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리히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약 나흘 정도 흘렀다.
마티을 비롯한 괴츠, 헤이젤은 크림슨 게일 기사단의 제복을 갖춰 입은 상태로 칼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사락, 사락.
붉은 제복을 갖춰 입은 칼은 냉담한 표정으로 책상에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언제 말을 걸어야 하지?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 마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다들 모인 것 같군.”
정말로 집중하고 있었던 것인지, 칼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칼은 양손에 깍지를 끼며 설명을 시작했다.
“크림슨 게일의 기사단 규모는 사천 명. 너희는 천인장이 되어서 각자 천 명씩을 맡게 될 거야. 그리고 마틴, 너는 부기사단장으로 전장에서 내가 없을 때 지휘권을 이어받는다.”
“…….”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세 남자는 동공을 파르르 떨며 동요했다.
다들 길거리에서 배출된 인원들로 귀족 출신도 아니고 고등학문을 배운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그동안 리히트를 통해서 많이 개선됐지만, 그럼에도 무거운 책임감에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칼은 흐음, 소리를 내뱉으며 딱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리히트가 실망하겠군.”
울컥!
세 남자는 발끈하며 일제히 기립하며 입을 모아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입꼬리를 슬쩍 올린 칼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뒤, 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릉.
그러다 옆에서 조곤조곤 자고 있던 바그로바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내 목적은 아무도 넘어서지 못한 시련에 도전하는 것이었어.”
루드거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알테어를 고집했던 이유.
거기에는 슈타크 가문의 비전과 역사를 지닌 고대 유적이란 숨겨진 비밀이 있었고, 칼은 루드거에게 반드시 이 고대 유적을 정복하겠다고 선포했다.
루드거는 필시 빠른 성과를 원할 테지만.
칼에게도 알테어에 세워진 요새를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조리와 비리를 저리는 부하들을 숙청하고, 무기의 정비부터 성벽 보수 작업까지 해야 했다.
이제는 얼추 기강을 잡아가고 있었고 정식 기사로 임명까지 받았으니, 유적 탐사를 진행할 때가 됐다.
“근데 1년 정도 뒤로 미루기로 했어.”
‘어째서?’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
칼은 날카로운 동공으로 부하들을 직시하며 말했다.
“알테어의 영역을 확장한다. 주변 몬스터 서식지를 초토화하고 자원이 매장된 광산을 개발하고 지금보다 인구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릴 거야.”
‘죽어 나가겠구먼. 그 녀석.’
순간 세 남자는 전투 행정관, 제이크 윌로우를 떠올렸다.
칼의 말을 연신 곱씹어보던 헤이젤은 마음속에 걸리는 게 있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들어봐도 1년 만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하필이면 기한이 1년으로 결정하신 겁니까?”
필시 다른 목표가 있다.
꼴깍!
칼의 의중을 정확히 떠볼 수 없어 모두가 긴장하며 르를 주목했다.
그때 칼의 입에서 한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울 아비스.”
“?!”
리히트를 죽인 당사자.
그 이름을 들은 헤이젤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분노를 꼭 참았다.
하지만 칼의 분노는 그 이상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전신의 기도를 해방한 칼의 기백은 마틴을 제외한 두 사람의 심신을 크게 압박했다.
‘뭐, 뭐야?!’
당황한 괴츠와 헤이젤이 고개를 들어 칼을 살폈다.
희번득!
거기에는 평소의 냉철한 눈동자를 가진 칼이 아닌 격정으로 크게 분노한 칼이 서 있었다.
잔잔하던 심홍색의 눈이 지금은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울 것 마냥 강렬한 색을 띠고 있었다.
“부하가 죽었다고 일일이 복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라. 녀석은 기사단의 아버지를 시해함으로써 우리의 근본을 건드렸고, 키메라 제조 실험의 발판으로 이 요새를 이용했다.”
“그 말은 타국과의 전쟁도 불사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왕가에 보고가…….”
항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괴츠는 상당히 우려스런 부분을 언급했다.
“여긴 내가 지배하는 땅이야. 누구 허락이 필요한 거지?”
움찔!
“죄, 죄송합니다.”
압도적인 칼의 기백에 괴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땅에서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는 아이와 여인을 전쟁 중에서라도 건드리지 않을 것.
둘째는 칼리언트 슈타크의 분노를 사지 말 것.
애석하게도 아울 아비스는 금기시되는 이 규칙들을 건드렸고, 칼은 응징을 결심했다. 교전 중 분명 알테어의 요새는 막심한 손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칼은 교전 후 1년간, 알테어 복구와 발전에 힘을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적 탐사를 미루는 배경은 바로 이런 계산까지 깔린 것이다.
“…….”
이미 칼과 함께할 의사가 명백했는지, 마틴과 헤이젤은 입을 꼭 다물며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칼은 서류 더미 위에 있는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알테어에 있는 제이크 윌로우가 구성한 정보 부대에서 보내온 서찰로 안에 수록된 내용은 알테어 근처에 있는 아울 아비스와 그 부대의 행적이었다.
“정말 고맙게도 지들이 어떻게 될 운명인지 직감하지 못하고 또 멍청하게 일을 벌리고 있어.”
주먹을 연신 쥐었다 피기 시작한 칼은 냉철한 시선으로 모두를 보며 말했다.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 * *
휘이잉!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그워어어어어!
거점을 새로 마련한 샤텐의 진영은 키메라 제조 실험대상이 된 재갈을 물린 거대한 아이스 트롤들을 사슬로 제압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통제수단인 마법 도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아이스 트롤들 중 몇 마리는 거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콰직!
