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탁탁탁.
늙수그레한 손으로 조각칼을 쥔 노인은 애틋한 눈빛으로 나무를 조각하고 있었다.
끼익.
그때 빗장 문이 열리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마틴!”
깜짝 놀란 노인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손수건을 들며 마틴의 상처를 살폈다.
“쯧쯧, 또 싸운 거니?”
한심하다면서도 걱정하는 눈길에 마틴은 미안한 듯 시선을 회피했다.
“자꾸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해요? 거리에서 파는 할아버지 인형도 지들 멋대로 부숴버리는 바람에…….”
“마틴. 네가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하단다. 보자. 약이 어디 있으려나.”
뵈제하워는 마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선반에서 약을 찾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그러다 사레가 들렸는지 입을 막고 기침을 했는데, 입을 막던 손에서는 피가 묻어 있었다.
“…….”
뵈제하워는 무심하게 손수건으로 손과 입을 닦으며 약을 꺼내 마틴에게 다가갔다.
스윽, 스윽.
상처에 약을 바르기 시작한 뵈제하워는 피식 웃으며 마틴에게 말했다.
“마틴.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니?”
“딱히 없어요.”
“아마 너는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경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자라게 될 거다.”
“어떻게 알아요?”
“너의 재능은 그런 것이니까.”
뵈제하워는 싱긋 웃으며 마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마틴은 부끄러웠는지 다시 한번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너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 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쫓아가지 않아도 된다. 너무 다급할 것도 없어. 엉뚱하고 못된 짓이나 일삼는 녀석이 아니면 마음이 가는 사람을 따라가면 된다.”
“제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못 말리겠구나.”
그런 일 없다고 단언하는 표정에 뵈제하워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마틴을 끌어안았다.
“……쑥스러우니까 그만 하세요. 할아버지.”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당시 어렸던 마틴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꿈은 생각보다 길었다.
의식을 되찾을 때는 몸이 찌뿌둥하고 아직까지도 근육 곳곳이 비명을 내지르며 격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자식!”
마틴은 기절하기 전, 칼의 심홍색 눈빛을 떠올리고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가까스로 눈을 떠 몸을 일으키자…….
난로가 지펴진 낯선 침실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끼익.
때마침 문이 열리며, 애쉬 그레이 색의 머리칼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일어났어요.”
“……너는 누구지?”
“이름은 디아나 모르프 베네피카. 칼리언트 님을 보좌하고 있는 흑마법사에요.”
“마틴 뵈제하워야.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이제 막 깨어난 터라 경황이 없던 마틴은 불안함에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억지로 끌려왔다고 했었지.’
디아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검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휘이이잉!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으로는 아스피스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곳은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땅, 죽음의 전선 알테어. 당신은 알테어의 사령관 칼리언트 슈타크 님의 부하로 이곳에 있는 겁니다.”
“……그런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한 마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쟁탈전에서 자신은 패배했고, 그 결과 칼에게 끌려온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마틴은 스스로 패배를 받아들였다.
지금까지는 수많은 악인들이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마틴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요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반면, 칼은 그 방법이 매우 거칠고 난폭하긴 했어도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데려왔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저 아스피스에 남아있을 식솔들이 걱정될 뿐이었다.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내가 없어서 울지나 않았으면 싶은데.”
그 중얼거림에 디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스피스에 있는 식구들은 모두 이곳 알테어에 정착했어요. 지금은 열심히 싸움 중이라 정신이 없고요.”
“?!”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마틴은 눈을 부릅뜨며 디아나를 노려봤다.
“싸움이라니. 설마?!”
이런 흉흉한 땅에서 어린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벌인 걸까?
분노로 일그러진 마틴의 얼굴을 본 디아나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창밖을 내려다보세요.”
“창밖?”
반문과 함께 마틴은 창문을 열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퍼퍼퍼퍼퍽!
“하하하하하.”
바로 밑에서는 온몸이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슈미트가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아, 내 나이를 생각해!!”
“꺄아아악!”
슈미트는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눈뭉치를 던졌고, 아이들은 그런 슈미트를 피해 깔깔거리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
“…….”
마틴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흐흠.”
디아나는 헛기침을 하며 마틴에게 칼의 전언을 전해주었다.
“‘밥값 해야 되는 놈들은 다 큰 사내놈들이고, 이제 네 부하가 아니라 내 부하가 됐으니까 참견하지 마. 몸조리 끝났으면 곧장 찾아오고.’라고 칼리언트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녀석들.”
마틴은 이전 자신의 부하들을 떠올리며 이마를 매만졌다.
기절하느라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상황이 어떤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마틴과 함께 있고 싶다.
그 일념 하나로 칼을 따르게 됐다는 것을.
“그 남자는 어디 있지?”
“의외로 가까이 있어요.”
“설마?”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디아나의 말에 마틴은 다시 한번 창 밑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향한 곳은 측백나무들이 몰려있는 그늘 아래.
