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단단하게 뭉친 만년설의 기세는 엄청났다.
눈사태에 휘말린 고블린들은 저항조차 못하고 그래도 온몸이 박살나거나 눈에 파묻힌 채로 사망했다.
그렇게 그랑고스트 산맥에서 서식했던 고블린은 종말을 맞이했다.
알테어에 위치한 칼의 집무실.
“…….”
현재 제이크 윌로우의 브리핑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해들은 키이라와 리슈타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개체 수 증가를 막기 위해 내렸던 명령인데, 그럴 고민이 필요 없게 씨를 싹 다 말려버리다니…….
‘……역대급이야.’
키이라는 칼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이 거칠고 난폭한 것뿐이지.
실제로 칼은 엘리트들만 모인 파르테스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자신의 입지를 드높였고.
끝내는 이실리아에서 전설이라고 불리는 거인, 게어트너를 손수 쓰러뜨림으로써 에클라 세트와 동급의 재능을 가진 자로 인정받았다.
기지, 무력, 부하들의 충성도 등 여러 방면에서 이미 라마스와 키이라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은 무척이나 거만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꼬고 있었다.
‘재수 없어.’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키이라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칼에게 물었다.
“공훈을 쌓아서 기분이 좋나봐.”
“공훈? 그것보다는 청소하고 나서 깔끔해진 공간을 본 느낌이야.”
“…….”
남과 전혀 다른 생각에 키이라는 이제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칼이 진지한 눈빛으로 키이라와 리슈타에게 물었다.
“그래서 더 해야 될 건?”
“없어. 나 키이라 슈타크는 칼리언트 슈타크의 기사임명을 적극 지지한다. 이에 대해 가주, 루드거 슈타크에게 보증할 것을 약속한다.”
키이라의 지지 선언이 끝나자, 곧 리슈타도 입을 뗐다.
“나 리슈타 슈타크 역시 칼리언트 슈타크의 기사 임명에 적극 지지한다. 이에 대해 가주, 루드거 슈타크에게 보증할 것을 약속한다.”
혈족의 선언.
그것은 서로 대치하며 피를 흘리는 혈족들 사이라고 해도 반드시 지켜야 되는 슈타크가의 불문율로…….
지키지 않는 자는 슈타크 가문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혈족의 선언은 반드시 슈타크 가문의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해야 하며 이때, 선언에 참가한 이들은 반드시 홀수여야 한다.
짝수가 되면, 반드시 입을 맞추는 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증인이 되어줌으로써 선언이 어긋남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스윽.
칼은 만족스런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지지에 감사를 표하지.”
“……임명식에는 늦지 마. 한 달 후야.”
키이라는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며 문 바깥으로 빠져나갔고.
저벅저벅.
리슈타도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려다…….
“넌 거기 서.”
움찔!
칼의 명령에 어깨를 떨며 칼을 쳐다봤다.
“무, 무슨 일이지?”
긴장한 리슈타에게 칼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리슈타 나는 왜 죽었어야 됐던 거지?”
“……무, 무슨?”
직설적인 물음과 은연중 분노를 드러내는 심홍색의 눈에 기선을 제압당한 리슈타는 숨을 머금었다.
칼은 허리춤에 착용한 단검을 휘리릭 돌려 보이더니…….
콰앙!
그대로 테이블 위에 꽂아 보였다.
예리하게 날이 서린 칼날을 본 리슈타는 크게 긴장하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뭣 하면 싸워보겠다는 기세였지만.
이번 칼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경고에 불과했다.
“나는 가문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나에게 암살을 시주한 이는 몇 명이며 알테어에 머물렀던 사령관들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아는 건 다 털어놓고 가야 할 거야.”
알테어는 칼의 지도력에 의해서 방어 태세가 강화되며 점차 활력이 돋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잡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암살을 시도하려고 했던 사람들.
일기장에서 적힌 문구로 봤을 때.
육신의 전주인은 불안감에 크게 시달리며 베일에 싸인 암살자들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칼은 그때, 읽었던 문구를 바탕으로 범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는 슈타크가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물론 외부의 개입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빈도수로 볼 때, 얼굴 모르는 혈족의 개입이 훨씬 많았다.
칼은 리슈타 역시 그 범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칼의 기백에 크게 동요하던 리슈타는 곧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난 너에게 암살을 시주한 적이 없어.”
