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마틴과 도크만의 결투는 허무하게 마틴의 승리로 끝이 났다.
누가 봐도 조작이 아니냐고 비난을 퍼부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 누구도 이 결투가 결코 조작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인 도크만은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부은 상태로 고꾸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 밑에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마틴의 이름을 환호했다.
“캬아~ 역시 이 맛이지.”
“푸훗! 도크만? 어디서 온 삼류 나부랭이나 믿고 돈 건 놈 누구냐? 내놔.”
실제로 그들의 싸움을 두고 판돈까지 오고 가는 풍경까지 엿보였다.
가까이서 마틴의 움직임을 살피던 제이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우와! 눈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동안 칼의 훈련으로 나름 동체 시력이 좋아졌다고 생각했건만.
마틴의 움직임은 마치 신기루가 일렁이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라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저렇게 빠른데, 마치 걷는 것처럼 보였어.’
제이크가 넋을 놓고 보자 팡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봤지? 마틴은 강하다고.”
“…….”
“사령관님?”
팡고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황한 제이크가 칼을 불렀지만, 칼은 냉철한 눈으로 마틴의 방금 전 움직임을 떠올렸다.
‘암살자가 쓰는 보법을 사용하고 있어. 뒷골목 건달들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고급 기술인데.’
어째서?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자, 칼은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
“네.”
“가서 상대하고 와봐.”
“…….”
잘못 들었겠지. 응 잘못 들었을 거야.
못 들은 척 고개를 홱 돌렸지만.
“죽고 싶냐?”
단호한 어조에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칼에게 말했다.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너밖에 없잖아. 게다가 전투행정관 능력도 한번 보고 싶거든.”
‘그냥 행정관이라고!’
없는 보직을 만들어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아마 칼밖에 없으리라.
제이크는 별수 없이 마틴의 앞에 다가갔다.
“뭐야?”
“설마 마틴에게 도전하겠다는 거야?”
사람들이 모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볼 때, 마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거울은 안 보나 보네.”
“아니요. 멀쩡히 잘 보고 있고요. 가급적 얼굴은 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척!
정중한 말투와 함께 제이크는 양쪽 주먹을 들어 올렸고, 마틴은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시건방져 보이는 귀족의 꼭두각시 같네.”
‘정답! 눈치 엄청 빠르네.’
자신과 칼이 일행이라는 것은 단숨에 간파하자, 제이크는 적잖이 당황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자주 와 자기들의 권세를 보여주고 날 포섭하려고. 근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다 깨졌다?”
“정답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마틴이 제이크의 바로 앞에 도달해 아까와 같이 미간을 치려고 했다.
파앗!
그 일격이 닿기 직전, 제이크는 고개를 수그려 가까스로 일격을 피해냈다.
“후우, 후우, 후우.”
몸을 수그린 제이크는 숨을 헐떡거렸고, 마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력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잔재주 정도는 부릴 수 있습니다.”
파앗!
대답과 함께 제이크는 왼발로 마틴의 오른발을 강타하려고 했다.
콰직!
“끄아아아악!”
마틴은 단숨에 제이크의 발을 짓밟은 뒤, 주먹으로 위용 찬 일격을 날렸다.
쇄액!
공기를 쇄도하는 압도적인 공격에 제이크는 재빨리 양손으로 그의 주먹을 받아쳤다.
콰아앙!
데구르르르.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이길 수 없었는지, 그는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마틴은 생각 외로 치명상이 나오지 않자…….
“조금 진심을 보여줘야겠네.”
뚜둑.
손가락의 관절을 풀어주고선 뒤뚱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제이크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와아! 엄청 빨라!”
“지금까지 마틴이 보여준 움직임 중에서 가장 빠른데.”
쇄애애액!
마틴의 움직임은 질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덥석!
그 움직임은 중간에 난입한 칼로 인해서 막혀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마틴이 저렇게 움직일 때, 한 명도 못 따라잡았는데.”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들은 경악했고. 마틴은 눈살을 찌푸리며 칼에게 물었다.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힘도 못 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전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마틴은 눈꼬리를 삐죽 세웠다.
“아, 이게 힘을 쓴 거라고 착각했나 보구나.”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했다.
꽈아아악!
“?!”
주먹이 터질 것 같은 힘에 마틴은 재빨리 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쇄애애액!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칼의 뺨을 스쳐 미세한 혈선을 남겼고.
콰앙!
칼은 마틴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칼은 마틴을 벽 안에 박아 넣을 심산이었지만. 마틴은 고양이처럼 재빨리 허공에서 균형을 잡아 발로 벽을 밀치고 바로 섰다.
“…….”
예상치 못한 호전적인 격투에 구경꾼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마틴이 누군가와 세 수 이상을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빠직!
“제법 하는데.”
자존심에 빗금이 간 마틴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지만.
“겨, 경비병들이 오고 있어!”
“이크!”
감시를 하던 누군가의 경고와 함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행렬에 묻힌 칼과 마틴은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흥이 식었는지 마틴은 주먹을 거두며 칼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칼리언트.”
“칼리언트라…… 기억해두지. 그리고 너!”
마틴은 눈을 희번득 뜨며 제이크의 뒤에 숨어있는 팡고를 응시했다.
“드, 들켰나?”
팡고는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집에 안 들어오면 죽는다.”
마틴이 쌍심지를 켜며 으름장을 놓자, 팡고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마틴. 나도 다 컸는데.”
찌릿!
“……알았어. 들어가면 되잖아.”
마틴의 살벌한 눈빛에 팡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달려갔다.
“다음에 또 봐, 오빠. 마틴이 저렇게 당황하는 거 나 처음 봐서 재밌었어.”
“팡고!”
“으윽! 알았다고!”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고, 마틴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과 제이크에게 팡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린 가족이거든.”
