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후우”
심호흡을 한다.
척!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쳐다본 곳에는…….
크르르르.
붉은 갈기를 가진 수사자, 바그로바가 살벌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두근두근.
괜히 맥박만 빨라졌다.
“후우.”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기에 제이크는 결심했다.
“이만 가지. 사령관님이 주무시는 관계로 키이라님에게는 다음에 와달라고.”
“뭐하시는 거예요! 남자 둘이 구시렁거리기나 하고 어휴!”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레인이 답답한 나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와, 왔냐? 우리의 구세주.”
그녀의 야단에 제이크는 눈을 반짝였다.
이 알테어에서 저 무시무시한 사자를 말로 다스릴 수 있는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레인이었다.
“정말. 구세주는 뭐가 구세주에요.”
레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래를 도리도리 저으며 바그로바에게 다가갔다.
“바바. 계속 방해하면, 밥 없어.”
끼잉!
살벌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그로바는 불쌍한 신음 소리를 냈다.
‘……저게 말이 돼.’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이크와 병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귀한 주인만을 섬긴다는 최고등급의 신수, 노빌레 레오네.
그 중 칼리언트를 섬기는 바그로바는 이곳 알테어에서 수많은 몬스터를 학살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 기세가 어느 정도 대단하냐면, 와이번조차 바그로바의 기척만 감지하면 사냥을 포기한 채, 뒤돌아설 정도였다.
그런 괴물 같은 놈을 말 한마디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다니…….
제이크는 병사의 귓가에 수군거렸다.
“슈타크가는 시녀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4성급 검술 실력에 고블린 머리는 그냥 쥐어뜯을 정도로 강하다는데 사실이야?”
빠직! 빠직!
“그걸 제가 어떻게 해요?!”
레인은 이마에 핏대가 가득 솟구친 상태로 제이크를 쏘아봤다.
홱!
그 시선이 무서워 제이크는 시선을 회피했고, 레인은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조곤조곤 자고 있는 칼에게 말했다.
“칼리언트 님. 키이라 님께서 왔습니다.”
깜박.
그녀의 부름에 칼은 눈을 깜박이며 눈을 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찌뿌듯한 몸을 풀던 칼은 몸을 일으켜 발길을 옮겼다.
스스스스.
칼의 움직임에 맞춰 바그로바의 몸은 마치 증발이라도 된 것마냥 사라졌다.
‘언제 봐도 신기하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지만, 그동안 줄곧 바그로바를 키워온 레인에게도 지금의 장면은 무척 신기한 것이었다.
그것은 칼이 보유하고 있는 바이콘, 쿠라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영체화로…….
바그로바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영체화를 터득하더니 줄곧 칼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힘이 부족하다고 성내에서 머문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칼에게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것이 싫어 필사적으로 익혔다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들려올 정도였다.
잠시 후.
늦은 점심에 맞춰 칼은 식탁에서 키이라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크르르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는 바그로바가 거대 들소의 대퇴부의 살점을 쫘악 뜯고 있었는데.
살벌한 광경과 달리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거 키울 수 있는 거였나 보네.”
키이라도 그런 바그로바가 신기했는지 나이프를 썰던 것을 멈추고 잠시 지켜보았다.
“그래서 고양이 구경하러 온 거야?”
칼은 진작 식사를 마쳤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는 중이었다.
키이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게 어떻게 고양이냐? 그나저나 입 엄청 짧네. 그렇게 먹고 키는 어떻게 컸냐?”
“관리의 일종이지. 먹어야 할 때는 억지로라도 먹어.”
“여전히 귀염성이 없네. 요 녀석은?”
기사 임명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여전히 무뚝뚝했다.
딱히 혈육 간의 정이 없지만, 키이라는 어째서인지 칼에게만큼은 서운함 감정을 느꼈다.
