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슬링거의 진짜 모습을 본 칼은 적잖이 당황했다.
외형과 그 힘의 강함에 놀란 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힘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계의 마족들은 내가 전멸시켰는데, 그 뒤로 세피로트가 낳은 마족과 계약을 한 건가?’
마족이 중간계에 현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과 계약을 해야 한다.
전생 시절 칼이 쓰러뜨린 강대한 마왕, 로와델도 중간계 정복의 야망을 꿈꿨으나…… 벨리앗의 탄생으로 뒤로 미뤘어야 했다.
처음 슬링거를 볼 때 불쾌감이 치솟은 것은 바로 마족의 잔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근본은 거스를 수 없는 건가.’
칼이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을 무렵.
슬링거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칼을 조목조목 관찰했다.
‘이 남자. 대체 정체가 뭐지?’
프리메이슨의 정보망을 통해 칼이 어떤 남자인지 익히 들어왔다.
에클라 세트와 버금가는 인재이자, 최초로 이실리아의 수호 기사 호칭을 선사 받은 남자. 그 이력은 음지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었다.
알고 있다.
이 남자가 우수하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족에 대한 정보는 뛰어난 흑마법사조차 접하기 어려운 부문의 거였다.
수도 적지만, 무엇보다 발견되면 산크투아리움의 이단심문관들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칼에게는 들켜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 남자를 경계…… 아니. 거스를 수 없다고 해야 되는 게 옳은가?’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쿠구구구구.
칼은 심홍색의 불길이 피어오르는 듯한 눈으로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내뱉었다.
[계약한 마족의 이름은 뭐지?]
‘마족의 언어를 알고 있어?!’
절대적인 존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슬링거는 고개를 수그리며 즉각 입을 열었다.
[타, 탐욕의 왕, 마몬입니다.]
‘뭐 하는 버러지인지 전혀 모르겠군.’
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다가 다시 질문을 건넸다.
[프리메이슨의 간부들은 다 너처럼 마몬의 계약자인가.]
[마, 마몬하고만 계약한 것은 아니지만 간부들 대부분이 마족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마왕과 계약을 한 겁니다.]
“흐음.”
문득 호기심이 생긴 칼은 일전에 망령의 왕, 발바두스에게 받은 거울 페렛을 꺼내 슬링거의 모습을 비쳤다.
거울 속에 드러난 슬링거의 모습은 검은 마력이 짙게 깔려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본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빠찍!
콰앙!
이내 페렛은 마몬의 힘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그대로 금이 가 깨져버렸다.
칼은 지그시 눈매를 좁혔다.
‘이 녀석들도 세계 멸망에 가담하는 구성원 중 한 명이라는 거군.’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 슬링거에게는 세계 멸망이라는 거창한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간부로서 보물 창고를 수호하기 위해 둔갑한 것뿐이다.
‘프리메이슨이라…… 이 녀석들의 행동도 주시는 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로군.’
지금 당장 대치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기에 칼은 화제를 전환했다.
“금고문 열어.”
[알겠습니다. 바르.]
칼의 명령이 떨어지자 슬링거는 즉각 바르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바르는 칼에게서 받은 메노스 템벨의 인장을 거대한 철제문의 잠금장치에 박아넣었다.
덜커덩!
끼익!
굳게 잠겨 있던 장치가 해제되었다. 저절로 문짝이 열리며 그 안에는 화려한 금빛의 광채가 우러러 나왔다.
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탑처럼 쌓여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였다.
“세, 세상에!”
두 눈을 뜨고도 믿기지 않는지, 제이크는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였다.
‘다는 못 가져가겠군.’
설마 이 정도 규모의 금괴가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르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며 물었다.
“얼마만큼의 양을 출금할까요? 필요하시다면 아공간 배낭을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일만 골드를 지불하셔야 되지만요.”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절반.”
* * *
금괴를 챙긴 칼은 프리메이슨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다크 엘프 모렐을 해치운 뒤, 슬링거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거대한 욕조에서 여인들을 부대끼며 거품으로 목욕을 즐겼다.
“모습을 들켰는데, 괜찮겠습니까?”
칼의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바르는 우려스럽다는 표정으로 슬링거를 쳐다봤다.
“처음부터 내 힘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거지. 크크크. 오랜만이군. 마몬과 계약한 뒤로는 한 번도 공포를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저릿저릿!
슬링거는 아직까지 칼과 마주친 순간 느꼈던 감전이 된 것 같은 감각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본연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 그만이야. 해를 끼쳤다면 당연히 우리도 가만히 안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일은 우리의 실수로 벌어진 작은 트러블일 뿐이야. 너무 개의치 마.”
“……알겠습니다.”
바르의 얼굴에는 아직까지 걱정이 한가득했다.
이유는 칼과 슬링거가 보물창고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당시 제이크는 바르에게 받은 배낭에 금괴를 담고 있었고, 슬링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칼에게 말했다.
-외람스럽지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지?
-메노스 템벨뿐만 아니라 모든 음지의 세력들이 당신의 기행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희 프리메이슨도 마찬가지고요. 아! 딱히 협박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실을 일러준 것뿐입니다.
슬링거의 말에 제이크는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럼 그중에 하나만 본보기 삼아 박살 내면 되겠네. 헛짓거리하면, 죽는다는 걸. 너도 그 대상에 포함시켜줄까, 버러지?
진심으로 해보자는 눈빛에 슬링거는 오히려 자신이 덜컥 겁을 내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당시 칼의 눈에서 발출된 살기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천하의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남자니 나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슬링거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시가를 입에 물며 생각했다.