“죄를 고백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필요한 것은 객관적인 정보, 단지 그것뿐이었다.
진위를 파악한 리슈타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으며 말했다.
“론디네 때문이다.”
“론디네? 예언가를 말하는 건가?”
칼의 반문에 리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론디네.
그는 라흐만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가로 활동한 남자로 지금은 그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의 예언은 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그 예언의 대상이 된 군주는 론디네를 붙잡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상황마저 예언은 했는지, 자신의 처소에 글귀를 남기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타락한 권좌에 집착한 왕은 권좌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니.」
글귀를 읽은 후 왕은 며칠 후에 권좌에 앉은 채 독살당하고 말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했던가.
추상적이면서도 모호한 해석에 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세상의 권세가들은 론디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실제로 과거에 그는 에클라 세트에 대한 예언을 한 적도 있었다.
「30년 뒤, 일곱 개의 빛이 현신하리라. 마냥 좋은 징조만은 아니다. 그 빛을 지우기 위해 악의 싹이 꿈틀거릴지니.」
그것은 세상의 영웅의 탄생과 더불어 잠재된 악의 출현을 예고했고.
실제로 에클라 세트가 이실리아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예언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대화 중 왜 이 남자의 이야기가 튀어나온 걸까?
칼이 눈매를 좁히며 대답을 요구하자, 리슈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가주가 되기 전에 그를 만났고. 슈타크가에 대한 예언을 한 적이 있어.”
“예언?”
칼의 물음에 리슈타가 예언에 대해 풀어놓기 시작했다.
“재앙의 붉은 악마가 탄생할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면, 뭉게구름 같은 뇌운이 다가와 벼락이 칠지니, 이 악마의 탄생으로 루콘의 무가는 그 역할을 다하고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리다.”
“그래서?”
“그게 끝이었어. 아버지는 슈타크가에 탄생하는 자식 중에 반드시 그 예언에 맞아떨어지는 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징조가 일어난 적이 있었지.”
그의 말에 칼은 곧장 눈치를 챘는지 입을 열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군.”
끄덕.
리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날은 예언 그대로 뇌운이 몰려들고 슈타크가 본가에서는 몰아치는 벼락 때문에 화재가 일어났었어.”
“사기꾼 노인네 말 때문에 어린 애를 죽이려고 든 건가?”
칼은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리슈타를 찌릿 노려보았다.
“나, 나는 아니야.”
리슈타는 적극 부인했지만, 이내 칼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예언에 걸맞은 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 아이가 두각을 보이기는커녕, 역대급 둔재였다면?
반응은 생각보다 다양하게 갈린다.
아 예언은 틀린 것이었구나.
혹은 아직까지 그 예언을 경계해 미리 싹을 잘라두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드거는 아직까지 예언을 믿고 있는 눈치인지, 어렸을 때부터 칼리언트를 더욱 강하게 길들이기 위해 험한 궁지로 몰아세웠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칼은 결국 강박에 빠져 자결을 선택했다.
‘예언이 들어맞는다면, 가주 자리를 강탈당할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낄만하고 루드거의 기대도 이해가 돼.’
론디네의 예언은 신빙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것은 결국 권좌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
지고지순한 자리는 실력만으로 앉을 수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운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론디네 같은 자의 말 한마디에 지나치게 현혹되기 쉽다.
칼은 눈매를 좁히며 한 가지 해소되지 않은 점에 대해 물었다..
“말하는 낌새로 보아 분명 기밀인 것 같은데,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원로원을 포함해서 약 일곱 명. 나머지 사람은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죽임을 당했어.”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기밀을 아는 자들에게 한 마디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말에 놀아나는 시시한 것들.”
울컥!
칼이 한없이 자신을 낮잡아보자 리슈타도 결국 발끈했다.
“혈족 전체를 무시하는 거냐? 너라고 예언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칼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며 그에게 말했다.
“나라면 운명을 극복해서 내가 세상에 사는 이유를 증명할 거야. 그게 나 칼리언트 슈타크의 방식이지.”
쿠구구구구.
심홍색의 눈과 붉은 눈이 서로 교차한다.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리슈타는 다시 한번 자신이 기백으로 칼에게 밀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입을 열었다.
“……라마스 형님과 락티아 누님이 각각 너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어.”
