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한 칼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동안 몬스터의 피해로 인해 강박에 시달렸던 병사들은 와들와들 떨며 고블린 퇴치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제작한 마법 스크롤을 한 아름 안고 성곽을 나부끼던 디아나는 그런 병사들을 보며 쓸쓸한 감정이 들었다.
‘……사기가 없어.’
당연하다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동료를 언제 잃을지도 모르는 나날.
칼이 온 뒤로 그런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졌지만, 알테어의 고블린을 퇴치한다는 말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 고요한 정적 속에서 유난히 유쾌한 발걸음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허허허허, 다들 훤칠한 미남들이구먼.”
가장 앞장서서 걷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리히트였다.
그리고 리히트의 뒤로는 갑주를 걸쳐 입은 마틴과 괴츠 그리고 헤이젤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 본 인상과 달리 훨씬 세련되고 위엄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영감, 나 이런 옷은 안 맞는데?”
괴츠가 거치적거린다는 듯 뒷머리를 긁자, 리히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의 위치를 자각하게. 편하다고 해서 단정치 못한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이는 앞에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지. 또한 그 망신은 자네가 아니라 바로 칼리언트 님에게 가는 거지.”
“죽기 싫으니 열심히 가꿔보겠수다.”
“하하하하, 죽인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참 엉뚱하게 해석하는군.”
그때 헤이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걸었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리히트님 빼고 전부 두들겨 맞고 강제 영입된 거라서요. 그치?”
헤이젤이 마틴의 옆구리를 툭 치자…….
“……흠.”
마틴은 부정도 하지 못하고 난색을 표하다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부정은 못 하겠다만 그래도 도망칠 생각은 없어. 나는 스스로 납득하고서 칼리언트 님을 섬기기로 한 거니까.”
“그러냐?”
마틴의 재능을 진작 알고 있던 헤이젤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사령관님은 어떤 사람이지?’
속마음은 곧 그대로 발설됐다.
“사령관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에 리히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허, 나도 뵌 지는 오래되지 않다만. 무시무시한 흉계를 갖춘 분이란 것만큼은 확실하네. 지금 우리를 불러들인 것은 이미 작전을 완전히 구상해 놓아서 그런 것일 테지.”
“…….”
어째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호기심만 더욱 증폭됐다.
“후훗.”
한편, 그런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기는 너무 긴장감이 없는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선에서 저런 농을 나누다니…….
참으로 경악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그러던 중 디아나는 주변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병사들이 그들을 동경하듯 쳐다보며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도 괴츠님이 찾아와서 밤새 술 마시겠네.”
“아아, 맨날 코 빨개져서 돌아온다고 애들이 싫어하는데.”
“어쩌겠어. 그나저나 헤이젤 님 연애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지 않아?”
긴장으로 가득했던 안색에는 어느새 활력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정착한 지 어언 두 달쯤이 흐르고 있었고,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활약을 펼쳐 위상을 드높였다.
그런 존재들이 자신들과 눈을 맞추며 술을 마시거나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에 그들은 격하게 감동하고 반겼다.
‘안심하는 건가? 나도 열심히 해야지.’
디아나는 피식 웃으며 총총 뛰어 공방으로 향했다.
* * *
쿠콰아아앙!
변덕스런 날씨 또한 알테어에서 늘 있는 일이었다.
불과 반나절도 안 돼서 날씨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쳤다.
순간 번쩍이는 빛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남성들의 얼굴이 노출되었다.
번개가 치는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이는 바로 알테어의 사령관인 칼리언트.
현재, 그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이상. 내 작전 설명은 끝났어. 감평을 들어볼까?”
“허허허허허허.”
감평을 하기도 전에 리히트는 너무 깜짝 놀라 헛웃음을 연달아 터뜨리고 있었고.
헤이젤은 빈축을 살 것을 각오하고 딴죽을 걸었다.
“정말 이게 가능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묻지.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건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나 무모한 작전이지만, 이만큼 과감하고 무모한 결단이 있어야 사십 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고블린을 토벌할 수 있을 테니.
‘성공만 하면, 목표했던 숫자 이상을 처리할 수 있겠어.’
구태여 속마음을 읽을 생각도 없지만, 표정만으로도 생각을 알 수 있었던 칼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이젤은 계산을 끝마친 것 같군. 마틴 너는?”
씨익.
물어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마틴은 음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괴츠.”
“저, 저, 저도 물론 흥미진진합니다.”
대세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느낌이었지만, 칼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계획을 변경해서 선발대 백 명에 후발대로 육천의 병력을 투입하지.”
꿀꺽!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누구 한 명 없이 모두 고인 침을 삼켰다.
시작되고 만 것이다.
광견의 무참한 고블린 학살이…….
* * *
알테어는 그랑고스트 산맥을 경계로 형성된 몬스터의 서식지로 루콘, 아벤트로트, 샤텐의 국경이 마주한 땅이었다.
그 산맥을 넘으면 아르메 평야가 나오며 그곳에는 강대한 몬스터들이 잔뜩 있었다.
알테어는 아르메 평야를 등지고 있는 산맥의 뒤에 위치해 있으며…….
이 산맥 부근에 47개의 부락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 게, 바로 고블린들이었다.
평야로 내려가면, 다른 몬스터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들은 스스로 험준한 지형에 사는 것을 선택했으며 그로 인해 일반 고블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근골이 발달 돼 있었다.
