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단단히 미친놈.’
칼을 쳐다보던 키이라의 눈빛에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추측대로라면 칼은 마틴의 기상천외한으로 슈타크 가문을 익히게 만들려고 일부러 프루아를 안내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 결과 프루아는 마틴에게 폭풍검과 마력 증폭이라는 두 개의 비전 검술을 탈취당했다.
‘굴욕이다.’
루콘을 떠받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슈타크의 역사에서 가장 이례적인 일로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꽈악!
리슈타 역시 깊은 진노가 실린 어조로 칼에게 말했다.
“네놈의 부하가 가문의 검술을 탈취했다. 어떻게 책임질 거지?”
“이렇게 책임지면 되는 건가?”
저벅저벅.
칼은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바그로바와 함께 마틴과 디아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꿍꿍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이맛살을 찌푸릴 때.
칼이 비어벨을 뽑아 들어 허공에 있는 힘껏 휘둘렀다.
파앗!
매서운 칼부림에 눈발이 거칠게 휘날리며 지면에 쌓인 눈이 깊게 패였다.
칼은 심홍색의 눈으로 형들과 누이를 보며 말했다.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검술을 요긴하게 써주면 되는 거잖아. 난 이 녀석들과 알테어를 지배한다.”
“네놈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마틴을 건드리면 전쟁이다.”
“뭐?”
단순히 위협하려는 게 아니었다.
심홍색의 눈에는 절제된 살기가 가미돼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언제든지 폭주하겠다는 게 다분히 엿보였다.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네놈.”
빠득!
가문의 중대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에 리슈타는 진심으로 노해 이를 갈았으나,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슈타크 가문의 업적은 존속 살해조차 가리지 않는 피로 쌓아 올린 거잖아. 루콘 방위라는 공통의 목적과 아버님의 강력한 통솔력이 있어서 유지가 되는 거지. 언제 붕괴 돼도 이상하지 않아.”
키이라는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균형을 막내. 네가 감히 깨뜨리겠다는 거야?”
“못 할 거라고 생각해?”
칼이 도리어 어깨를 으쓱이며 쳐다보자…….
“…….”
세 형제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허세로 치부하기에는 칼이 루콘의 광견으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렵게 표현할 것도 없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미친놈.’인 것이다.
형제들의 기세를 제압했다고 생각한 건지, 칼은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슈타크 가문은 최강이어야 한다. 약자는 도태되기 마련이고. 패배자는 녀석은 입을 닥쳐야 되는 거지? 어렸을 적 네놈이 한 말 아닌가? 프루아.”
움찔!
물론 칼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일기장에서 본 내용을 읊은 것뿐이지만.
그때 당시 칼의 대련 상대이자, 가해자였던 프루아로서는 간과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
충격이 어지간히 컸는지, 프루아는 아직까지 대꾸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 프루아에게 칼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약하다고 위로받고 싶은 건 아니지?”
파앗!
기세가 변했다.
어떤 욕보다도 굴욕적이고 치욕스런 한마디에 프루아는 눈가에 핏발이 잔뜩 선 채로 칼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바로 그때.
언제 나타난 건지, 헤이젤과 괴츠가 검을 교차해 프루아의 검을 막아냈다.
카앙!
격렬한 충돌로 불똥이 허공에 튀었고, 프루아는 목에 핏대를 가득 세운 채로 소리쳤다.
“죽여 버리겠어!!! 네놈! 감히 날 도구로 취급해!”
이내 검을 틀어 본격적으로 기세를 가다듬으려고 하자…….
콰직!
칼의 주먹이 어김없이 프루아의 얼굴에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우악스런 힘에 프루아는 감히 저항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이건 내 부하를 가격한 대가다.”
칼은 부어오른 디아나의 뺨을 보고는 마음에 안 드는지 눈매를 좁혔다.
“칼리언트! 네놈은 우리가 어떤 이유로 여기에 온 건지 모르는 거냐! 기고만장하기가 끝이 없구나.”
흥분한 리슈타가 따지려고 할 때.
스윽.
키이라가 먼저 앞장서서 리슈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뭐하는 짓이냐? 키이라.”
“오라버니.”
그의 매서운 눈빛에 키이라는 살갑게 웃으며 쳐다보다가…….
“조금 닥쳐주실래요?”
“…….”
엄청나게 험악한 말투에 그대로 석상이 된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서열로는 분명 리슈타가 위지만, 기백, 무력, 지니고 있는 군세까지 모든 부분에서 리슈타는 키이라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충격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힘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키이라가 형제 중 누구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저 막내에게조차 가련하다는 눈길을 주던 게 바로 그녀였다.
그 장면을 보던 괴츠는 저도 모르게 떨며 중얼거렸다.
“어후, 소름 끼쳐. 왜 이 집안사람들은 이렇게 무서워.”
“콩가루 집안이니까. 오죽하면 저 집안사람들을 혈통이 뱀파이어나 귀신의 후예라고 하겠어.”
그 말을 듣고 있던 헤이젤이 입을 가리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찌릿!
칼과 키이라는 팔짱을 낀 상태로 두 남자를 쏘아봤다.
그 살벌한 시선에 식겁한 두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침을 삼키며 은은히 떨다가…….
꽈악!
뒤에 있는 디아나에게 옆구리를 꼬집히며 타박을 들어야 했다.
“언제 철들래요?”
“아, 아파.”
“끄아아악.”
손에 상당히 힘이 실렸는지, 헤이젤과 괴츠는 고통을 호소하다 입을 막았다.
“…….”
‘긴장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정신 산만한 그 분위기에 마틴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시선에 향한 곳에는 따로 긴밀한 이야기가 있는지, 키이라와 칼이 정원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소동이 종결된 후.
