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그랑고트 산맥에서는 전례 없는 고블린 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채앵!
푸푸푸푹!
그들은 핏발이 서린 눈동자로 서로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거나.
살점을 물어뜯고 돌팔매질을 하며 서로를 때려죽이며 목숨을 불사르고 있었다.
키이이익!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던 고블린 로드는 어느새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계기야 어찌됐든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더욱 큰 권력을 쟁취하기 때문이다.
끼이익!
그리고 그 풍경을 살펴보던 매들이 일제히 산개하며 날아오른 뒤, 세 남자의 팔에 앉았다.
마틴, 괴츠, 헤이젤은 매의 발목에 묶여 있는 전서를 살피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중 마틴은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는지, 식은땀까지 흘리며 칼의 작전에 감탄했다.
“이제 그 녀석이 없는 곳은 따분해서 죽을지도 모르겠군.”
설마 이 정도로 기가 막히게 작전이 먹혀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천 명으로 편성된 군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전사들이 텅 빈 부락.
그곳에는 암컷 고블린과 어린 고블린들만이 남아있었다.
반짝!
마틴은 예리한 검 끝을 고블린들을 향해 겨누며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전서에 남아있는 문구는 하나였다. 단 한 마리의 생명도 남기지 마라. 한 마리라도 살아남을 시, 내 식구들이 그 개체에게 숨을 거둘 것이다.”
쿠구구구구.
그 한마디는 투지는 단숨에 불타올랐고.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우와아아아아아!”
마틴의 명과 함께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고.
푸푸푸푹!
기습을 눈치채지 못한 고블린들은 몸과 머리 등이 관통당해 일제히 시체로 널브러졌다.
퍼석!
그리고 그 시체조차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납작하게 뭉개졌다.
* * *
고블린의 부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초소에서 반쯤 눈을 감으며 졸고 있던 칼에게 제이크가 다가와 횡설수설 보고를 늘어놓았다.
“사, 사령관님. 자, 작전대로 47개의 부족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겠지. 깊게 생각할 정도의 지능은 없는 놈들이니까.”
“외, 외람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지?”
“이 혼란이 수습되면, 녀석들은 분명 분노하고 알테어로 진격을 감행해올 것입니다.”
“그럴까?”
“네?”
칼의 반문에 제이크는 심히 당황했고.
칼은 살짝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지능은 없지만, 그래도 식량을 축적하면서 겨울을 낳을 정도의 잔머리는 있는 놈들이야. 마틴 녀석들이 부락에 있는 식량을 모조리 태워 먹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 이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약탈 혹은 동족 포식이지.”
단순한 것 같지만 지극히 옳은 지론이었다.
알테어에 서식하고 있는 고블린들은 백만을 넘기고 있었다.
연합만 한다면, 그들은 오크 부락조차 집어삼킬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할 테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고블린 사이에서는 강력한 통솔자가 없다는 것과 먹고 사는 문제가 상당했다.
그렇기에 백만이라는 숫자는 위협이면서도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했다.
몬스터 중의 최약체, 고블린.
평소에는 인간과 약한 동물들을 사냥한다지만.
한계까지 굶게 되면 설령 동족이라도 서로 죽이고 포식하면서 살아남는 것이 바로 고블린이었다.
꿀꺽!
상황이 이쯤 되니, 제이크의 머리로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키이라님께서 요구한 고블린의 목은 사십만으로 알고 있는데, 사령관님은 어느 정도의 숫자를…….”
잠이 완전히 깬 칼은 냉정한 표정으로 답했다.
“씨도 남기지 않을 생각인데.”
* * *
요새, 알테어.
키이라는 수련장에서 목검을 들고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파파파파팟!
그녀가 휘두른 검세는 무척이나 날렵하고 살벌했는데.
목검이 스쳐 지나간 허수아비들은 교체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너덜너덜해져서 부러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강해질 것 같던 그녀의 기세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금세 끊어졌다.
“키이라!”
그녀의 이름을 힘껏 부르는 사람은 슈타크가의 차남, 리슈타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의 눈은 심히 당혹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리슈타 오라버니.”
