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화창한 오후.
달그락, 달그락.
굶주림에 시달렸던 괴츠는 그 덩치답게 허겁지겁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비워나가고 있었다.
“저건 완전히 돼지네.”
옆에서는 식사를 마친 헤이젤이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걱우걱.
“부만 이으나(불만 있냐?)”
괴츠는 고기를 한가득 입에 물며 헤이젤에게 따지듯 반박했고.
“못 알아들으니까 다 씹고 말해.”
헤이젤은 쯧쯧 혀를 차며 이번에는 마틴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마틴도 디저트를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포크로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는 그 모습은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음미하기 위해 아껴 먹는 걸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다 길바닥 출신이라고 했지?’
“허허허허, 모두 건강해 보이는 장성들이 모여 있으니 참 보기가 좋습니다.”
칼의 종자인 리히트는 괴츠와 마틴을 보며 훈훈하게 웃어 보였다.
‘여든 가까이 되는 노인까지…… 대체 이 작자는 무슨 생각인 거지?’
강력한 무력을 가지는 건 당연하고, 기사단의 주축이 될 기사들이라면 교양 역시 겸비해야 한다.
헤이젤은 나른한 표정으로 홍차만 홀짝이는 칼을 보며 물었다.
“사령관님은 디저트 안 드십니까?”
“단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
갸르르릉.
그리 대답한 칼은 자신의 발치 부근에서 앞발을 핥으며 재롱을 부리고 있는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본 사이에 늑대 정도의 크기까지 성장한 녀석은 어엿한 성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건지, 목과 머리 부근에 붉은 갈기가 돋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헤이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그로바를 쳐다보다 질문을 건넸다.
“사자가 이렇게 추운 데서 활동이 가능합니까?”
“특수한 종이거든.”
칼은 한쪽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양손에 깍지를 끼우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식사는 어느 정도 마친 것 같으니까 이야기를 해볼까?”
쾅! 쾅!
대뜸 시작된 이야기 전개에 당황한 괴츠는 물과 함께 볼 안에 빵빵하게 넣은 음식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잠시 후.
시녀들이 테이블을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가자 칼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이 알테어를 정복하는 게 목적이고, 그 주축이 되는 구성원으로 너희를 선택했지.”
“…….”
파격적인 칼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경청했다.
투덕거리기만 할 뿐. 서로의 과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서로 알고 있다.
다들 스트레이독스며 누구의 명에 따르지 않는 단 홀로 방황하는 강자들이라는 것을…….
그런 자신들을 칼은 주먹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통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모두 아닌 척하고 있지만,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장차 이 넓고 넓은 라흐만 대륙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하지만 기사단을 창설하기 위해선 아직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지. 그건 너희 스스로 알고 있겠지?”
“이 남자가 머리가 비었다는 것 정도는.”
“아니, 뭐야!”
느닷없이 헤이젤이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자, 괴츠는 크게 흥분했다.
“촐싹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어.”
마틴은 그런 헤이젤과 괴츠를 쏘아봤다.
찌릿찌릿!
무력은 인정하지만, 아직 자존심이 완전히 굽히지 않았는지,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애들도 아니고 뭐 그런 걸로 싸우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내가 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처음은 어수룩할 수밖에 없어.”
이때 리히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그치자, 고조됐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완화됐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말대로 너희들의 부족한 부분은 리히트가 채워줄 거야. 결정적인 결함은 나에게 있으니까. 흥분할 필요는 없어.”
결점? 이 남자한테?
이 순간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모여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것이 칼이지만 그 역량을 감히 재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리히트가 모두에게 설명해주었다.
“별 것 아닐세. 칼리언트 님은 알테어의 사령관으로 임명받기는 하셨으나, 정식 기사가 아니라 견습 기사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네.”
마틴과 괴츠는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헤이젤은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사 임명식을 거쳐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아주 영광스런 자리가 될 걸세. 칼리언트님이 기사가 되신다면, 곧장 기사단장으로서 자네들을 기사로 임명할 수 있으니 말일세.”
무엇보다 가문의 가주인 루드거가 칼을 밀어주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야기는 차근차근 진행 중일세. 그리고 곧 임명식 관계자로 키이라님과 프루아님, 리슈타님이 이곳 알테어로 올참이라네.”
리히트의 말에 칼은 마틴을 쳐다봤다.
“마틴.”
“부르셨습니까?”
모두가 같이 있는 자리였기에 마틴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칼에게 존대를 했고.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디아나와 같이 가서 그 녀석들을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명령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마틴은 명령의 의도를 해석하기 전에 예를 갖추며 답했다.
* * *
차가운 눈보라가 그친 알테어의 성곽에 세 개의 마차가 도달했다.
“이 땅은 여전히 죽어있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키이라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거칠고 살벌한 하얀 다이어 울프들의 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냥감의 선택을 잘못한 녀석들은 모조리 키이라의 검격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쿵!
키이라는 마차 지붕에서 떨어진 거대한 다이어 울프의 시신을 시종들에게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모피코트라도 만들어 놔.”
“아,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뒤뚱거리며 다이어 울프의 시체를 운반했다.
끼익.
두 번째로 마차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차남인 리슈타였다.
