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삐걱!
기괴한 쇳소리와 함께 기사의 갑옷이 삐거덕거리며 자신들에게 고개를 돌리자, 부하는 딱딱한 안색으로 물었다.
“헤, 헤이젤님. 이건.”
“나이트 골렘이야. 던전 탐사를 방해하는 장해물 중 하나지.”
카카카카캉!
갑옷들은 들고 있던 서로의 창을 그물처럼 엮으며 헤이젤과 부하에게 공격을 가했다.
끼리리릿.
콰앙!
잽싸게 검을 빼든 헤이젤은 그중 한 명의 창을 검신으로 밀치며 궤도를 수정했다.
그 과정 중에 엄청난 불똥이 튀기며 끔찍한 마찰음이 빗어졌지만.
타앗!
헤이젤은 겨우 그것만으로 길을 만들어내며 부하와 함께 단숨에 자리를 이탈했다.
‘처음부터 이 정도 난이도라니?!’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찰이어서 퇴각을 하는 거지만.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저벅, 저벅.
길 끝에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사령관님. 위험합니다. 왜 또 혼자 와요!!! 이 양반아!”
걱정 반, 잔소리 반.
자신이 겪을 미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뱉는 소리에 칼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손목에 착용한 팔찌를 들어 보였다.
기이이이이잉!
심홍빛의 마나가 일렁이며 차칭된 팔찌는 곧장 터질 것처럼 기괴한 이명을 토해내더니…….
콰칭!
원형의 붉은 마력이 확산되며 퍼져나갔고, 헤이젤의 뒤를 쫓아오던 갑주의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콰르르르르.
콰앙!
더 이상 제 모습을 건재하게 유지하기 어려웠는지, 갑옷이 송두리째 분리되며 무너져 내렸다.
“하, 한 방에…….”
진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또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 사실에 헤이젤은 저도 모르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벅저벅.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어오며 헤이젤을 노려봤다.
싸아.
모든 것을 종식 시킬 것 같은 눈빛에 헤이젤은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떠올리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급한 나머지 제가 실언을…… 죄, 죄송합니다.”
“됐어. 나중에 패면 되니까.”
‘……맞는 건, 기정사실이냐!’
무자비한 답변에 헤이젤은 처량한 표정을 지었고 칼은 기사들의 갑주를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교한 검술을 구현할 수 있게 짜놓은 기동형 골렘이야. 변색 된 갑주의 색깔로 봤을 때, 꽤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
하지만 겨우 이것만으로 슈타크 혈족들이 던전 탐사를 포기한 것은 아닐 거다.
‘꽤 재밌는 게 있군.’
칼은 낭떠러지 같은 지면을 응시했다.
던전을 통해 내려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깊이.
“슈, 슈타크 가에서 키우고 있는 와이번을 이용하면 쉽게 내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헤이젤이 묘안을 내놓았으나 칼은 냉소적인 웃음을 띠며 반박했다.
“그렇게 쉽게 될 문제가 아니야. 볼래?”
콰아앙!
칼은 지면에 쌓여있는 갑주들을 걷어차 낭떠러지에 떨어뜨렸다.
“가, 갑자기 왜?”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쩌적!
밑으로 떨어진 갑옷 표면에서 갑자기 살얼음이 에이더니…….
빠직! 빠직!
콰아앙!
곧 갑옷들이 순식간에 얼음 파편이 되어 사라졌다.
“…….”
생물이 아닌 무생물이지만 살벌하게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풍경에 헤이젤을 비롯한 병사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칼은 마치 남의 일인 것마냥 입을 열었다.
“프로스트 결계야. 어떤 존재를 가둬두는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기어 올라와서는 안 되니까 이런 결계를 펼쳤겠지. 강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콰칭!
칼은 팔찌의 트리거를 발동했다.
“사, 사령관님!”