“증거는?”
“증거는 없어. 다만 특유의 패턴이 있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그것 외에도 알테어의 사령관이라는 위치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야.”
“늘 방파제 역할을 하는데?”
“사령관의 부재는 병사들의 사기에 크게 영향을 주지. 타국에서도 분명 암살을 꾀했을 거야. 프루아도 그것 때문에 늘 자신의 위치에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지.”
“그 말대로라면, 조만간 다시 기어들어오겠군.”
어느 정도 알테어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자각한 칼은 싱긋 웃어 보였다.
“뭐가 웃긴 거지? 안 두렵나? 칼리언트. 이게 너한테 주어진 상황이다.”
“넌 모기가 땍땍거린다고 해서 일일이 신경 쓰나 보지?”
“모, 모기?”
자신을 암살하려는 대상을 벌레로 낮잡아보는 그 배짱에 리슈타는 ‘이 녀석 진심인가?’라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심홍색으로 일렁이는 눈에는 강한 의지만 보일 뿐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녀석은 굴복할 바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놈이야. 분명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괜스레 머릿속만 엉망진창 헤집어진 느낌이었다.
“건방진 놈.”
리슈타는 혀를 차며 문을 박차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칼의 자격을 확인한 키이라와 리슈타는 곧장 본가로 돌아갔다.
알테어의 병력은 기사단으로 임명받게 만들기 위해 리히트가 교육에 나섰다.
죄인 출신에 고령의 나이를 가진 종자.
처음에는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네.”
지금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듣기 위해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오래 볼수록 그 진가를 알게 된다.
검술에 대한 조예도 깊고 알테어를 방위하는 데 있어서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교육에 힘써왔다.
무엇보다 그는 젊은 사람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이 때만큼은 나이를 떠나 순수한 소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열의를 선보이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자네는 내 뒤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네?”
당황한 젊은 병사가 허둥지둥할 때, 리히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뒤에는 자네가 있고 자네 뒤에는 자네의 가족이 있지. 그렇기에 자네는 물러서면 안 되는 것이지.”
“.........”
일순간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리히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힘을 내야할 때, 적에게 항상 묻곤 하지. 내 뒤에 뭐가 있냐면서 말이야.”
그의 말을 앞에서 듣고 있던 마틴은 팔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오글거리네.”
“현실이랑 너무 타협이 안 되는 이상론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헤이젤도 투덜거렸고 괴츠는 팔짱을 끼며 리히트에게 수긍하는 말을 내뱉었다.
“영감님 교육이 원래 그래.”
우연히 교육현장에 방문해 리히트의 열정적인 교육을 보며 칼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뒤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색해. 입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말만 내뱉었는데, 너무 오글거려 쉽게 떨어지지 않아 절로 고개를 저었다.
* * *
어두컴컴한 저녁.
우웅.
낮의 업무로 인해 분주했던 칼은 저녁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수련에 임할 수 있었다.
현재 칼의 주변으로는 거대한 붉은 마나 서킷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무척이나 광활해 지난번 그랑고스트 산맥에서 눈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규모와 비슷했다.
맥캘리가 전수한 마나 통제의 두 번째 기술, 서킷.
그것은 마력을 축적해 고유 마력을 각성 및 폭발시키는 트리거와는 달리 효용성이 훨씬 넓었다.
변조와 복조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자신을 타깃으로 한 마법을 상대에게 되돌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서킷을 누군가 밟으면, 그 미세한 마력을 전송시켜 상대의 위치를 포착하는데도 유용했다.
마지막으로 서킷과 트리거를 동시에 발동하면........
두 기술은 서로 상호작용하여 강력한 마나브레이크를 일으키는데, 이 때는 상당한 물리적인 타격까지 입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창 수련에 매진할 때.
파앗!
서킷을 통해 타인의 마력이 칼에게 흘러들어왔다.
‘은폐 능력이 상당한 녀석들이야. 어쩌면 암살자일지도 모르겠어.’
씨익.
설마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이야.
“심심하지 않아. 좋군.”
여유롭게 입 꼬리에 웃음기를 그리는 순간.
쨍그랑! 콰앙!
창문과 문 등이 일제히 박살나며 암살자들이 일제히 투척용 단검을 던지며 소리쳤다.
“죽어라! 칼리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