“약 두 달 후. 왕성에서 외교 관료를 비롯해 타국의 귀족이나 황족이 초대되는 자리가 있을 거야. 그 자리에 너도 초청받았으니까 가보라고 하더라고.”
“너는?”
“물론 나도 갈 예정이야. 참고로 라마스 오라버니와 너와 나를 제외하면 가문의 일원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 아버님이 결정지으신 거니까.”
이미 루드거 슈타크 안에서는 계승자들의 다툼은 삼대 구도로 나누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칼은 진중한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슬아슬하겠군.”
“무슨 계획이 있나 보지?”
“알테어의 고대유적을 탐사할 예정이야. 준비는 이미 끝마쳤고.”
“…….”
칼의 한 마디에 키이라의 표정은 놀랄 만치 경직됐다.
“그, 그걸 어떻게 네가 알고 있어?”
“아마 라마스와 키이라 너도 도전을 했겠지.”
“…….”
결과는 굳이 물어볼 필요 없다.
루드거는 도전한 이 중에 성공한 이는 한 명도 없다고 확답했다.
물론 유적 탐사에 참가한 혈족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가문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라마스와 키이라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칼의 말에 키이라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다소 호흡 곤란을 겪은 것 마냥,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칼에게 말했다.
“가지 마. 죽을 수 있어.”
“갈 거야.”
콰앙!
키이라는 탁자를 거세게 내려치며 말했다.
“질투심 따위가 아니야. 아버지가 다른 형제에 비해 너한테 애정을 가지는 것도 알고 있어!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거기에 도전했다가는 죽을 수 있다고!”
“…….”
그녀의 언변에 칼은 조금 당황했다.
슈타크 일족.
그들은 전투에 특화된 흉포한 특성과 강대한 무골을 지니고 태어나는 혈통이었다.
태생 때부터 내정된 특성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살아남지 못한 혈족들은 가문에서 배제됐고 혈족들은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왔다.
그런 잔혹한 환경 속에 태어났기에 혈족 간의 우애는 있을 리 만무했다.
한데, 그런 혈족의 특징을 지닌 키이라가 자신을 걱정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스윽.
칼은 팔짱을 끼며 곧장 키이라에게 말했다.
“내가 거기에 가는 것은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야. 큰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그럼.”
“두 가지 이유가 있어. 그 중 첫 번째는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야.”
“…….”
거침없는 칼의 의사 피력에 키이라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냥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만나면 만날수록 무엇이든 진심으로 맞서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다 됐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내가 죽으면 이 알테어를 책임져줘.”
“으윽! 역시 귀염성 없어. 그런 것 말고 유적 탐사에 손을 빌려달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키이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칼을 쏘아봤다.
“준비는 이미 끝마쳤다고 했어.”
“무슨 소리야? 네가 없을 때, 알테어의 방위는 누가 책임지라고?”
“마틴이 할 거야.”
“……아무리 에클라 세트라지만 그 정도로 믿는 거야?”
“직접 대결해보면 깜짝 놀랄걸. 무력뿐만 아니라 통솔력이나 지휘력도 말이야.”
…….”
키이라는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팔 한 짝이라도 뺏을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은 분명 그 궤가 판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틴은 라마스와 키이라를 넘었을 수도 있다.
“불공평하네. 별의 재능이란 게…… 그리고 그 별을 다스릴 수 있는 패도의 재능도 말이야.”
키이라는 마틴을 넘어서 그를 부하로 두고 있는 칼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인정했으면 나에게 가주 자리를 양보할 거야?”
“웃기지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정해진 선은 있었는지, 키이라는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
피식.
칼은 오히려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홍차를 들이켰다.
‘어째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키이라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칼에게 말했다.
“그래서 유적 탐사는 누구랑 갈 건데?”
“헤이젤과 그 휘하 기사단을 데려갈 거야.”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게. 유적을 가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뭐야?”
딸칵.
