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생명은 꺼졌다.
노인을 붙들고 있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혼이었다.
‘뭐야? 이 녀석.’
아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와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노인은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동료의 목숨도 승부에 대한 집착도 편하게 죽고 싶다는 자기 안위마저도.
그 자그마한 등 뒤에 있는 것은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렇기에 뒤로 물러나지 않은 것이다.
움직임은 한없이 둔해졌지만, 긍지로 다져진 눈빛은 오히려 차갑고 더욱 매서웠다.
오싹!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던 아울은 그대로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겨우 죽어가는 노인네한테 아비스 가문 출신인 내가 겁을 먹었다고? 인정할 수 없어!’
타앗!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아울은 달리면서 칼자루를 붙들었다.
스릉!
화아아아악!
검집에서 뽑힌 핏빛의 칼날에는 흉흉한 핏빛의 오러가 흘러나왔다.
반면, 리히트의 검은 언제 꺼져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유약한 오러가 흘러나왔다.
힘의 크기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저건 힘에 부치는군.’
리히트 역시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했기에,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지만.
카앙!
리히트는 웃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부딪쳤다.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불타오르자.
이 혼백이 완전히 불타 사라질 때까지, 불꽃처럼.
* * *
그워어어어어!
할벌드를 쥐고 질주하는 아이스 트롤은 하얀 공포가 되어 알테어에 재림하려고 했다.
콰직!
하지만 그것은 비단 아이스 트롤의 사적인 야망에 그쳤다.
어느새 뒤를 따라잡은 헤이젤이 핏발이 선 눈빛으로 아이스 트롤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뒤져라.”
꽈아아아악!
지체할 시간은 없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다소 버거울 지경인데, 남은 한 개체는 벌써 격차를 벌리며 알테어로 진격하고 있었다.
“죽으라고!”
콰직!
헤이젤은 힘껏 비명을 내지르며 아이스 트롤의 목을 베어버린 뒤.
곧장 남은 아이스 트롤을 쫓으려고 할 때…….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느닷없이 벼락처럼 몰아치는 붉은 검격이 아이스 트롤의 몸통이 완전히 토막이 나버렸다.
쏴아아아아!
하늘에는 아이스 트롤의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 핏방울이 닿기도 전에 검격의 주인은 거대한 바이콘과 함께 유령처럼 스산하게 헤이젤의 앞에 도달했다.
“……사, 사령관님!”
바이콘 위에 올라탄 남자를 알아본 헤이젤은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 * *
카카카카캉!
허공에 울려 퍼지는 격철 소리는 요란하고 격렬했다.
카앙! 카앙!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울 아비스.
그의 핏빛의 검격은 곧장 리히트의 검격을 지워나가며 리히트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리히트는 아울보다 더 빠른 검세를 구현해 수세를 굳히며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바스락!
콰앙!
방심하는 사이 리히트의 검격에 어깨 쪽 갑주가 부서지자, 아울은 흥분을 하면서도 냉철하게 현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 녀석 내 검격을 역이용해서 몰아붙이고 있어.’
이런 극단적인 반격기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카앙!
지이이잉!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검격을 멈추고 검을 맞대며 서로를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빠득!
‘형편없군.’
그것은 리히트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죽어가는 이 남자의 검이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지…….
아울은 다시 한번 리히트를 바라보았다.
“…….”
초점이 모호해진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쩍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초조함을 앞당겼다.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고 있나 보군. 뒤질 거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당장 죽어. 영감탱이.”
“……틀린 말은 아니지.”
그 말에 리히트는 수긍을 하면서도 부정했다.
“한데, 그 말은 낭만이 너무 없지 않나? 내가 불태우는 건 목숨이 아니라 혼이라네.”
‘미친 새끼!’
리히트는 질렸다는 듯 이를 빠득 갈았다.
그워어어어어어어!
콰앙!
바로 그때.
두 기사 사이에 있던 거대한 아이스 트롤이 의식을 회복했는지, 머리 깊숙이 박힌 창날을 빼낸 뒤.
파아아아앗!
곧장 리히트를 치기 위해 주먹을 들며 돌진했다.
‘끝났어!’
아울은 쾌재를 부르며 승리를 확신했다.
시체나 다름없는 리히트가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이내 트롤의 거대한 주먹이 지면을 완전히 부스러뜨리며 대량의 눈발을 휘날렸다.
하지만 정작 육체가 터지는 파육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설마!’
그 순간 아울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크르르르르.
바로 눈앞에서는 아이스 트롤 역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벌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스윽.
리히트는 아이스 트롤의 사각지대에서 검을 길쭉하게 내뻗고 있었다.
지이이이잉!
오러가 응집한 검신은 고통을 짜내는 검명을 토해냈다.
시간이 느려진다.
‘……이 녀석 뭐야?’
이 순간 어째서인지 아울은 이마 가득 식은땀을 흘리며 불길함을 느꼈다.
이윽고 리히트의 검 끝이 아이스 트롤의 가슴을 찌르자…….
파앙!
아이스 트롤의 상반신이 거대한 파공성과 함께 완전히 터져버렸다.