보다 못한 아울 아비스는 키메라들의 다리 근육을 하나 잘라냈고.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녀석들은 일제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가, 감사합니다.”
“됐어. 빨리 가봐.”
병사들의 감사 인사에 아울은 귀찮은지 손을 홱홱 저으며 물러나게 했다.
“지긋지긋하군. 키메라 녀석들.”
아울은 혐오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아울은 어떤 기시감에 사로잡혀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어졌다.
휙휙.
고개를 돌려봤을 때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확신한 것이다.
이곳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누구냐?”
블러디아의 검자루를 붙든 아울이 신경을 곤두세울 때.
어디선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비스 일족은 마력을 감지하는데, 익숙하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넌 누구야?! 튀어나와!”
환청이 아님을 깨달은 아울이 빽 소리를 지를 때.
화르륵!
히잉!
청색의 불꽃이 일렁거리며 거대한 바이콘과 함께 심홍색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 광견?!”
그것이 알테어의 사령관인 칼리언트 슈타크라는 것을 깨닫자, 아울은 그 즉시 블러디아를 뽑으려고 했으나.
우드득!
어느새 접근한 건지, 칼이 그의 손을 검자루와 함께 움켜쥐어 관절 자체를 으스러뜨렸다.
‘뭐, 뭐야?! 이 힘은!’
압도적인 기백에 아울은 뭐라 말을 하지도 못했다.
칼은 싸늘한 눈매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블러디아. 최초로 나온 건 내가 부숴버렸는데 벌써부터 양산에 들어갔나 보네.”
‘이, 이 녀석이 블러디아를 부쉈다는 게 사실이었던 거야?!’
믿기지 않는 사실에 아울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사실 키메라 제조도 너희들만 보유하고 있는 금술은 아니야. 아마 산크투아리움은 훨씬 굉장한 키메라 제조술을 가지고 있을걸.”
머릿속으로 데제스를 떠올린 칼은 입꼬리에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사술로 국력을 강화시키는 건, 한 사람의 머릿속에 나오는 거겠지. 몬타이라는 녀석이냐? 그놈이?”
“네놈! 감히 존엄하신 태자 저하의 이름을!”
콰아아앙!
콰직!
흥분한 아울이 격정을 쏟아내려는 순간, 칼의 주먹이 그의 안면을 완전히 박살 냈고, 아울은 막사를 부숴버리고 바깥까지 날아갔다.
쿵!
아울은 깃털 같은 몸놀림으로 가까스로 충격을 경감시켰지만, 죄수를 묶어두는 나무 기둥에 등을 부딪치며 피를 토해냈다.
“아울님!!!!”
뒤늦게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제히 칼을 포위했다.
당황한 아울이 뒤늦게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쿨럭, 쿨럭! 가지 마! 차라리 아이스 트롤들을 풀어!”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괴멸을 맞이하는 건 자신들이다.
콰아앙!
전신에 붉은빛의 마력을 두른 이 남자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마물, 게어트너를 쓰러뜨리고 이실리아에 평화를 가져온 자.
아울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재앙을 몰고 오는 괴물이었다.
훈련이 잘돼 있는 건지, 병사들은 곧장 아이스 트롤들을 풀어 칼을 습격했다.
전후좌우로 쏟아지는 네 마리의 아이스 트롤.
인간의 지능을 갖춘 만큼 무기술도 능하고 교활한 녀석들이라 상대가 처음이라면 누구나 고전을 겪었을 테지만.
콰아앙!
비어벨에 맺힌 검신의 붉은 오러는 강렬하게 소용돌이 형태로 활개 치며 주변에 있는 아이스 트롤들을 토막 내버렸다.
“…….”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 뇌가 얼어붙었다.
트롤의 특유의 재생 능력은 팔이 절단나더라도 그 팔조차 재생시킨다.
물론 오러를 두른 공격에는 특유의 재생 능력이 떨어져 과다 출혈로 죽는 것이 일상다반사지만.
칼을 기습한 것은 아이스 트롤은 재생 능력을 대폭 강화한 키메라로 쉽사리 죽는 개체가 아니다.
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 칼의 검격에 당한 트롤들은 사지가 죽음을 인정한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 한 방에…….”
아울은 얼굴에 식은땀을 한가득 흘리며 칼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너 한 명으로 이 진영에 있는 사람들을 전멸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야?”
콰앙!
칼은 그 답을 내뱉기 전에 아울의 목덜미를 잡아 꽈악 쥐었다.
“쿨럭, 쿨럭!”
“아울님!”
칼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한 병사들이 창날을 세우려고 했으나.
히이잉!
바이콘 쿠라빌이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칼은 그 상태로 아울의 양팔을 쇠사슬로 질끈 묶었다.
“이, 이거 놓지 못해!”
아울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칼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철그렁!
결국 양손이 나무 기둥에 묶였고, 아울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이 녀석은 미쳤어.’
여기서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직감은 했지만, 광견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딱히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거점에 마련된 아이스 트롤은 총 248체.
제아무리 칼리언트라고 할지라도 일당백, 아니 일당 천에 가까운 몬스터를 도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칼은 딱하다는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키메라를 전쟁에 활용한다? 그 방법 생각보다 구식이야. 전쟁의 판도는 바뀐 지 오래됐다, 버러지.”
“……그게 무슨?”
불안감에 동공이 흔들렸다.
이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유는 모른다.
파직!
불안은 점차 현실이 되는 것 마냥, 칼과 아울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자리에 서킷이 활개 치기 시작하더니…….
화르르르르.
콰아아아앙!
곧 서킷을 타고 강렬하게 요동치는 화염이 진영 전체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