“그, 그 녀석 달성했어.”
“달성했다니요?”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이 남자가 미쳤나?
자신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생각을 품던 키이라는 곧 리슈타의 발언에 담긴 뜻을 눈치챘다
“사십만을 전부 죽였다는 말씀인가요?”
리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급을 챙기는 것도 귀찮으니, 우리가 사람을 고용해서 따로 챙기라는 또라이 같은 발언도 늘어놓더라. 알테어에는 병력이 없으니까. 놀지 말고 숫자나 세고 있으란다.”
“…….”
‘시험을 내린 건 우린데, 왜 우리가 당하는 것 같지?’
키이라는 기가 막혀 말문을 잃었지만, 곧 냉정하게 이성을 되찾으며 리슈타에게 말했다.
“수급을 챙기는 것은 제가 사람을 고용해서 할게요. 근데, 그 말이 사실인가요?”
“내가 전장에서 언뜻 본 것만으로도 그 숫자가 어마어마해. 병사들의 몸에는 피비린내밖에 나지 않아. 여기서 제일 웃긴 건, 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야.”
“……말도 안 돼.”
설사 기사단 병력이라도 사십 만의 숫자 앞에서는 생채기는 나며 치명상을 입는 법이다.
한데, 기사단도 아니고 일개 병사들과 함께 한 작전에서 전사자 한 명도 내지 않다니.
난생처음 들어본 공훈에 키이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직 리슈타의 말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아냐?”
“뭐, 뭔데요?”
그녀는 보기 드물게 말을 더듬었고 리슈타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100만 마리를 전부 죽여 버리겠대.”
“……겨우 나흘 만에 목표를 달성했는데, 그것보다 배를 더 죽이겠다고요?”
“아주 진심이야. 그 녀석 이미 임명식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
리슈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본 사이에 건방져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둔하기 짝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의 편협한 생각이었다.
루콘의 광견.
칼은 실로 그 이명에 걸맞게 한 번 타깃으로 포착한 것들을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알절부절 못하는 리슈타를 보며 키이라는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무서워지기 시작했나 보네요.”
“지금 그 녀석의 눈에 띄지 않았나 싶어서 한없이 불안해.”
“…….”
키이라는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지기반이 라마스와 키이라에 비해 약할 뿐이지.
리슈타는 결코 약한 남자가 아니다.
실제로 가문에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리슈타는 자신의 발언권을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라마스나 키아라를 상대로도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근데, 그런 그가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슈타크가의 막내한테서?
‘단지 업적만으로 리슈타의 기세를 완전히 눌러버렸어.’
아마 이 시간 이후로 리슈타는 칼에게 절대로 적대심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순순히 칼에게 기사 자격이 있다고 지지할 것이다.
리슈타를 단번에 바꿔놓은 칼의 저력에 키이라는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점점 슈타크가를 장악해가고 있어.’
* * *
시험이 내려진 지 닷새가 됐다.
이미 목표했던 고블린 40만을 넘긴 지 오래였으나.
칼은 약속된 기일 내에 보다 큰 성과를 내기 위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완전히 전멸당한 고블린 부락에서는 잔뜩 쌓여 올린 고블린의 시체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칼은 불꽃 가운데서 냉철하게 어딘가를 주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행정관, 제이크 윌로우는 그런 칼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병력이 새로 교체됐습니다.”
나흘 동안 대차게 고블린들을 퇴치한 병사들은 심신에 피로가 적잖이 쌓인 상태였다.
애초에 육천이라는 소수의 병력으로 벌인 일인 만큼, 칼은 그 대안으로서 다시 새로운 육천 명을 편성해 교체를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고블린들은?”
칼의 짤막한 말에 제이크는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벌어진 전쟁의 소동이 저희가 벌인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해 그 손실이 어마어마하지만, 한 부락의 고블린 로드가 남은 잔당들을 연합해 새로운 부락을 구성했습니다.”
웅성웅성.
최대한 기밀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미 이야기가 새어나갔는지,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급속도로 전파된 상황이었다.
대규모의 부락을 완전히 연합시킨 로드의 탄생.