‘나머지 절반을 가지러 왔을 때,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는군.’
* * *
보물 창고에서 획득한 금괴가 담긴 아공간 배낭을 멘 제이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폴짝 뛰며 생각했다.
“이거 생각보다 무겁지 않네요, 사령관님.”
“정신적인 무게는?”
“……엄청나게 무겁죠.”
칼의 질문에 제이크는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배낭 안에는 알테어 영지를 족히 7년은 운영이 가능한 양의 금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수 없게 소매치기라도 당하는 날에는 역적 취급을 받게 된다.
‘날 데리고 온 것은 이것 때문이었네.’
엄연히 직책은 행정관이었기에 영지 운영에 쓰일 예산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는지, 그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은 너무나 투명했고, 칼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이다.
씨익.
신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제이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칼에게 물었다.
“근데, 사령관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기사단을 구축하려는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했다.
“간단해. 나 혼자만으로는 알테어를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이 남자가 한계를 인정하니까 신기하네.’
대수롭지 않게 해낼 것 같은 인상이어서 제이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칼이 방위하는 영지가 죽음의 땅 알테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이런 똥 멍청이!’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연신 쥐어박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제이크에게 전했다.
“병사들은 훈련해서 강해지는 것에 분명 한계가 있어. 하지만 숙련된 기사단의 힘이라면 어떨까? 너도 일전에 프루아의 반푼이 기사단들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생각나지?”
“무,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산이 기사단 육성에 집중적으로 키워져 앙금이 깊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기사단의 육성은 틀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사단이 있었기에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나온 것도 엄연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프루아 님의 기사단을 해고하신 겁니까.”
“일전에 말하지 않았나? 난 약한 놈들은 필요 없다고.”
‘그게 약한 거면, 대체 어떤 기사단을 만들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은 틀린 게 없으니 제이크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럼 알아보셔야겠네요. 기사단의 구성원이 될 사람들을…….”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칼은…….
스윽!
파앗!
뒤로 힐끔 시선을 뒤로 향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붙어있는 아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콜록! 콜록!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급하게 칼의 뒤를 쫓아오던 소녀, 팡고는 헛기침을 하며 칼의 손을 탁탁 쳤다.
“또 버릇없는 손재주를 발휘하려던 모양이군.”
칼은 그녀를 놓아주며 핀잔을 던졌고 팡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오빠 내가 미쳤어? 오빠처럼 감이 좋은 사람들은 절대 안 건드린다고.”
“그럼 나는 왜 건드린 거야?”
“아저씨는 음, 빈틈이 많아서?”
“크윽! 왜 나는 아저씨인데.”
제이크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어린아이한테 이렇게 무시당한 데다 심지어 아저씨라 불리니, 제이크가 받은 심적인 데미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무슨 용무로 온 거지?”
“아! 일전에 우리들 싸움에 관심이 많았잖아. 오빠도 구경 갈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누가 싸우는데?”
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자, 팡고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 아스피스의 무패의 전설이지.”
* * *
겉으로 보기에 아스피스는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도시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큰 도시일수록 음지의 세력도 짙게 깔리기 마련이다.
사실상 이 도시의 번영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프리메이슨이다.
하지만 그들은 보물창고를 지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다른 음지의 세력이 활동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위기를 겪을 때도 있지만.
하나의 룰이 이 뒷골목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많은 혼란을 방지해 주었다.
바로 싸움에서 진 패자는 승자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이 거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이것게 대해 유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백 년 가까이 이어진 정통과 문화였기에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지의 조직들은 하나 같이 그 룰을 준수했다.
그리고 약 2년 전부터 말도 안 되는 신예의 등장으로 인해 아스피스는 하나로 평정됐다.
212전 212승. 무패의 전설.
남자의 이름은 마틴 뵈제하워.
나이는 스물세 살로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전성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현재.
옅은 금발의 사내 마틴은 총명한 푸른 눈동자로 자신의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그보다 훨씬 체격이 큰 남자였다.
“크아아아악!”
2미터의 거대한 장신 남성은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마틴에게 위압을 주고 있었다.
“크크크크, 이런 꼬맹이 하나를 못 이겨서 나까지 부르다니, 기가 막히군. 어이! 너 들은 적 있냐? 난 살인마 도크만이다.”
“도, 도크만.”
그의 이름을 들은 주변의 구경꾼들은 이번에는 마틴이 상대를 잘못 만났다며 서로 속닥거렸다.
마틴은 찌뿌듯한 몸을 풀며 도도한 표정으로 도크만에게 말했다.
“거울 자주 보냐?”
“거울?”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마틴이 내뱉은 말을 되뇌던 도크만은 히죽 잇몸을 드러내며…….
“알 게 뭐야!!! 그딴 거.”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불시의 기습이었기에 막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
도크만은 믿기지 않는지 눈을 부릅떴다.
지금쯤이라면 자신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져야 하는 놈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콰앙!
하지만 알아도 대처는 할 수 없었고.
얼굴이 끔찍하게 터지며 피로 물든 도크만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마틴은 손수건으로 주먹을 닦으며 말했다.
“어차피 거울 안 본다면, 얼굴이 부서져도 상관없잖아.”
“미, 미친.”
“아, 네 걱정이 아니라 거울 걱정한 거다.”
“네놈!!!”
더할 나위 없는 굴욕에 도크만은 소리를 내질렀고.
콰직!
마틴은 인정사정없이 발로 그의 얼굴을 힘껏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