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인간의 지능을 가진 키메라 제조.
누구의 흉계인지 아직 간파하지 못했지만.
키메라들은 알테어를 향해 명백히 적의를 드러낸 상황이었다.
타닥.
전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칼은 불길함을 느끼고는 즉각 쿠라빌을 타고 알테어를 향해 질주했다.
히이잉!
그리고 한참 떨어진 곳에서 크림슨 게일 기사단이 전력으로 칼을 쫓고 있었으나, 쿠라빌의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한참 멀었다.
푸르르르르.
그런 칼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게 말을 몰던 마틴은 곧장 다음 말로 갈아타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괴츠는 그런 마틴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가 됐는지 말을 걸었다.
“알테어에 남겨둔 식구들이 걱정되는 거냐?”
“당연하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 영감이 어떻게든 막아낼 테니까.”
“…….”
평소에 말이 많고 산만하다는 괴츠가 이렇게 침착한 모습을 보이자 마틴은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지나치게 낭만을 추구하는 게 문제일 뿐이지, 영감이 지금까지 경험해온 건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어. 오히려 전황을 꿰뚫어 보는 직감이나 상대의 덜미를 잡아채는 건 너도 못 따라잡아.”
“…….”
평소라면 거만을 떨며 답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쉽사리 부정할 수 없었다.
리히트에게는 누구에게도 없는 알테어에 두 번이나 살아남았다는 전적이 존재하니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 스승이잖냐.”
괴츠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자, 마틴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그렇네.”
압도적인 재능으로 인해 누구도 그의 스승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리히트는 경험으로 마틴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누구보다 실패를 많이 했기에 그릇된 선택을 배제할 수 있는 스승.
그것이 바로 리히트였다.
* * *
휘이이잉!
거친 눈보라가 몰아닥치며 알테어를 다시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금이 아이스 트롤이 들이닥치기에 적기였지만.
다행히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것은 아닌지, 알테어의 병사들에게 숨을 쉴 겨를이 주어졌다.
“푸엣취! 흐음, 이곳은 여전히 빌어먹을 정도로 추운 곳이군.”
검지로 코를 훔치던 리히트의 어깨에 헤이젤은 담요를 덮어준 뒤,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허허허허, 다정하구나. 헤이젤.”
“사령관님께서는 약 하루 뒤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하루만 버티면…….”
“하루를 미루면, 이다음에는 인체 실험을 벌인 놈들이 누군지 알아낼 수 없게 되겠지.”
“……그게 무슨?”
의미심장한 기분을 느낀 헤이젤은 눈매를 좁히고 있는 리히트를 바라보았다.
평소 푸근하게 웃던 인상은 온데간데없었고, 지금은 무척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칼리언트 님이 오기 전까지 배후를 밝혀내야 된다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이 정도로 정교한 인체 실험을 할 정도면 분명 알테어 인근에 비밀 실험실이 배치돼 있을 거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네만. 자네는 저만한 아이스 트롤들을 유지하기 위해 먹잇감으로 무엇을 선택할 겐가?”
“……고블린입니다.”
그동안은 그랑고스트 산맥 주변으로 걷잡을 수 없이 많이 분포돼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리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고블린은 칼리언트 님에 의해 괴멸을 맞이했네. 무난하게 실험 중이던 녀석들은 크게 당황했을 거야. 고블린 이상의 상위 포식자를 잡는 것은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러니 녀석들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거지.”
“제조한 키메라들의 강함을 확인하는 겸, 먹잇감으로 알테어를 선택한 거라는 거군요.”
꽈악!
악랄한 의도를 간파한 헤이젤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녀석들은 결국 알테어를 정복하는 건 실패했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닐세. 분명 더 강한 개체를 만들어 습격하겠지.”
하루를 견디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알테어의 전력은 그 정도로 강화됐고 병사들은 아직까지 온전히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그러니 움직여야 하는 거네.”
리히트는 피식 웃으며 후룩 차를 들이켰다.
헤이젤은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겁니까? 리히트 님이라면 분명 전장에 나서지 않고 참모로 겸해도 알테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허허허허, 이유는 언제나 똑같다네.”
찻잔을 내려둔 리히트는 건틀렛을 착용하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네는 내 뒤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원.’
속으로 푸념하는 것과 달리 헤이젤은 피식 웃으며 리히트의 뒤를 쫓았다.
* * *
칼이 오기까지 이제 반나절만 기다리면 되지만.
리히트는 평안을 누리기보다 자신들에게 트롤들을 푼 배후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커엉! 커엉!
크르르르.
순찰 인원은 리히트와 헤이젤을 포함해 약 일곱 명.
그들의 주변을 따라다니던 사냥개들은 어떤 냄새를 쫓고 있었다.
그 냄새는 트롤의 몸에서 나는 용액의 냄새였다.
리히트는 그것이 필시 키메라 제조 과정에서 쓴 특이한 약초를 쓴 용액이라고 짐작했고, 얼마 안 가 그의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데 숨어 있었군.”
헤이젤은 금이 가고 갈라진 한 유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키메라 제조 같은 금지된 기술을 이 험난한 땅, 알테어에서 실행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물자나 대규모의 실험 장비를 운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일은 이 신전을 기반으로 성공했고.
신전 주변에는 가죽 갑옷을 걸쳐 입은 병사들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복장과 행색을 살핀 리히트는 쉽사리 그들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샤텐의 병사들이군.”
“샤텐? 어째서 녀석들이 여기서 실험을 하고 있는 겁니까?”
“본래 이런 실험을 한다는 걸 백성들에게는 절대 들키면 안 되는 거지.”
제아무리 절대 권력을 표방해도.
