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화르르륵.
콰아앙!
갑자기 들이닥친 홍염은 강물처럼 굽이치며 샤텐의 진영을 뒤덮었다.
타닥! 타닥!
갑작스런 기습에 병사들은 직격한 화염에 뒤덮여 새까만 잿더미가 되었다..
일반 화재나 단순한 마법 공격이었다면, 체계 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인 만큼 일제히 화재를 진압하고 경계태세를 펼쳤겠지만.
서킷을 따라 굽이치는 마법, ‘플레임 월’은 방심한 병사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열에 아홉은 이 기습에 목숨을 잃었다.
크워어어어어어!
플레임 월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난 것은 아이스 트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콰직! 콰직! 콰직!
“끄아아아악!”
“살려줘!”
통제하는 병사마저 숨이 끊어지자 아이스 트롤들은 즉각 구속을 풀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눈 앞에 펼쳐진 지옥에 아울 아비스는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의 옆에서 말했다.
“잘 봐. 네가 구축했던 게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오싹!
칼의 발언에 아울은 안색이 새파래졌다.
루콘의 광견은 그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사건을 벌이는 놈이라고 여겼다.
물론 그것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울은 두 가지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 남자가 사고를 벌이는 범위.
이 남자는 한 나라가 이런 도발을 감행하더라도 분명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히는 남자였다.
타닷!
전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해진다는 것을 눈치 챈 지휘관들이 불길이 닿지 않는 자리로 대피했다.
푹푹푹푹!
그러나 거기에는 칼의 기사단 ‘플레임 게일’이 활을 겨누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아울이 오인한 두 번째 문제.
칼리언트 슈타크는 지우리고 한 건 그 누구보다 주도면밀하고 깔끔하게 지운다는 것이다.
“…….”
모든 사실을 깨달은 아울은 절망에 빠졌다.
‘이런 미친놈을 어떻게 이겨? 형님들이라고 이길 수 있을까?’
암살자 가문인 아비스 후작의 혈족이 복수를 결의한다고 해도 칼의 목에 닿지는 않을 것 같았다.
“크크크크, 근데 괜찮겠어? 변종 트롤들을 하나라도 놓쳤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있겠어?”
어차피 다 틀렸다.
하지만 모든 일이 결국 칼의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크워어어어어!
그의 예상대로 불길에서 살아남은 아이스 트롤이 이 지대를 이탈하려고 했으나.
“으랏차차차!”
콰아앙! 쾅! 쾅!
괴츠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강철의 의수로 트롤의 안면근육을 박살냈다.
헤이젤은 남은 쇠사슬을 들고 트롤들 사이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그들의 다리를 연결했다.
콰앙!
쇠사슬로 인해 균형을 잃은 트롤들은 그대로 자빠졌다.
서걱!
헤이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마리씩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았다.
크워어어어어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로 나가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괴츠와 헤이젤의 눈에 벗어난 트롤들은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으나……
서걱! 콰직!
서걱! 콰직!
마력 증폭과 폭풍검을 응용한 마틴의 검에 머리가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쿵! 쿵! 쿵!
그리고 마치 폭풍을 만난 것마냥 목이 없는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샤텐의 수도에서도 보기 힘든 막강한 전력에 놀란 아울은 의지를 상실한 얼굴로 주저리주저리 혼잣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 수족이 될 기사단의 힘이다. 이곳 알테어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지. 키메라 따위에 의지하는 너희는 애초에도 상대가 되지 않았어. 나중에 몬타이한테 전해주지 않겠어?”
“네놈 끝까지!”
아울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칼을 쏘아본 순간.
콰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찌른 비어벨이 아울의 복부를 정확히 관통했다.
“쿨럭!”
갑작스런 기습에 아울은 크게 놀라며 몸속의 피를 쏟아냈고 칼은 입을 열었다.
“무능해서 죄송하다고. 아, 상관없겠구나. 어차피 지옥에서 만날 테니…….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네 녀석!”
아울은 몸을 꿈틀거리다 경련을 일으켰고.
푸욱!
칼은 그의 복부에서 비어벨을 뽑아내며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나갔다.
* * *
샤텐의 진영을 기습한 지 약 하루가 지났다.
병사들은 일찌감치 전멸시켰지만, 크림슨 게일을 괴롭힌 것은 끝을 모르고 재생을 하는 트롤과의 사투였다.
하지만 그것도 칼이 전장에 참전하면서도 판도가 크게 뒤바뀌어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었다.
거침없이 동족들을 토막 내버리는 칼의 기세에 기겁한 아이스 트롤들이 줄행랑을 쳤고, 크림슨 게일은 단숨에 아이스 트롤들을 몰아붙여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중상자는 있었지만, 이번에도 사망자는 없었다.
“전멸했습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마틴은 스스로 보고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냐?”
아이스 트롤과의 사투가 지쳤는지, 칼은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틴.”
칼의 부름에 마틴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뉘앙스로 보아 평소처럼 편하게 해도 된다는 느낌에 마틴은 존대를 생략하고 말했다.
“어.”
“이걸로 리히트의 원한이 풀리지 않았을까?”
칼은 머리칼을 이마를 뒤로 넘기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픈 거야?”
그 모습이 무척 애잔해 보여 마틴은 그런 질문을 던졌고, 칼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답했다.
“모르겠어. 그냥 가슴이 답답해.”
엄청난 전술로 적군의 진영을 휩쓴 남자가 이런 사소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더 곤혹스러워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리히트는 분명 만족하고 있을 거야. 내가 그때, 그 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은 리히트의 아쉬움밖에 없었어.”