갸르르릉.
그곳에서 칼은 자신의 애완동물인 바그로바와 놀아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칼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슈미트와 아이들의 눈싸움하는 것을 지켜보는 중이고, 바그로바 혼자 신나 칼의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에는 냉철한 느낌을 자아내던 심홍색의 눈이 지금은 무척이나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의외네.’
칼에게서 편안한 기운이 느껴지자, 마틴은 자신과 싸웠던 남자가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퍼억!
칼이 슈미트가 던진 눈 뭉치에 얼굴을 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꿀꺽!
순간 아이들과 슈미트는 고인 침을 삼켰다.
얼굴의 눈을 털어낸 칼은 슈미트를 쏘아봤고.
“쟤, 쟤가 던졌어! 나 아니야!”
슈미트는 옆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궁색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칼은 지체없이 눈뭉치를 슈미트에게 집어 던졌고 슈미트는 재빨리 고개를 수그렸다.
파앙!
표적을 비껴간 눈뭉치는 슈미트가 만들어둔 거대한 눈사람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며 허공에 하얗게 퍼져나갔다.
“히익! 자, 잠깐!”
그 엄청난 위력에 기겁한 슈미트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고.
스윽.
칼은 다시 한번 눈을 꼭꼭 눌러 뭉치기 시작했다.
“도망가! 짱돌 집어넣은 거랑은 비교도 되지 않아!”
“꺄아아악!”
슈미트는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과 대피했다.
“…….”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틴은 황당한 나머지 안면근육이 경직됐고, 디아나는 곤란한 웃음을 내비쳤다.
* * *
작은 소란이 종결된 후.
집무실에 복귀한 칼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집무실 의자에 착석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위엄있는 모습으로 앉아있을 법했지만.
칼에게서는 그런 허례허식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 귀족 맞아?’
집무실까지 칼을 쫓아온 마틴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제부터 나는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도 이제는 자신이 따르기로 한 남자니 몸에 맞지도 않는 격식을 차렸으나.
“뻘짓하지 말고 앉아.”
“…….”
칼은 마틴에게 무안을 주었다.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이 빨개진 마틴은 칼에게 이를 드러냈지만, 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우를 갖추는 건 남의 눈에 보이는 데서만 해.”
“……그, 그러지.”
이상한 대우에 마틴은 이게 맞나 싶어 어울리지 않게 눈치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적응할 틈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검술이나 무기를 다룰 줄은 알아?”
마틴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맨손으로만 싸워서 사용해본 적은 없어. 그렇다고 남들보다 못 휘두를 것 같지는 않아.”
‘그러겠지.’
뒷골목에서 싸우던 시절에 검사와 싸운 적이 있었을 테고, 마틴은 그 과정에서 검술을 눈으로 보고 카피해 익혔을 것이다.
“차라도 마시고 있어. 이야기는 리히트가 오면 시작하지.”
“리히트?”
잠시 후.
끼익.
집무실 문이 열리며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알테어 업무는 방대하군요. 허허허허.”
“……?”
예상치 못한 노인, 리히트 가넷의 등장에 마틴은 칼을 쳐다봤다.
“내 종자인 리히트 가넷이야.”
소개와 함께 리히트는 마틴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촉망받는 인재라고 기대를 많이 하시더군요.”
“그런 솔직한 칭찬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쓸 만한 놈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는 했지.”
울컥!
자신에 대한 야박한 평가에 마틴은 칼을 홱 쏘아봤다.
“하하하하하, 과연 패기가 넘치는군요. 콜록, 콜록, 콜록.”
털털하게 웃던 리히트는 사례가 들렸는지 독하다 싶을 정도로 헛기침을 했다.
이에 마틴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다가 조심스레 칼을 쳐다봤다.
“괘, 괜찮은 거 맞나?”
“괜찮아.”
칼은 별 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아마도.”
라며 끝말을 남겼다.
“…….”
리히트가 편안히 호흡을 되찾고 난 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칼은 그동안 조사하며 만든 알테어 지도를 보여주었다.
지도에는 특정 몬스터 세력이 분포된 곳이나 아니면 타 국가에서 만든 비밀 연구기관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빗금으로 표시돼 있었다.
“알테어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 구도야.”
“참담하네.”
지도와 그동안 기록을 살펴본 마틴은 확실히 힘들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에클라 세트라고 해도 알테어의 복잡한 관계들을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이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칼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마틴은 판단했다.
“알테어를 정복하는 건,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그리고 칼은 냉정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리히트는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고.
칼은 팔짱을 낀 상태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기사단을 구축해서 알테어를 평정할 거야. 그에 따른 준비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고.”
“옳으신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주축이 되는 기사가 마틴 한 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냉정한 지적에 칼은 눈매를 좁히며 리히트에게 반문했다.
“그래서?”
그리고 이런 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리히트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장 생각해두신 분이 없다고 하신다면,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