키이라는 나무 사이를 지나며 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너에게 기사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어. 만약 그 시험에 통과하면 개인적인 감정이 어떻든 우리는 네가 정식 기사로 임명받을 수 있게 지지해줘야 하지.”
“그렇게 들었지.”
칼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바그로바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바그로바는 그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덩치에 맞지 않게 앙증맞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빠득!
긴장감 없는 그 모습에 키이라는 표독스런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지? 가문의 검을 부하에게 전수한 것부터 시작해서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봐?”
그녀의 말에 칼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마틴 정도밖에 없어. 라마스도 키이라도 아니야.”
도발이 아니다.
칼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뿐이고, 단지 빈정 상해 감정이 격렬해진 것뿐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키이라는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는 ‘혈족’이 아니라 ‘비전 검술의 완전한 전수’를 택하겠지.”
“?!”
그 한마디에 키이라는 눈을 부릅떴다.
‘그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어.’
혈연은 분명 가문을 계승하기에 가장 적합한 우선 조건.
하지만 루드거의 기량을 완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검술의 귀재가 있다면?
루드거는 십중팔구 그를 혈족으로 받아들이고 검술을 전수할 것이다.
특히 그 상대가 에클라 세트의 일원이라면 얼마든지 데릴사위로도 받아들인다는 선택지 역시 생긴다.
“혼례 대상을 점찍는다고 하면, 아마 키이라 너밖에 없겠지.”
“호오. 이제 누나를 거래 품목으로 삼겠다는 거야.”
키이라는 그제야 칼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일거양득.
첫 번째로 얻는 이익은 슈타크 검술을 익힌 마틴의 대폭적인 기량 상승이다.
원래부터 에클라 세트라 그 잠재적 기질이 엄청난 마틴이 이미 라흐만 대류에서 최강이라 손꼽히는 검술 중 하나인 슈타크 가문의 비전 검술을 터득한다면?
그것은 분명 전술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두 번째로 얻는 이익은 복잡하게 얽힌 정치판의 정리였다.
어차피 프루아가 칼을 지지를 안 할거란 사실은 안 봐도 뻔했다.
그 때문에 마틴을 이용해 애초에 배제하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한해 버렸다.
만약, 오기를 부리고 칼의 기사 자격 박탈에 손을 든다면?
칼은 프루아가 자신의 부하인 마틴에게 패배했다고 공공연히 알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프루아에 대한 루드거의 신뢰를 대폭 깎여나갈 게 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차후 가주 승계 자리에서 지나치게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만다.
이런 사실 때문이더라도 프루아는 칼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반대표를 꺼내 들 수는 없다.
이로써 남은 이는 키이라와 리슈타지만.
리슈타는 키이라만 설득시킨다면, 어쩔 수 없이 키이라의 의견에 수긍할 것이다.
‘아,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얄미운 놈이 돼버린 거지?’
키이라는 곤혹스러운 듯 입상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상황을 유도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만.
문제는 칼이 입을 잘못 놀리면, 키이라는 마틴과 혼약에 처할 위기라는 거다.
아직 결혼에 큰 뜻이 없는 그녀로서 이 사태만큼은 피해야만 하는 선택지였다.
꽈악!
“우리 막내. 많이 컸네. 잘난 부하 한 명으로 다 큰 누님과 형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말이야.”
그래도 화난 건 참기 어려웠는지, 키이라는 살갑게 웃는 상태로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어깨를 떨며 본격적으로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지를 받기 위한 시험의 주제는 뭐지?”
원래 절차대로라면, 프루아와 리슈타가 같이 있는 곳에서 언급해야 될 화제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프루아가 무너진 지금,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건, 키이라 그녀니까.
탁.
“귀엽지 않기는.”
키이라는 칼의 멱살을 풀어주며 입을 열었다.
“알테어에 있는 마흔일곱의 부족으로 구성된 고블린 부대를 퇴치해. 칠 일 동안 삼 할 정도만 박살 내면 돼. 대략 사십만 마리 정도 되겠네.”
“겨우?”
“겨우는 아니지. 그 녀석들의 공포는 무력이 아니니까.”
“끝이야?”
“시험 문제는 다 내줬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끝나지 않았다고?”
또 다른 용건이 있는 건가?
칼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바로 그 순간.
사락!
예리한 검 끝이 칼의 머리칼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빨라?!’
몸의 근육이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목을 젖히지 않았으면 분명 베였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운 건 바로 이 뒤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칼의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에 뒤늦게 붉은 궤적의 검기가 불꽃의 파문을 일으키며…….
콰아아앙!
폭발과 함께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 이게 무슨?!”
스릉!
어느새 검집에 자신의 검을 넣은 키이라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겨우 오러의 사출 시험 하나로 나를 능가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째서 프루아가 나랑 라마스 오라버니에게 꼼짝 못 했다고 생각해? 그건 말이야…….”
스윽.
고개를 움직인 그녀는 칼의 귓가에 넌지시 한마디를 읊조렸다.
“오러의 사출 따위로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나랑 붙었으면, 죽지는 않았더라도 팔 하나는 잃었을 거야.”
“…….”
이 순간만큼은 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보여준 실력으로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이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폭렬검. 슈타크 가문의 비전이 아니니 모르겠지. 이건 아카데미에 있던 시절, 맥캘리와 함께 연구한 그랜드 마스터의 검술 비전 중 하나야.”
“?!”
“익히고 싶으면 익혀봐. 너의 건방진 부하도 하는 걸, 네가 못 하지는 않겠지.”
키이라는 싱긋 웃으며 칼의 어깨를 두 번 두들기더니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휘잉!
그리고 다시금 차가운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강자들로 넘쳐나는군. 이 가문은…….”
칼은 그제야 자신이 등지고 있는 슈타크 가문의 힘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