그것은 좀 더 나은 미래를 못 본다는 아쉬움이었다.
리히트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땅, 알테어는 결국 번영하게 될 거란 것을…….
속된 말로 다른 이들이라면 코웃음 치며 신랄하게 욕을 날렸겠지만, 리히트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피식.
마틴의 위로에 칼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부하의 기대에 보답하는 게, 응당 내가 해야 될 일이겠지.”
말을 마친 뒤, 칼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걸어갔다.
“안 쉬어도 돼?”
앉아 있는 시간은 고작 해봐야 5분밖에 되지 않았다.
“바빠.”
목표가 생긴 발걸음은 무거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었다.
* * *
샤텐의 수도, 네오웨일스.
황궁, 모나크시아에는 한 남자가 호흡을 갈무리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방안의 존재에게 그의 방문을 알렸다.
“윌리엄 백작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문 안쪽에서 허가가 떨어지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고, 윌리엄 백작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한 남자가 액자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 중이었다.
액자 안에 담겨진 그림은 흑색 연지를 입술에 바른 여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고딕풍의 검은 드레스 위로는 금발과 연녹색의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급하게 날 찾아온 용건은?”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가면을 착용하며 등을 돌렸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서 외모를 유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고운 피부에 곱슬진 금발은 그가 어떤 누구보다 고귀한 태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해주었다.
“아, 아울 아비스와 그 휘하 부대가 당했습니다. 실험 중이던 그것도 현재 소실돼버렸습니다.”
윌리엄 백작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고, 가면의 남자는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예상외군. 그 정도의 키메라를 양산하면 분명 타국의 영지는 손쉽게 정벌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한테 당한 거지?”
“배후를 찾고 있습니다.”
피식.
가면의 남자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질문을 바꾸지. 배후가 누구라고 추측하고 있지?”
꿀꺽!
심중을 장악하는 그의 언변에 윌리엄 백작은 고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루콘의 광견이라고 불리는 남자.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입니다.”
“그 남자는 분명 파르테스를 이제야 졸업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알테어의 전장에서 내 부대를 전멸시켰다고?”
“믿기지 않지만,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진 남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알았으니 돌아가 보게. 대책은 조금 있다 논의하지.”
“아, 알겠습니다.”
윌리엄 백작은 예를 갖추며 밖으로 물러났고.
가면의 남자는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흔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비스 가문의 어쌔신 마스터가 그를 암살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볼 거라고 생각하나?”
겉으로 보기에는 혼잣말이지만.
어디선가 숨어있는 기척의 주인이 곧장 질문에 답했다.
[그는 에클라 세트와 버금가는 힘을 가진 남자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알테어 요새에 있는 사령관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 남자에 대해서만큼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시킨다면?”
[저는 저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가면의 남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올리며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군. 아직 너를 잃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 몬타이를 건드린 것은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지. 루콘의 광견.”
* * *
시간은 시시각각 흐른다.
낙엽이 지며 가을이 찾아오고 모든 것이 시들며 혹독한 겨울이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금 봄이 찾아온다.
휘이잉!
물론 알테어야 더 추운 겨울이나 덜 추운 겨울로밖에 구분이 되지 않지만.
분명 변화는 존재했다.
히이잉!
마차를 타고 알테어 요새를 순방하던 키이라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부서지고 금이 가던 도로는 완전히 정비돼 깔끔했고.
“하하하하.”
골목 곳곳에는 아이들이 서로 눈뭉치를 던지며 활발하게 웃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오들오들 떨며 밖에 나오는 것을 꺼림칙해 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늘 고단한 삶에 지쳐 보이던 알테어의 병사들도 늠름하고 굳건하게 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인구수는 얼마나 늘었지?”
그녀는 자신을 호위하며 기사단원들과 대동하고 있는 크림슨 게일의 부기사단장, 마틴을 쳐다봤다.
“이전보다는 1.5배 늘었습니다. 대다수는 나라에서 쫓겨나거나 힘이 없는 이들이 유입된 거죠.”
“약자에게는 관대하고 강자에게는 강하다는 건가?”
강자에게도 강하고 약자에게도 강하는 슈타크가의 신념과 다소 맞지 않지만.
“……멋진데.”
키이라는 그것이 제법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이라의 내방 소식에 알테어는 상당히 분주했다.
가문의 정통규율에 따르자면 혈족이 혈족을 맞이해야 되지만.
정작, 이 알테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한 듯 전투행정관 제이크 윌로우는 칼의 탐색에 나섰고, 얼마 안 가 희소식이 들려왔다.
“차, 찾았습니다. 정원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빨리 깨워서…….”
“그, 그게 깨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잠시 후.
칼을 찾던 병사들은 정원에서 곤히 자고 있는 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약 일 년하고 반 동안 사령관으로 부임한 칼의 신장은 이제 180cm를 약간 넘었고, 외모 또한 소년의 티를 벗어난 미청년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조곤조곤 잠에 빠진 그 모습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여기서 문제는 칼이 낮잠을 자고 있는 장소였는데.
크르르르.
놀랍게도 칼이 베개로 삼은 것이 붉은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수사자라는 것이다.
주인의 단잠을 깨우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 모습에…….
꼴깍!
제이크는 고인침을 삼키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깨, 깨우다가 물리면 어떻게 하지?”
“그, 그러니까 해, 행정관님께서…….”
“닥쳐!”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 제이크는 칼을 깨울 방법에 깊은 고심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