혹여 프로스트 결계가 깨질까 싶었던 헤이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떤 것도 타파할 수 있을 것 같던 강렬한 붉은 마력의 파장은 어째서인지…….
파지지직.
콰앙!
프로스트 결계를 깨뜨리지 못하고 강렬한 충돌음만 남긴채 소멸됐다.
“사, 사령관님이 일으키는 마나 브레이크로도 안 깨지는 겁니까?!”
헤이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약 반년 전.
아벤트로트의 마법 병단과 교착했을 당시 칼은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켜 마법사들을 단숨에 제압했었다.
또 파르테스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이 시대의 최고 결계학자였던 페트로 스타니슬라프의 결계도 자신의 마나 브레이크로 깨뜨린 전적이 있다.
그런 칼의 마나 브레이크가 이렇게 무용지물이 되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칼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어깨를 으쓱인 뒤, 설명을 이어갔다.
“고대의 마법사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몰라도 써클 마법에만 의존하는 지금의 마법사랑은 격이 다르다는 증거지.”
드물게 칼은 누군가를 칭찬하며 인정하기까지 했다.
스윽.
할 말을 마친 칼은 이내 눈매를 좁히며 프로스트 결계에 둘러싸인 지반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뭐가 있는 거지? 트리거를 10회 중첩시켜서 발동하면 깨뜨릴 수 있지만, 반동이 클 뿐더러 결계에 갇힌 ’무언가‘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무리야.’
“별수 없나.”
궁금하다면, 직접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마음을 먹은 칼은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는 던전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사령관님. 바깥에서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어떻게 할까요?”
헤이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은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 혼자 갈 거야.”
“아닛! 그건 안 되죠!”
“그럼 너만 따라오던지.”
‘으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저 똥고집 하나만큼은 진짜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걸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하니, 답답함에 가슴만 탕탕 두들겼다.
그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칼에게 합류하기 위해 발을 뗐다.
“지, 진짜 내려가시려는 겁니까? 위, 위험합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는 어떻게든 칼과 헤이젤을 붙들려고 했지만.
헤이젤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누굴 걱정하는 거냐? 요놈아.”
“…….”
‘방금 전에 자기도 걱정했으면서.’
맞지 않는 말과 행동에 부하가 빤히 쳐다보자, 헤이젤이 찌릿 노려보았다.
“불만 있냐?”
“아, 아닙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십시오.”
“그래.”
등을 돌린 헤이젤은 대충 손을 휘저으며 잽싸게 칼과 합류했다.
* * *
루드거는 말했다.
-누군지 딱히 꼬집지는 않겠지만, 기회를 준 녀석들은 전부 그 장소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그리고 전부 죽을 뻔했지.
여기서 언급한 그 장소는 아마 던전의 가장 밑자락일 것이며, 그 밑으로 진입하는 것은 던전 곳곳에 있는 함정을 돌파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
뒤죽박죽 엉켜있는 거미줄 형태의 얼음 지형에서는…….
끼에에에에엑!
투명한 얼음으로 조각된 괴조들이 거미줄 형태의 얼음 지형 사이를 자유롭게 날며 칼과 헤이젤을 쫓고 있었다.
자칫 발을 헛디디다가는 추락과 동시에 얼음 동상이 되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주르륵!
칼은 거미줄처럼 구성된 얼음 지반에 발을 미끄러뜨리며 엄청난 속도로 괴조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꽤나 치밀한 데다 교활하기까지 했는데.
쇄애애액!
끼에에에엑!
때마침 칼의 앞에 튀어나온 괴조는 날개를 편 채, 칼에게 전력으로 돌격해왔다.
카아아앙!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비어벨을 빼들어 괴조의 날개를 튕겨냈다.
녀석의 날개와 부딪친 비어벨의 검신이 응결되며 곧장 부서질 것처럼 보였지만.
쨍그랑!
과연 명검이란 이름을 과시하려는 건지, 비어벨은 순식간에 응결 저주를 깨뜨려버렸다.
