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아스피스의 슬럼가.
프리메이슨의 용인 아래 이곳에는 다양한 음지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흉악한 데다 탄탄한 기반 역시 마련이 됐음에도 이곳 음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이 슬럼가에서 탄생한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마틴 뵈제하워.
장난감 공방의 노인, 뵈제하워의 손에서 길러진 이 고아는 뵈제하워의 사후 뒷골목을 장악하기 시작하더니, 이후 ‘쟁탈전’이라는 문화를 이용해 아스피스의 음지를 정복했다.
전 세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음지의 세력도 쉽게 해내지 못한 일을 겨우 주먹 하나로 평정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음지의 조직들은 일제히 당황했다.
처음에는 쟁탈전의 룰을 무시하고 다수로 습격하고 흉기를 드는 등의 결투가 벌어졌다.
마틴은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그들을 모두 몰살시켜버렸다.
그로 인해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기가 찾아왔다.
다행히 그 시기는 길지 않았다. 한 조직이 쟁탈전의 룰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이름은 프리메이슨.
음지의 세력이 확장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검은돈을 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난장판이 돼서 그럴 기회마저 사라지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전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슬링거는 마틴이 규정한 쟁탈전의 룰을 지지했고.
그 뒤로 다른 음지의 세력도 룰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딱히 룰을 지지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프리메이슨의 신용도가 깎여나간다는 것은 검은돈을 만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슬럼가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음지의 세력, 오르카.
메노스 템벨의 붕괴 이후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이 집단은 출몰 이래 2년간 마틴에게 쟁탈전에 패배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조직 규모나 실력자로 따지자면, 메노스 템벨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지만.
오르카의 수장, 클레이브는 탐욕이 심하고 허황된 꿈에 사로잡힌 자였다.
주홍색 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세력을 불리고 싶지만, 쉽게 되지 않아. 마틴을 남몰래 독살하는 법은 없을까?”
“프리메이슨의 눈에 띄게 될 겁니다.”
“끄응.”
수하의 답변에 클레이브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희 진짜 바보구나. 어떻게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거야?”
그때 뒤에서 문득 들려오는 말에 클레이브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그러나 그는 결코 분노한 기색을 내지 않고 사근사근한 어투로 말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사과를 아삭 씹어 먹은 뒤 남은 쪼가리는 그대로 아지트 바닥에 내던졌다.
“…….”
클레이브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참았다.
눈앞에 있는 청년이 바로 이곳 아스피스 영지를 다스리는 카랄레스 자작의 아들, 콜챠크 칼랄레스.
성정이 지독히 포악해 하인들을 때리고 욕하고 짓밟기 일쑤였고.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초야권을 행사해 억지로 동침을 하는 등의 만행을 벌여 농노들의 빈축을 사고 있는 망나니였다.
하지만 그의 만행은 아스피스 영주, 칼랄레스 자작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이 용인됐다.
이유는 단순히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음지의 세력도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바로 이 남자였다.
혹여 콜챠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스피스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평소 주색에만 몰두하던 그가 어째서 이런 흉흉한 지역까지 오게 됐을까?
이유는 하나.
슬럼가를 정복한 마틴에게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꽤 먹었지만, 잘만 교육하면 분명 강대한 기사가 탄생하리라.
언젠가 길거리에서 마틴이 싸운 광경을 보던 그는 전율과 함께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마틴을 가지기 위해 그가 선택한 조직이 바로 오르카였다.
“너희들의 문제는 쟁탈전인가 뭔가 하는 말도 안 되는 룰을 지킨다는 거야.”
콜챠크는 자연스럽게 회의석에 앉으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쟁탈전은 프리메이슨의 지지가 있기에 거스를 수 없습니다.”
“판도를 유리하게 바꾸면 그만 아닐까?”
“어떤 말씀이신지…….”
알 수 없는 속내에 클레이브가 곤혹스런 기색을 비쳤고, 콜챠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인질을 사용하면 되지.”
“하, 하지만 그건.”
“프리메이슨?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아버지랑 협업하는 기관 중 하나에 불과해. 내가 승인하지. 그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가 줄 거야. 그러니까 줄 수 있지? 그 장난감.”
콜챠크는 싱긋 웃으며 클레이브를 바라보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클레이브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명을 받아들였다.
* * *
모닥불이 활활 피어오르는 아래,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
우물우물.
칼은 팡고가 건네준 야채찜을 씹어 먹으며 무뚝뚝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옆에서 귀리 죽을 수저로 더 먹고 있던 제이크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아이들 숫자가 많네요.”
마틴은 아스피스의 슬럼가를 주먹 하나로 평정한 사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제이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호화로운 저택에 살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먹는 것이나 입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수저로 죽을 홱홱 젓던 팡고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오지랖이 넓어서 그래. 입이라도 하나 덜어주려고 독립하려고 했건만. 또 잡혀 왔잖아.”
“소매치기는 아니지.”
제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었다.
이에 팡고는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틴은 무리하고 있다고. 지금은 ‘쟁탈전’이라는 룰 덕분에 아스피스를 평정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누가 칼이나 다수로 덤벼들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나라도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거지.”
‘겉보기엔 철부지 애 같아서 속마음은 어른이네.’
제이크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표정으로 팡고를 바라봤고, 칼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말했다.
“그런 걸로 제압이 가능한 녀석이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수준이 너무 높아.”
‘칭찬에 야박한 인간이 누구한테 칭찬하는 건, 또 드무네.’
