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슈타크가의 형제들이 알테어에 집결했다.
취지가 칼의 기사 서임에 관련된 평가를 내리기 위해 온 만큼, 딱히 환영식이나 만찬은 준비되지 않았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어설픈 혀굴림이나 아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설령 사이가 좋은 형제라고 해도 슈타크가의 일족들은 이미 뼛속부터 다져온 규율을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알테어 성에 마련된 응접실.
쪼륵.
키이라는 시종이 따라준 와인을 손으로 집으며 불만이 가득한 리슈타의 얼굴을 쳐다봤다.
“할 말 있나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막내에게 뒤늦게 우애의 감정이라도 가지게 된 건 아니겠지?”
오해하기에 충분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가령, 칼의 스승인 맥캘리와 학창 시절에 친구로 지냈던 점이나…….
내상을 입은 프루아를 강제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어찌 봐도 칼에게 우호적인 조치로 볼 수 있었다.
이에 키이라는 기가 막혔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설마요.”
“제가 우애를 느끼고 있는 건, 라마스 오라버니뿐이에요.”
창문 건너편에 비친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과거의 사건을 떠올린 리슈타는 오금이 저려왔다.
깊은 살의와 증오, 혈연이기에 다툴 수밖에 없는 계승권 싸움.
과거 키이라는 라마스의 기습에 부하들을 대거 잃었는데, 당시 그녀의 눈은 암울한 절망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스와 필적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사건부터 다져온 라마스에 대한 살의와 증오였다.
리슈타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독한 사람한테 엉뚱한 생각을 품었군.’
그리고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칼리언트가 이곳 알테어에서 얼마나 버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글쎄요.”
키이라는 와인잔을 돌리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테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몬스터들이 대거 밀집한 것뿐만 아니라 타국과 국경을 직접 맞댄 곳이기에 늘 긴장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잔혹한 땅.
이런 쓰레기 땅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지만, 혹여나 알테어가 뚫리고 타국의 군사들이 돌격해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루드거가 선택한 전략은 알테어를 방파제로 세우는 것이다.
몬스터든 타국의 군사든 알테어에서 적의 전력을 감축시킨 뒤, 미리 방비하고 있던 군대가 그들을 진압한다.
실제로 이 작전은 두 번 정도 먹혀들었고.
그때마다 알테어는 심각한 피해를 받았다.
그런 피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슈타크 가문의 형제들은 알테어의 사령관으로 임명받는 건 버림받은 말 취급 당하는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루드거조차 은연중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 있던 녀석들이랑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어떤 점이?”
“굳이 집자면, 마음가짐. 그 녀석은 진심으로 이곳 알테어를 정복하려 하고 있어요.”
리슈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광견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
그의 비아냥거림에 키이라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리슈타를 응시했다.
“뭐야? 그 표정은?”
마치 괄시하는 것 같은 표정에 리슈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고, 키이라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속마음을 숨김없이 내뱉었다.
“진심으로 그렇기 여긴다면, 오라버니는 분명 막내에게 크게 당하겠네요.”
“뭐?”
굴욕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키이라는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병사들의 기백을 느끼지 못했나요?”
“그, 그건?!”
뒤늦게 리슈타는 알테어를 순찰할 때, 병사들의 모습을 살폈다.
전만 해도 의기소침했던 병사들의 눈빛에는 활력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낡고 녹슬었던 무기들도 예리하게 날이 세워져 있었고, 엉성하게 지어졌던 성벽은 굳건하고 튼튼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의지만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변화로 프루아는 해내지 못했던 일이다.
주륵.
상황이 이쯤 되니, 리슈타는 칼의 기량을 잘못 재단한 것을 인정하며 식은땀을 한가득 흘렸다.
키이라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며 입을 뗐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그 남자가 있어요. 막내의 역량을 키워줄 재목이…… 그러니까 알테어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돼버린 거죠.”
* * *
정식 기사로 임명받기 위해 키이라에게 내건 조건은 상당히 가혹했다.
하지만 칼은 표정 변화 없이 회의장에서 부하들에게 이 사실을 전파했다.
“…….”
발설 직후.
마틴과 리히트를 제외하고 모두의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아무리 저주받은 땅이라고 하지만 고블린 사십만 마리는 도가 지나친데요. 어째서 그렇게 많은 겁니까?”
헤이젤이 의견을 제기하자 전투 행정관, 제이크 윌로우가 앞장서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고블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테어의 고블린들은 수명이 극도로 짧은 대신에 번식력은 왕성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고블린보다 근력과 민첩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죠.”
제이크의 말에 리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더불어 개체 중에 지능이 상당한 놈이 있네. 무엇보다 녀석들은 인간들을 약탈하고 간악한 짓을 일삼지. 인육으로 뜯기도 하며 겁탈마저 저지르지.”
그의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도 말을 안 할 뿐 마음에 안 드는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이크 윌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는 건, 알테어의 혹독한 조건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고블린은 최약체 몬스터로 다른 몬스터들의 먹잇감으로 안성맞춤이기도 하죠.”