그 권력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
리히트는 진지하게 눈을 뜨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샤텐의 실권을 장악한 흑태자, 몬타이는 아주 잔혹하고 냉철한 인물이지. 그렇기에 철두철미하기도 하고. 아마 녀석은 알테어가 극악의 땅이라는 것을 이용해 이런 실험을 자행한 걸 거야.”
“미친놈이네요. 그 자식.”
리히트의 뜻을 간파한 헤이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알테어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으려고 하는 극악의 흉지.
오히려 그런 점을 역으로 이용해서 다른데에서는 할 수 없는 인체실험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 성공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리히트와 헤이젤이 곤욕을 치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헤이젤은 혐오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리히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적의 배후는 밝혀냈으니 돌아가서 준비를…….”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서 어딜 내뺄 참이야?”
“?!”
“?!”
그때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제삼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경계심이 짙은 눈빛으로 목소리의 진원지를 살폈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거대 침엽수림의 위.
나뭇가지에는 적갈색 머리칼을 땋아 어깨에 걸친 젊은 사내가 있었다.
눈동자는 소용돌이 같은 파문이 흘러나오는 것이 묘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불안을 돋게 하는 것은 그의 허리에 있는 붉은빛이 감도는 검이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입에 넣더니 곧 엄청 큰 휘파람 소리를 내었고.
쿠구구구구.
그 부름에 맞춰 샤텐의 병사들이 퇴로를 막으며 일제히 포위 진형을 구축해 다가오고 있었다.
퇴각은 사실상 힘들다는 것을 눈치챈 리히트는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허허허허, 상당히 훈련이 잘된 병사로군.”
“그치? 내가 있는 힘껏 굴렸거든.”
싱긋 웃은 그는 그대로 나무에서 풀쩍 뛰어 지상에 안착했다.
‘새 같아.’
지면을 착지했을 때, 눈밭은 그렇게 큰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았고 큰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의 행색을 일일이 살펴보던 리히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네는 아비스 가문의 출신이군.”
“……영감 누구야? 생각보다 우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데?”
리히트에게 정체가 발각 나자, 여유가 묻어나왔던 얼굴이 조금 경직됐다.
“아비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들어온 헤이젤조차 처음 들어본 가문의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새를 연상시키게 하는 특이한 체술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네. 몬타이가 권력을 쥐게 한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지.”
“이야, 남의 나라 기밀을 이렇게 서슴없이 털어놓네.”
탁탁.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그는 발끝으로 지면을 때리며 입을 열었다.
“아울 아비스다. 그리고 왕의 존함을 함부로 올리지 마라.”
스릉.
싸늘한 눈빛에 헤이젤과 병사들이 검을 빼 들었지만, 리히트는 아직까지 관록을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아 반드시 우리를 죽이겠다고 표명한 거겠지만, 그게 쉬울지 모르겠군.”
“.......”
의중을 간파하는 말로 인해 아울 아비스가 말문을 잃은 사이, 리히트는 날카롭게 벼려진 동공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리고 몬타이는 아직 왕은 아니지 않은가?”
스팟!
그 발언을 기점으로 아울 아비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달려든 그는 검으로 리히트의 목을 치려 했으나……
콰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들이닥친 헤이젤의 검날이 그의 맹공을 막아내며 주변에 굉음을 일으켰다..
“한 가닥 하는 놈이 있었군.”
“두세 가닥은 더 할걸.”
아울의 말에 헤이젤은 힘껏 비아냥거리다가…….
두 사람 사이에서 요란한 불똥이 튀기며 서로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일격이 오고 갔다.
서걱!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히트와 병사들은 뒤에서 창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을 베면서 곧장 퇴로를 형성했다.
“헤이젤!”
리히트의 부름에 헤이젤은 곧장 뒷걸음질을 치며 눈밭에 검을 갖다 댔다.
‘무슨 수작이지?’
찰나의 순간, 의중을 꿰뚫을 수 없어 아울이 방심한 사이.
콰앙!
파아아앗!
헤이젤의 검격이 눈밭을 갈랐고 산개한 눈 다발이 아울의 시야를 가렸다.
“잔꾀를 부려?”
아울이 이를 가는 순간.
콰아앙!
쏴아아아앙!
눈 다발 사이로 날아온 날카로운 검격이 허리 쪽을 파고들었다.
아울이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검을 휘저어 검격을 걷어냈지만.
푸욱!
마치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인지, 안개처럼 자욱한 눈발 사이로 한 줄기의 궤적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따끔한 고통에 아울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어깨를 찌른 단검을 손에 쥐어 내던졌다.
“영악한 게 둘씩이나 있으면 곤란한데.”
“아, 아울님. 괜찮으십니까? 사, 상처를…….”
“독이 있어도 안 죽어. 이까짓 상처로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울은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치료하려는 의무병을 밀어낸 뒤, 본격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녀석들을 쫓는다. 움직일 수 있는 아이스 트롤은 얼마나 되지?”
“세, 세기 정도 됩니다. 하, 하지만 그것들은 황태자 전하께서 애용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대동한다. 화근은 남겨두지 않고 확실히 짓밟아야 돼.”
실험실을 폐쇄하고 자취를 감추려고 했으나…….
이미 발각된 시점에서 의미는 퇴색됐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해.”
콰직!
아울은 어깨에 난 상처를 움켜쥐었다.
피가 콸콸 흘리며 상처가 더 벌어졌으나 망가진 자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인다. 죽인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하찮은 수에 당했다는 것이 상당히 분이 뻗쳐오를 것만 같았다.
우우우웅!
그리고 그런 주인의 분노가 전파된 건지, 그의 검에서 흉흉한 검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