성정 또한 매우 포악했으며 인간을 사냥하고 겁탈하며 먹는 것에 하루하루를 만족하고 산다.
쫘악!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고블린들이 인간 남성을 죽여 인육을 섭취하고 있었다.
“죽여! 제발 날 죽여!”
동굴 한구석 속에서는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끊임이 없었지만.
키이이익!
고블린들의 만행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키익?
동굴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한 고블린이 무언가 수상한 기척을 발견했다.
은빛의 갑주를 갖춰 입은 한 기사.
히잉.
그 밑에는 위엄스런 두 개의 뿔이 돋아있는 바이콘이 투레질을 하며 은은히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키익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그 위압감에 고블린들은 재빨리 발을 내뺄 준비를 했다.
바이콘도 바이콘이지만.
진짜 위험함을 느낀 것은 그 바이콘 위에 앉은 기사였다.
투구 사이로는 심홍색의 눈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오싹!
단지 눈빛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다 못 해 심장이 빳빳하게 굳어 멈출 것만 같았다.
타닷!
정신을 차린 고블린들은 눈밭 위에서 전력으로 질주하며 동료에게 위기를 알리려고 했지만.
바이콘은 발소리도 없이 바람을 가르며 질풍처럼 질주해왔다.
서걱!
그리고 기사가 뽑아 든 검에 그들의 머리는 뎅강 잘려 머리가 없는 몸통은 피분수만 요란하게 튀었다.
꿀꺽!
“어, 엄청나다.”
매복해 있던 병사들은 입을 쫙 벌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경이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기사는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
외모는 어리지만 그 살벌한 인상에 누구도 얕잡아 보지 못했다.
“시작해.”
“네.”
칼의 명령에 병사들은 일제히 죽은 고블린의 시체에 다가가 그들의 발목을 일제히 절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통 역시 자루에 수거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까지 했다.
‘……이게 과연 통할까?’
칼을 보좌하고 있던 전투 행정관, 제이크 윌로우가 염려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칼은 그 눈빛을 알아차린 건지, 제이크를 쳐다봤다.
“죄, 죄송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제가 감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사과하려 했고, 칼은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검으로도 죽이기 아까워. 날이 무딘 도끼를 가져와.”
“네?”
“한 번에 죽이기에는 저 녀석들이 내 심기를 너무 많이 건드려 놨거든.”
빠직!
칼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칼이 살기 어린 시선을 주자, 제이크는 재빨리 도끼를 구해 칼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긴 내가 마무리하지. 제이크 너는 작전을 계속 감행해.”
“아,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하며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꽈악!
도낏자루를 으스러지라 잡은 칼은 고블린이 거주하고 있는 동굴을 걸어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생 시절, 마계에 있는 모든 생명의 숨통을 끊은 자로서 더 이상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갱생의 삶을 살아왔다.
하나, 역사는 반복되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칼은 결심한 것이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종족 중 하나는 반드시 전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한때, 마왕이 된 자로서 그 정도로 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칼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갱생은 정말 어렵단 말이지.”
어느새 칼의 발끝은 고블린의 동굴 입구에 닿아있었다.
키익!
침입자의 당당한 행보에 당황한 고블린 중 한 마리가 단검을 들고 덮치려고 했지만.
콰앙!
키에에에에에엑!!!!
오히려 목덜미를 잡히며 동굴외벽에 뒤통수와 등이 부스러질 정도로 충돌했다.
키에에에엑!
만행을 저지르고 있던 고블린들이 일제히 당황해 황급하게 빠져나올 때.
콰직! 콰직! 콰직!
칼은 손에 움켜쥔 고블린을 도끼로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키에에에엑!
날이 무딘 도끼에 팔, 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가던 고블린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다가 숨통이 끊어졌다.
콰직!
칼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마무리로 그 목을 자른 뒤…….
타악! 데구르르르.
고블린 무리에게 손수 던져주었다.
일관성 없이 포효하던 녀석들은 입을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칼을 바라보았다.
오싹!
불타오를 것 같은 심홍색의 눈빛과 마주하자, 고블린들은 그제야 일이 잘못 틀어졌음을 깨달았지만.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려두는 게 좋을 거다. 버러지들아.”
자비 없는 칼의 선포에…….
키에에에엑!
조금이라도 살기 위해 동굴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콰직! 콰직! 콰직!
칼은 도망가고 있는 고블린들의 몸통을 도끼로 가차 없이 찍으며 본격적인 퇴치를 감행했다.
* * *
다음날 아침.
47개의 부락 중 한 군데에서는…….
키이익!
파르르르르르르.
고블린들이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부락 밖에는 고블린들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밤새 쌓인 눈밭 위에서는 다수의 고블린들의 발자국이 잔뜩 남겨져 있었다.
킁킁!
분노한 고블린로드가 발자국 냄새를 손수 맡아보다가……“
크르르르르.
다시금 살기 어린 포효소리를 내질렀다.
냄새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것은 다른 부족의 냄새가 틀림없었다.
그동안 숱하게 다퉈오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선을 넘었다.
키에에에에엑!
고블린 로드는 포효를 내지르며 타부족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고, 분노에 몸을 맡긴 고블린 부대가 일제히 타부족을 향한 습격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