집단을 이루는 개체의 힘은 강하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은 약하기에 다른 몬스터들의 먹잇감으로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고 할 지라도 사십만이면 지금 우리 병력으로는 통제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은데.”
평소에 괴랄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과시하던 괴츠도 그 숫자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알테어의 병력은 다 끌어모아도 삼 만입니다.”
“…….”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데엥!
칼은 테이블에 놓여있는 찻잔을 검지로 때려 청아한 소리를 냈다.
움찔!
기묘한 행동에 모두가 바싹 긴장을 했고,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달라지는 건 없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 겨우 첫 계단에 오르는 것뿐이지.”
칼은 팔짱을 끼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고 삼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건 무리야. 알테어의 방위는 누가 책임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제이크 윌로우는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고.
별로 트집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칼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발이 빠른 병사를 백 명을 추려내. 알테어의 방위는 리히트에게 맡기지.”
“지, 직접 나선다는 말씀입니까? 위험합니다.”
깜짝 놀란 헤이젤이 몸을 일으키며 극렬히 반대했다.
일개 병사도 아니고 한 요새를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이 위험한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은 단호했다.
“토 달지 마.”
“넵!”
맹수도 아니고 거슬린다고 으르렁거리는 그 분위기가 심히 흉악한지라…….
헤이젤은 즉각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괴츠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나대냐.”
“시끄러워.”
괜스레 민망했는지 헤이젤은 가볍게 괴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때렸다.
“후후후, 못 말리겠군요. 그나저나 무슨 생각입니까? 겨우 백으로 사십만을 쓸어버리겠다는 건 아니겠죠.”
칼의 배짱에 리히트도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싶은데, 안타깝군.”
“허허허허, 그렇다면 알테어 방비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제가 나서겠습니다.”
기세 좋게 몸을 일으키는 리히트.
우드득.
그의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관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크허허헉! 허, 허리가?!”
심각한 격통을 느끼며 리히트는 허리를 매만졌다.
“…….”
“괜찮습니까! 어르신!”
괴츠가 벌떡 일으키며 그를 부축했고 헤이젤도 손을 거들었다.
그렇게 주변에 있는 이들이 안절부절못할 때.
후룩.
오직 칼만이 익숙하다는 듯이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칼을 보며 마틴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리 에스콰이어라고 해도 저 정도로 고령이면, 은퇴를 고려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칼은 단호하게 마틴의 의견을 물리며 말했다.
“너희는 리히트를 통해서 모든 걸 배워야 돼. 알테어가 어떤 건지, 기사도가 무엇인지, 심지어 검술조차 말이야.”
“검술이라면 차라리 다른 녀석들과 맞붙어서 터득하는 게…….”
“과연 그럴까?”
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리히트에게 말했다.
“리히트.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 좀 하지.”
“부탁이라니 과분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잠시 후.
‘진심인가?’
손에 쥐고 있는 목검과 자신의 앞에서 목검을 들고 있는 포근한 인상의 리히트를 번갈아 본 마틴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기량과 재능에 있어서 마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그의 눈앞에 잇는 리히트는 고령에다가 몸 상태도 심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 대련을 하는 걸까?
“사령관님. 악마냐?”
“난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창창한 청년과 고령의 노인을 대결시키다니…….
칼의 가혹한 명령에 헤이젤과 괴츠가 쯧쯧 혀를 찼다.
카앙!
대련 중 검을 놓친 마틴은 휘둥그레 눈을 뜬 채로 리히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저게 고령의 노인 움직임이라고?!”
나름 자신들을 강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헤이젤과 괴츠도 크게 놀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반면 마틴에게서 검을 거두어낸 리히트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역량은 인정하네. 하나 기본기를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거지. 재능만으로 검을 통달하는 건 분명 축복받은 거지만, 동시에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거네. 넘치는 재능을 몸이 감당치 못 하는 걸 나는 그 작은 틈을 꿰뚫어 봤을 뿐이고. 그 결과가 이거인 거지.”
“…….”
마틴은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동공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칼은 생각했다.
‘계속했다면 마틴이 이겼겠지. 하지만 지금의 걸로 충분해. 이 남자는 마틴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수 있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리히트가 칼에게 시선을 돌리자, 칼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련을 지켜보던 두 남자에게 말했다.
“헤이젤, 괴츠. 너희도 마찬가지다. 리히트에게 교육을 받도록.”
“알겠습니다.”
“……네.”
괴츠야 일찌감치 스승으로 모셨던 경험이 있는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헤이젤은 아직까지 다소 찝찝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렇게 우수한 전사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다니. 정말 기분이 상쾌합니다. 뭐 차근차근 익히다 보면 언젠가 슈타크 가문을 크게 빛내게 될 겁니다. 자 그럼 슬슬 고블린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을…….”
우드득.
“크허허허허헉!”
단지 가슴을 젖히며 웃음을 터뜨린 것뿐인데, 허리가 삐끗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구구. 은퇴가 마려워라. 내 팔자야.”
“…….”
리히트는 다시 통증을 호소했고, 칼을 제외한 남자들은 이 순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믿어도 되는 거 맞지?’
보다 못한 칼도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건넸다.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