그것은 다시금 알테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이미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잔뜩 쌓인 만큼 녀석들은 반드시 알테어를 기습해올 것이다.
공을 위해 벌인 일이 졸지에 실이 되어 오게 될 수도 있는 상황.
“…….”
칼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중이었다.
“잔존 세력은 다 합치면 오십만 정도 됩니다. 지금은 아사 직전에 놓인 상태라 저희들을 피하기 위해 더욱 산맥의 뒤로 이동 중이지만. 힘을 찾으면 녀석들은 즉시 알테어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똑바로 봐야하는 역할을 맡은 그로선 거짓을 보고할 수는 없다.
“함락하러 올 겁니다. 서둘러 슈타크가의 지원을 받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피식.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과묵했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모든 게 예상대로야. 역시 지능이 딸려서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 거겠지.”
“그, 그게 무슨…….”
“전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제이크 윌로우.”
“저, 전멸이라니요. 다, 다음 작전이 있습니까?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신 건지요?”
역시 이 남자 뭔가 계책이 있었어.
기대되는 시선으로 쳐다볼 때, 칼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혼자.”
“네?”
“나 혼자면 충분해. 너희들은 계속 이대로 녀석들을 몰아붙여. 그리고 산맥 뒤로는 절대 넘어오지 마.”
“하, 하지만 그건.”
무모하다며 만류하려고 들 때, 칼이 진심으로 정색하자, 제이크는 잽싸게 경례를 취했다.
“명을 받듭니다.”
“수고해.”
칼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그동안 인간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고블린들은 인간들의 꾐에 넘어가 말도 안 되는 숫자를 잃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드는 즉각 고블린들을 설득했고.
수많은 전투 끝에 가까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인간 병사들은 부락에 있는 모든 식량들과 사체를 산산이 태워버렸다.
그로 인해 먹을 것이 부족해진 고블린들은 일제히 동족 포식을 선택했고.
연합에 성공한 고블린 로드는 자신을 거스르는 부족을 먹잇감으로 선정하며 가까스로 허기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꼴랑 오십만도 채 남지 않았다.
여기서 병력으로 쓰이는 고블린의 숫자는 불과 삼십만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아르메 평야가 있는 산맥을 넘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인간들에게 또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은 뻔한 일이니…….
이럴 바에는 차라리 최상위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더라도 산맥을 넘는 게 종족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휘이이잉!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험난한 눈보라로 인해 고블린들이 동사에 걸려 차례차례 숨을 거두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지금까지 패배밖에 하지 못한 인간 따위가. 감히!’
연합을 이끌던 로드는 알테어의 병사들에게 원한을 품으며 눈밭을 디딜 때.
[그런 치욕적인 역사는 잊어. 앞으로는 승리만 할 테니까.]
[누구야!]
근엄한 목소리에 당황한 고블린 로드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키익?
뒤를 따르던 고블린들이 어리둥절할 때, 고블린 로드는 산맥의 정상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거리로 치면 약 1킬로미터나 되었지만, 다른 고블린에 비해 감각이 발달한 고블린 로드는 음성의 주인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백은색의 갑주 위에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남자.
오싹!
‘이 녀석이다.’
단지 마주친 것만으로 고블린 로드는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가 저 남자라는 것임을 직관했다.
그런 남자의 앞으로는 광활한 붉은 마력이 서킷을 이루며 빛을 띠고 있었다.
뭔가 있다.
불길함을 느낀 고블린 로드가…….
[뛰어! 지금 당장!]
일갈을 내지르며 급하게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칼의 팔찌로 밀집한 붉은 마력이 팽창하며 곧 터질 것만 같이 강렬한 빛을 띠었다.
[마무리는 화려하게 장식해주지.]
콰칭!
칼은 오만한 한마디를 내뱉음과 동시에 트리거를 발동했고.
서킷을 거침없이 타고 흐르는 거대한 마나 브레이크의 충격이 눈밭 곳곳에서 터졌다.
그것은 더없이 불길한 재난의 징조.
콰아아아아앙!
멸망의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이내 거대한 눈사태가 고블린들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