콰앙! 콰앙!
그 뒤로 헤이젤은 자신과 칼에게 향해 날아오는 괴조들을 향해 순식간에 오러를 날려 파공성과 함께 깨트렸다.
“위험수당 챙겨주시는 겁니까?”
“얼마를 원하는데?”
“마틴의 두 배정도?”
“꿈 깨.”
칼은 피식 웃으며 곧장 허공에 붉은 서킷을 생성했다.
지이이이잉!
칼의 주변에서 순회하던 괴조들은 순식간에 이 서킷에 걸려버렸고, 칼은 지체없이 준비한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쇄애애액!
콰아아앙!
스크롤에 담긴 익스플로전 마법은 순식간에 괴조들을 조각째로 깨뜨려버렸다.
콰앙!
끼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칼은 비어벨을 지면에 꽂아 즉각 몸에 제동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칼이 멈출 줄 몰랐던 헤이젤은 크게 당황하며 그대로 칼을 앞질러 갈 뻔했지만.
꽈악!
칼은 헤이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손목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아파!”
손목이 으스러지는 충격에 크게 놀란 헤이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잠시 후.
거미줄 형태의 지형에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허억, 허억!”
예상치도 못했던 지형과 몬스터의 출현에 헤이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한 번 정도 죽을 뻔했어.’
그것은 괴조의 습격으로 인해 미처 발을 헛디뎌 프로스트 결계에 떨어질 뻔한 상황으로 칼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거기서 죽을 뻔했다.
반면 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신 뒤, 남은 물통을 헤이젤에게 던졌다.
타악.
물통을 받아든 헤이젤은 찰랑찰랑 흔들며 칼에게 말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목을 축인 뒤, 헤이젤은 처량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사령관님.”
“왜?”
“……저희 올라갈 때, 어떻게 올라갑니까?”
내려올 때야 쉬웠지만, 이런 지형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올라가면 되지.”
“…….”
하지만 칼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듯 보였다.
괜스레 투정을 부려봤자, 돌아오는 것은 허무함밖에 없는지라 헤이젤은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 건가요?”
“굳이 따지면, 슈타크가의 기원 혹은 비전이겠지. 내 입장에서는 과거의 영광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애물단지일 뿐이지만.”
“……저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사령관님. 솔직히 말해서 가문의 자리에 그렇게 욕심이 없는 겁니까?”
“욕심이라 할 것도 없어. 필요해서 쟁취하려는 것뿐이지.”
차후 세계에 들이닥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최강의 가문의 힘을 손에 넣는 것은 필수였다.
칼은 기왕 포부를 밝힌 만큼 자신의 의사를 똑바로 밝혔다.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못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난 단지 내가 할 수 있다고 증명하려고 온 것뿐이야.”
“…….”
헤이젤은 다시 한번 칼의 압도적인 프라이드에 말을 잃었다.
대개 사람이라면 난관을 만나면, 절망하기 마련인데.
칼은 어떤 상황에서든 시종일관 ‘내가 못 할 리가 없잖아?’라고 반박하는 뉘앙스를 주고는 한다.
그 사실에 절로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러나 웃음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던전의 하층부.
꿀꺽!
헤이젤은 침을 삼키며 각종 봉인 술식이 적힌 철문을 보고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저 문을 여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게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은 서슴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사, 사령관님. 안 됩니다.”
“헤이젤 물러서 있어. 문을 여는 즉시 닫는 거다.”
칼 역시 문 안쪽에서 풍겨오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는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스윽!
하지만 망설임은 없다.
칼은 목에 걸려있는 호박, 소피코리를 통해 문 앞에 있는 술식들을 쳐다봤다.
“###”
봉인 술식의 해법이 보이자, 칼은 지체 없이 요정어를 내뱉었고.
끼이이익!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무거운 철문에 빗금이 서리며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개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