찻잔을 내려둔 칼은 흥미가 치솟는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근거는 없지만 직감이야. 거기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알테어를 평정했다고 할 수 없어.”
* * *
유적 탐사를 앞두기 직전.
새벽녘에 칼은 슈미트의 공방에 들어섰다.
꼭 전해줘야 될 물건이 있다는 그의 부탁 때문에 칼은 공방에서 흑맥주를 들이켜는 중이었다.
쨍그랑!
맞은편에서 칼과 맥주잔을 부딪친 슈미트는 코가 벌게진 상태로 칼에게 말했다.
“긴장도 안 되는 거냐? 너 또 무시무시한 곳 간다며?”
“딱히.”
칼은 무덤덤하게 흑맥주를 들이켰고, 슈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켜 거대한 함을 들고 왔다.
“뭐야? 이게?”
칼이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볼 때.
슈미트는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피 더럽게 많이 흘리는 유리 몸뚱이잖아. 다칠까 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제작해봤지.”
‘아직도 유리 몸이긴 하지.’
정확히는 아직까지 마왕의 마력을 몸이 감당할 수 없어 그 힘을 꺼낼 때, 반동으로 출혈이 일어나는 것이다.
끼익!
사소한 생각은 제쳐두고 칼은 슈미트가 내민 함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적색 빛이 감도는 갑주가 은은히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명검 제작도 해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잘 만들어지지는 않으니 장기를 살려봤지.”
“이걸로 충분해.”
칼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함을 닫았고, 슈미트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살아 돌아와야 된다.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잠이 안 와.”
칼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 위에 맥주잔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취했군. 이렇게 약해서야 원.”
그의 말에 슈미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곧장 반박에 나섰다.
“이 자식! 기껏 걱정해줘서 말해줬건만 감히 주량으로 이 드워프와 승부하려고 해?!”
결국 두 사람 사이에서 주량 대결이 펼쳐졌다.
다음 날.
승자인 칼은 무덤덤하게 유적 탐사에 나섰고, 고주망태가 된 슈미트는 디아나의 간호를 받으며 골골 앓아야 했다.
* * *
슈타크가에서 오랫동안 알테어를 사수하면서 지켜온 유적.
얼어붙은 계곡 사이로 드러난 거대한 동굴은 왠지 모를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하기 전.
화륵!
헤이젤은 횃불을 들고 병사와 함께 사전답사를 진행 중이었다.
구태여 기사단의 중추 중 한 명인 그가 이렇게 스스로 답사에 나선 것은 칼의 막 나가는 성정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에 처하면, 알테어가 크게 들썩일 수 있는 것을 뻔히 아는 작자가 무모하게 앞장서서 그냥 가면 되지 않냐는 소리를 늘어놓으니…….
헤이젤은 결단코 안 된다며 스스로 발 벗고 답사에 나서겠다고 해버렸다.
“하여간 막무가내로 나가는 상사를 두면 이 점이 고생이라니까.”
“헤, 헤이젤 님 다 들립니다.”
그와 대동한 병사는 혹여나 칼의 귀에 들릴 새랴.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 뒷담 가지고 뭐라고 안 그래. 반 정도 쥐어 터지기만 할 뿐이지.”
“…….”
남들한테는 그 반 정도 쥐어 터지는 것도 목숨의 위기였다.
하지만 농담도 거기까지였다.
본격적인 답사에 나서자, 헤이젤은 특유의 관찰력으로 유적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유적이라고 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지만, 이곳은 마치 하나의 신전을 보는 것마냥 인위적으로 설계돼 있었다.
그 느낌은 마치 폐쇄된 무덤 안을 걷는 기분이었는데.
조심히 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끼익!
콰앙!
불길한 소리가 헤이젤과 병사의 고막에 와 닿았다.
“어머나.”
헤이젤이 놀라서 입을 벌린 순간.
우우웅!
양쪽에 줄지어진 기사 석상들의 투구에서 안광이 방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