그는 자신의 마차와 달리 비교적 깨끗한 키이라의 마차와 프루아의 마차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큰 고난을 겼었느냐는 상관없다.
마차에 손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은연중 이들 남매간의 무력 차이를 느꼈다.
“형님. 큰 고난이 있었던 것 같군요.”
뒤이어 마차 문을 열고 내린 프루아는 그런 리슈타를 조롱했다.
‘하여간 이 자식은!’
리슈타의 이마에는 핏줄이 팽팽하게 차올랐지만, 구태여 분란을 빗지는 않았다.
애석하게도 눈앞에 있는 키이라와 프루아는 자신보다 압도적인 강자였기 때문이다.
“프루아.”
그나마 슈타크 가문에서 위계와 배려를 중시하는 키이라가 프루아에게 경고를 주었다.
“칫!”
키이라에게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던 프루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홱 저었다.
‘진짜 형제애가 없나 보네.’
그들의 맞은편에 있던 디아나는 눈치를 살피다 살갑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알테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칼리언트 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화사하게 인사를 했음에도 돌아오는 답이 없자, 디아나는 민망했는지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녀의 옆에 있던 마틴은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불만 있냐? 굉장히 거슬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네.”
프루아는 눈에 힘을 주며 마틴을 쏘아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안내하겠습니다.”
“조심해라.”
마틴은 주먹을 꽉 쥐며 겨우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잠시 후.
마틴과 디아나는 칼이 머무는 궁궐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길을 걷던 프루아는 눈에 파묻힌 정원을 보며 피식 비웃었다.
“나아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네. 아니, 내가 통솔하던 때보다 못한데? 안 그렇습니까? 형님.”
“어차피 죽음의 땅이야. 칼리언트 녀석이 시건방져져봤자 결국 여기에 생을 마감해 거름조차 되지 못하겠지.”
울컥!
대놓고 칼을 괄시하는 말투에 디아나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희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프루아는 그 기색을 진작 눈치 챘는지, 조롱하듯 말을 이어갔다.
“광견이라고 불려서 지가 뭐라도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 녀석은 결국 주제도 모르고 나서다가 죽음의 땅에 묻힌 망자로 가문에 기억될 거야. 아, 그럼 똥개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네.”
꽈악!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자칫 하다가는 형제간의 큰 분란을 빗을 수 있으므로 디아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화를 다스렸다.
“푸하하하하! 분해서 눈물까지 머금고 있네. 너 그 똥개 뭐라도 되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서로 앙숙처럼 대화를 나누던 둘이지만, 공동의 적인 칼에 대한 험담을 할 때는 놀랍도록 죽이 잘 맞았다.
이런 수준 낮고 질 떨어진 대화에 키이라는 구태여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자, 결국 엄포를 늘어놓으려고 했다.
“걸레짝을 물고 있는 숭고한 아가리네. 짜주고 비틀어주면 닥치려나.”
하지만 마틴이 입을 열리는 게 더 빨랐다.
“?!”
그 한마디에 슈타크가의 남매뿐만 아니라 디아나도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 마틴님.”
디아나가 마틴의 손목을 잡아 만류하려고 했으나.
짜악!
“꺄아아악!”
이미 도발에 넘어간 프루아는 거칠게 디아나의 뺨을 내리친 다음 마틴의 코앞에 도달했다.
“뭐라고 했냐? 천박한 잡종 나부랭이가.”
프루아의 흉포한 붉은 색 안광은 무엇이든 불태울 것 같았으나.
주저 없이 휘두른 마틴의 주먹을 맞고는 저만치 날아가버렸다.
파앗!
고꾸라지는 사태는 면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해 혀를 씹어버린 프루아의 입가에서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나왔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프루아의 이마에는 핏대가 솟구쳤다.
안 그래도 이곳에 다시 올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 부하들마저 그를 제대로 자극했다.
화아아악!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디아나도 눈을 부릅뜨며 전신에 흑운 같은 마력을 두르기 시작했다.
“하아? 다들 제정신이냐?”
자신에게 대적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본 프루아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죽고 싶어 안달 났군.”
리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틴과 디아나를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심정을 거슬리게 하는 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여 버린 프루아의 행적으로 볼 때, 절대 가만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막내의 부하들은 다들 제정신이 아니네.”
지금까지 지루해하던 키이라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관전 자세를 취했다.
“디아나, 나서지 마.”
“하, 하지만.”
마틴의 저지에 디아나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고, 마틴은 스스로 프루아와 대치 구도를 펼치며 검을 빼 들었다.
“나 혼자로 충분해.”
울컥!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굴욕에 프루아의 눈에는 진심으로 살기가 차올랐다.
“칼리언트한테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단단히 미쳤군.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교육이 필요한 건 너겠지.”
마틴은 엉성한 자세로 검자루를 손에 쥐며 도발을 했고 프루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런 마틴에게 물었다.
“……너 검은 쓸 줄 아냐?”
“실전에서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
돌아온 대답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에 키이라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고, 리슈타는 마틴을 비웃었다.
그와 동시에 프루아가 기습적으로 검을 빼들어 마틴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프루아의 검은 검집에서 뽑힌 마틴의 검에 막혔다.
“?!”
프루아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고, 마틴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의 언사를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부터 배워도 너 같은 건 충분히 구워삶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