제이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칼의 말에 경청했다.
“내 생각에는 조만간 저 실력을 알아본 이 때문에 큰 낭패를 보게 될 거야.”
“?!”
칼의 말에 팡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던 마틴도 칼의 말을 들었는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칼에게 다가왔다.
“이야기 좀 하지.”
“그러지.”
칼은 몸을 일으켰고 마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팡고도 일어섰다.
“넌 여기 있어.”
물론 그 행동을 간파한 마틴이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았다.
“싸우면 안 된다?”
팡고가 지그시 자신을 응시하자, 마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투견이라도 되는 줄 아냐?”
‘우리 사령관님은 광견인데.’
제이크는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찌릿!
그러자 칼이 제이크를 노려보았다.
크게 놀란 제이크는 딸꾹질을 하며 칼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후.
처마 아래에서 칼과 마틴은 등을 벽에 붙인 채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그냥 너희들한테 흥미가 생겨서. 넌 왜 편하게 살 방법을 놔두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냐?”
“…….”
슬쩍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던 마틴은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처음에는 칼이 불순한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목적이 좀 더 순수하다는 걸 깨닫자 기분이 묘해졌다.
“너 귀족이지?”
“그렇다면?”
딱히 부정을 하지 않는 답변에서 마틴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버려진 녀석들이야. 그중에는 철부지 귀족의 사생아들도 있지.”
검처럼 벼려진 눈동자에는 증오와 원망이 서려 있었다.
칼은 팔짱을 끼며 묵묵하게 있었고 마틴의 말은 계속됐다.
“이곳에 있는 아스피스 영주는 명망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농노들이 퍼주는 풍족한 식량 가지고 축복의 땅이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이야. 그래서 난 귀족이라면 환멸을 느껴.”
“나도 귀족이라서 마음에 안 든다는 거네.”
“당연하지.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당장 꺼져줬으면 좋겠어.”
마틴은 칼을 내려다보며 눈에 미미한 살기를 발산했다.
찌릿!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예리하게 다듬어진 살기에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지금 쓰고 있는 힘은 어디에서 배운 거지?”
마틴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나를 영입하기 위해서 여러 실력자가 왔었거든. 사상이 비슷하다고 메노스 템벨이란 곳에서 영입 제안을 하기도 했고, 어쌔신 길드에서도 섭외요청이 있었지. 입장 상 모두 거절했지만 녀석들은 순순히 돌아가지 않았어. 그래서 그 녀석들을 죽이고 그 녀석들의 기술을 터득한 거야.”
“…….”
한순간 칼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어쌔신 길드의 실력은 짐작할 수 없지만 메노스 템벨과는 수차례 대치해왔기에 그 실력을 알고 있다.
아마 마틴은 메노스 템벨에서 최고 실력자인 ‘메이거스’ 등급의 일원과 다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슬럼가의 건달이 비밀결사의 일원을 살해하고 그들이 사용한 기술을 빼앗았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약 마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추정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마지막 일곱 번째 조각이 여기에 있었군.’
아직 힘을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에클라 세트.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음에 드는군.”
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마틴을 쳐다봤다.
“뭘 봐. 눈깔 쪼개줄까?”
마틴의 비아냥거림에 칼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틴. 내 부하가 돼라.”
“뭐?!”
뜬금없는 영입 제안에 마틴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 이내 코웃음을 쳤다.
“결국 너도 다른 녀석들이랑 똑같은 녀석들인 거네. 거절한다면?”
슬며시 쥐었다 피는 그의 주먹에서는 은은히 마나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느낌으로는 오러도 사용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이곳 슬럼가에서 그렇게 눈에 띄고 싶지 않았을 테지.’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기서 계속 머물렀다가는 도태될 뿐이야. 기껏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협소한 곳에서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다가 생을 마감할 거냐?”
“다 아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
“주먹이 쑤시는 것 같네. 좀처럼 괜찮은 사냥감이 안 와서 그러는 거냐?”
정곡을 찔렸는지, 마틴이 칼의 명치를 향해 쾌속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그 움직임을 간파한 칼은 주먹을 잽싸게 막은 다음 으스러질 듯이 쥐었다.
꽈아아악!
‘무슨 힘이!’
깜짝 놀란 마틴이 손을 빼려고 했으나, 칼은 우악스럽게 힘을 주며 흥미에 찬 눈으로 말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이야. 나를 따라라 마틴. 더 넓은 세상의 지옥을 보여줄 테니까.”
자신만만한 그 태도에 마틴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나도 주변에서 빈축을 많이 산다고 하지만, 넌 대놓고 미친 새끼 취급받을 것 같은데.”
“재미없게 사는 것보다 낫지.”
칼은 한쪽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틴의 주먹을 풀어주었다.
마틴은 재빨리 칼과 거리를 벌리며, 전신의 기도를 해방했다.
우드득.
주먹의 관절을 풀던 마틴은 곧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 아까부터 날 하수로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넌 뭘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한 거냐? 에클라 세트라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한 명 빼고는 전부 다 내 밑이다.”
“?!”
예상치 못한 화제 언급에 크게 당황했던 마틴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넌 미쳤어. 칼리언트.”
스멀스멀.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담청색의 기운은 성운처럼 반짝이며 그의 재능이 하늘에게 부여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 칼이 기세를 끌어올리려는 찰나.
콰앙!
마을 저편에서 심상치 않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