 일인지 온몸에 피를 흥건히 흘리고 있는 칼이 무너진 지반들을 발로 걷어차 치워버린 뒤,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보통이라면 기겁하고 도망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거늘. 어째서 이 인간은 이렇게까지 거친 눈빛을 보이는 것일까?
싸아아아.
그 거침없이 타오르는 심홍색의 눈빛에 암피스바에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거라도 된 것마냥 으스대지 마라. 나한테 한낮 도마뱀에 불과할 뿐이니까.”
지이이이잉!
칼의 팔찌에서 심상치 않은 마나의 빛을 감지한 암피스바에나 두 마리가 합심해서 브레스를 쏟아 부었다.
[뭘 해도 늦었어!]
거뭇하면서도 푸른 브레스의 파동에 칼은 비어벨을 휘두름과 동시에 트리거를 발동했다.
검신에 타고 흐른 붉은 오러는 순식간에 섬광이 되어 브레스와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서로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두 섬광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지만.
파앙!
콰직!
암피스바에나의 브레스는 머잖아 칼의 참격에 터져나갔고, 칼의 검격은 그대로 암피스바에나에게 긴 자상을 남겼다.
크아아아아앙!
[이건 말도 안 돼!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슈타크!]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비늘이 박살이 나자, 암피스바에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탁탁.
칼은 앞발 끝으로 지면을 두들긴 뒤, 입을 열었다.
“헬 플레어.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내 특성을 일깨운 뒤, 오러에 실어 보낸 것뿐이야.”
[이, 인간이 어떻게 이런 기운을…….]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에 칼이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인간이 아니라면?”
[무, 무슨 말장난을?! 너는 누가 봐도 슈타……?!]
말을 내뱉던 암피스바에나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떠올랐다.
정말로 이게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나인가?
자연의 마나를 가공해서 강해지는 인간과 달리 칼에게 내재 된 마나는 순수하면서도 그 성격이 지나치게 패도적이었다.
[저, 정체가 뭐냐?]
“내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 너를 쓰러뜨리고 이 알테어를 정복하기 위해 온 지배자다.”
지잉!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어벨의 검신에서 서킷이 잔뜩 구현됐다.
[무, 무슨 짓을 할 셈이야! 그만둬!]
콰아아아앙!
위기를 감지한 암피스바에나가 물러날 기미를 보였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칼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오러에 트리거를 각성시킨 거고, 지금은 서킷까지 추가한 일격이야. 위력이 어디까지일지 예상이 안 돼서 실전에 써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저리 꺼져!]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하지 못한다.
불길함을 느낀 암피스바에나의 두 머리는 다시 한번 합심해서 아까보다 커다란 브레스를 쏘아냈지만.
“볼텍스 브레이크.”
콰아아아앙!
칼이 트리거를 발동하며 비어벨을 휘젓자, 검신에서 튀어나온 서킷과 붉은 오러가 뒤죽박죽 브레스를 깨뜨리며 암피스바에나의 전신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