할 말을 마친 그녀는 유유히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 *
해질녘.
주홍빛 햇살 사이로 까마귀들이 다리 밑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다리 밑을 걷고 있던 제이크는 널찍한 도시의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장 번영하는 도시인데도 이렇게 음지 세력이 가득한 게 아이러니하네요.”
“욕심이 가장 많이 집결되는 곳이니까. 욕심이 가득한 녀석들이 몰려 있는 거지.”
실제로 이곳보다 훨씬 발달 된 이실리아에서는 더 추악한 집단들이 몰려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도 그러네요.”
칼의 말에 납득한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 참 영악하지 않아요? 자기 오빠가 챔피언인 걸 저희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접근했나 보네요.”
“그렇게 생각해?”
“아닙니까?”
제이크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잽싸게 자신의 소지품을 살폈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고, 녀석이 말한 가족은 핏줄 같은 의미가 아닐 거라는 뜻에서 말한 거야.”
“어,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확실히 닮지 않기는 했지만.”
제이크의 질문에 칼은 하나씩 답변을 늘어놓았다.
“녀석이 말한 우리라는 대목이 왠지 한두 명을 지칭한 느낌이 아니란 말이지.”
“설마 그 호기심 때문에 직접 찾으러 가는 겁니까?”
“그렇지, 뭐.”
파직!
어느새 칼이 딛고 있는 지면에는 서킷이 반짝 요동치며 어디론가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 * *
허름한 건물들이 몰려 있는 폐촌.
루콘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아스피스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난히 낙후된 이곳은 음지의 세력들이 대거 몰려 있었는데.
그 중심을 꿰찬 것은 바로 마틴의 세력이었다.
“하하하하하.”
마틴의 세력이 머무는 곳에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을 차며 떠들고 놀고 있었다.
건장한 사내들은 혹여 모를 불미스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아지트를 지키고 있었다.
마틴은 무너진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조곤조곤 졸고 있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다가온 어린 소녀가 마틴의 손을 잡으며 졸랐다.
“마틴! 마틴! 저쪽 벽에 같이 그림 그리자!”
“싫어!”
마틴은 피식 웃으며 소녀의 뺨을 꼭 꼬집었다.
그러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히기 시작했다
“어? 잠깐? 우는 거냐?”
이건 예상 못 했는지 마틴이 땀을 뻘뻘 흘리자, 바로 옆에서 무심히 돌을 던지고 있는 팡고가 투덜거렸다.
“좀 놀아줘라. 매일 그렇게 남한테 빈축만 사고.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 없지.”
“이 꼬맹이가!”
“아야얏! 아파!”
마틴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이번에는 팡고의 볼을 꽈악 잡아당겼다.
“훌쩍!”
그러다 자신의 옆에서 아직까지 흐느끼고 있는 소녀를 보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
“저쪽으로 가자.”
그 말에 소녀는 다시 헤실헤실 웃으며 마틴의 손을 잡았다.
“정말이지.”
마틴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소녀를 따라갔다.
잠시 후.
“푸하하하! 손이 썩었냐?!”
마틴이 그린 벽화를 보며 팡고는 배를 부여잡고서 전력으로 비웃었다.
벽화에 그려진 것은 분명 사람인데, 오징어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소녀는 굉장히 실망한 표정으로 마틴을 쳐다봤고, 마틴은 얼굴에 잔뜩 홍조가 피어오른 상태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대 맞고 싶냐? 꼬맹아.”
“어허! 틈만 나면 주먹을 쓰면 안 되지.”
팡고는 재빨리 소녀를 앞에 내세우며 몸을 움츠렸다.
마틴은 왼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팡고에게 말했다.
“너보다 어린 애를 방패로 쓰니까 좋냐?”
“이건 내 몸을 지키기 위한 현명한 조치라고.”
“말이나 못 하면.”
마틴은 한숨을 쉬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팡고랑 같이 밥 먹고 있어.”
팡고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벌써 밥 먹을 시간이네. 오늘 저녁은 뭐야?”
“귀리 죽이랑 야채찜, 호밀빵.”
쿠쿵.
팡고와 소녀는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밥을 안 굶고 사는 것에 대해서 마틴에게 정말 고마워해야 되는 거지만.
딱히 많이 바라는 것도 없다.
“누에콩과 베이컨이 들어간 따뜻한 스튜를 먹을 수 있드면 원이 없겠다.”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리지 마.”
마틴은 쓴웃음을 지으며 팡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파! 이씨! 머리도 엉망진창이네.”
“나중에 먹자.”
할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려던 마틴은 순간 멈춰 서더니 뒤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었다.
주홍색 실루엣과 겹친 그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는 일전에 낮에 마틴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준 칼이었다.
곁에 있는 제이크는 안절부절못하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여긴 어떻게 기어 들어왔지?”
“글쎄.”
마틴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려는 순간, 제이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안심하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폐촌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와 칼을 둘러쌌다.
“허억, 허억, 이 얍삽한 자식! 엄청나게 빠르네.”
숨을 헐떡이고 있는 부하들을 보며 마틴은 눈매를 좁혔다.
‘이 녀석들을 따돌렸다고?’
여기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이들 대다수는 마틴이 직접 훈련시켰기 때문에 기사와도 어느 정도 맞대응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의도를 알 수 없는 불청객의 방문에 마틴의 경계심이 점점 높아져 갈 때였다.
“앗! 마틴 손님 왔는데, 뭐 하는 거야!”
마틴을 쫓아오던 팡고는 칼을 알아보고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저녁 먹고 가. 내 야채찜 다 먹어줘야 된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칼의 손을 잡아끌었고.
“……?”
제이크와 마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분위기에 휩쓸려 팡고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