“크아아아아악!”
그 타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는지, 아이스 트롤을 방패 삼아 뒤로 내빼던 아울조차 어깻죽지 절반이 패이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블러디아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낸 검을 바라보았다.
더욱더 많은 피를 갈구하는 인조 마검, 블러디아.
하지만 그것은 그 이명과 맞지 않게 크게 훼손돼 더 이상 검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빠, 빨리 아울 님을 데리고 물러나라! 보통 노인네가 아니야. 후퇴! 전원 후퇴한다.”
사태의 긴박함을 눈치챈 보좌관의 호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아울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놔! 이것 안 놔! 저 늙은이를 당장, 당장 죽여야 해!”
“어차피 죽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오히려 수하들보다 더 상황판단 능력을 잃어버린 아울은 흥분한 어조로 소리를 치다…….
저벅저벅.
곧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표정이 얼어붙었다.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
절로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매서운 눈빛.
은빛의 갑주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기사단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과, 광견!”
불과 스무 살도 안 돼서 막강한 전공을 세우고 이 땅 위에 군림해도 될 자격을 손에 넣은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닿자, 아울은 전신에 살얼음이 낄 것만 같았다.
흥분은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퇴각이다.”
“네?”
갑자기 돌변한 그 태도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아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광견이 오고 있다! 퇴각이다!”
타닷!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샤텐의 병사들은 부상을 입은 아울을 데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 * *
휘이잉!
차갑게 불어 닥치던 눈보라는 차차 그 기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설원 위에는 온몸에 검과 창이 꽂힌 채, 숨을 헐떡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 노인의 앞을 칼이 그늘처럼 가렸다.
“……어떡해.”
그런 리히트의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발을 동동 굴렀다.
급하게 준비된 의무병들이 리히트의 상처를 살피려고 했으나…….
“……물러나게. 연명할 수 없다는 건 나 스스로 알고 있으니.”
리히트는 건조하게 갈라지고 튼 입술로 그들을 물렀다.
“크윽, 저 때문에…….”
아이스 트롤을 완전히 제압하고 돌아온 헤이젤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 영감. 장난이 지나치잖아.”
괴츠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애타게 그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스윽!
마틴은 한 팔을 들어 그런 괴츠를 만류하며 누구도 칼과 리히트의 재회를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 * *
꽈악!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리히트를 앞에 두며 칼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주먹을 으스러질 듯이 쥐며 생각했다.
‘……살릴 수 없다.’
일전에 망령의 왕, 발바두스에게 받은 엘릭서로도 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육체가 한계를 넘어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을 뜨고 대화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기적이었다.
리히트는 초점이 모호한 눈빛으로 칼을 쳐다보았다.
분명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리히트는 말했다.
“오셨습니까? 몰라보게 든든한 기사가 되어 돌아오셨군요.”
“……날 부끄럽게 하지 마라.”
“……?”
칼의 반박에 리히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고, 칼은 리히트에게 경애를 표하며 솔직한 마음을 내비쳤다.
“가장 숭고한 기사 앞에서 기사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고 의미 없는 짓이야.”
울컥!
주군의 상찬에 리히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과찬입니다. 전 죄수로 태어나서 그 죄를 씻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내 앞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리히트는 말문을 잇지 못했고.
팔락!
칼은 갑주에 두른 망토를 풀어 리히트에게 손수 매주었다.
“내 앞에는 새롭게 창설한 기사단의 아버지가 있다. 리히트.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가주의 허락은 필요 없다. 내가 허락한다.”
“……?!”
그 발언에 리히트는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고, 칼은 묵묵하게 입을 열었다.
“그 신분이 족쇄가 돼서 너를 옭아맬 수는 없다. 그런 것에 낯을 들 수 없다면 내가 그 의미 없는 족쇄를 끊어주지.”
“…….”
허세가 아니다.
이 남자는 다 죽어가는 자신을 위해 가문이 내정 지은 역사의 획을 지워버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은 즉, 칼 스스로 슈타크가의 가주가 되겠다는 선포와 다를 게 없었다.
겨우 자신이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이 남자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아아”
머릿속에서 수많은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영웅을 꿈꿔온 죄수부터 시작해 설원 위에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비단 행복하기만 한 나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에 품은 긍지를 이어줄 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미안하면서도 리히트는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남자가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전…… 아무래도 제 역할은 다 한 것 같군요.”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있었던 거야’
너무 지나친 생각이지 않을까 싶지만.
‘최고의 낭만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털썩!
그와 동시에 손아귀의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검을 떨어뜨렸다.
“리히트님!”
숨이 끊어졌음을 직감한 디아나는 양 눈을 가리며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아악!”
괴츠는 분통을 터뜨리며 절규했고, 헤이젤은 죄책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슬픔은 점차 전파돼 남은 기사들마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끄럽다.”
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음성으로 모두를 다그쳤다.
그 한마디에 모두가 어떻게든 입을 꼭 다물며 울음을 참기 위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윽.
칼은 손을 뻗어 리히트의 눈을 손수 감겨주며 말했다.
“영웅이 잠들었다. 깨우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