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아이고!”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노인을 보며 산적 우두머리는 이빨을 갈았다.
알테어에서 절대 보지 못할 아리따운 여인을 둘이나 발견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알테어에서 여자는 그들의 욕망을 극대화시켰다.
빠득!
‘이런 형편없는 놈한테!’
그런 와중에 노인이 감히 자신을 가로막았다는 것에 산적 우두머리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런 부실한 몸으로 뭘 어쩌겠어? 내가 저승으로 보내주지. 죽여!!”
우두머리의 명에 산적들이 일제히 발을 박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블리자드 스트링.”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디아나가 즉각 흑마법을 발휘했다.
쩌적!
그러자 노인을 향해 달려오던 산적들의 몸에 일순간 성에가 끼더니…….
콰아앙!
다수의 얼음 줄기가 그들의 몸을 서로 엮어버렸다.
“마, 마법사!!!”
깜짝 놀란 우두머리는 턱을 떨어뜨리며 경악했다.
이 흉지에 여자 둘만 돌아다니는 것에 의문을 품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여자를 봤다는 기쁨에 만끽한 나머지 물불 가리지 않고 온 게 큰 화근이 돼 버렸다.
쩌적! 콰아앙!
이윽고 디아나가 생성한 얼음 줄기가 우두머리에게까지 향했지만.
“이럇!”
잽싸게 눈치챈 우두머리는 말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디아나는 재빨리 캐스팅을 하여 그를 잡으려고 했으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만류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네. 편히 보내주지는 말게나. 죄를 지었으니 끔찍하게 죽어야지.”
움찔!
묘한 설득력에 마법을 시행하던 디아나는 손을 멈췄다.
“너희는 다 죽었어!!!”
디아나의 손에 벗어났다는 기쁨을 만끽하던 우두머리는 뒤로 돌아보며 쾌재를 내질렀다.
콰아앙!
그때 지나가던 와이번이 하얀 눈을 펄펄 흩날리며 말과 함께 우두머리를 급습했다.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와이번의 입안에 갇힌 우두머리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콰직!
와이번의 송곳니에 그대로 잘근잘근 씹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
그 끔찍한 죽음에 레인은 고개를 돌렸고.
디아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지상에 착지한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끼에에에엑!
아직 배가 차지 않았는지 녀석은 목표를 디아나와 노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크르르르르.
그러나 바그로바가 붉은 기운을 흩날리며 경고를 주자…….
움찔!
크게 놀랐는지 날개를 팔락거리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아.”
와이번과 대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해소되자, 디아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노인은 자신의 검을 어깨에 갖다 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거 참, 와이번도 눈빛만으로도 제압하다니. 나의 잠재력은 실로 대단하군.”
활약? 무슨 활약?
뻔뻔한 노인의 반응에 디아나와 레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뒤늦게 가장 중요한 점을 물었다.
“누구세요?”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아아 나 말일세. 이번에 알테어 영지에 새로 부임한 칼리언트 슈타크님의 종자, 리히트 가넷이라고 한다네.”
“…….”
두 소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얼마 안 가 그의 말을 완전히 파악한 디아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 * *
에스콰이어.
그것은 흔히 말해 기사의 종자를 의미하며…….
대개하는 역할은 기사의 밑에서 온갖 심부름과 장비 등을 챙겨주며 전장까지 같이 나가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전적인 의미이고.
라흐만 대륙에서는 기사가 되기 위해 밟는 중간 단계의 신분이었다.
‘슈타크고 뭐고 다 뒤집어 버릴까?’
칼은 자신의 앞에서 차를 후룩 마시며 ‘이 차 좋군요.’라고 헤실헤실 웃는 노인을 보며 골치가 아파 이마를 매만졌다.
왜냐하면 지휘관 파견 요청에 루드거가 보낸 사람이 바로 눈앞의 노인, 리히트였기 때문이다.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직 모르지만.
리히트의 나이는 어언 여든으로 엄청난 고령의 남자였다.
게다가 저 연륜에 아직까지 에스콰이어로 활동할 뿐, 기사라는 직함조차 달지 못했다.
또한 늘 죽음이 왔다갔다하는 알테어에서의 삶은 노쇠 몸으로 감내하기는 너무 가혹했다.
“후후후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이는군요.”
리히트는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칼을 빤히 쳐다봤다.
“……허리는 괜찮나?”
웬만하면 남의 사정 가리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칼이었지만.
리히트 앞에서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하하하, 제가 아직 20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니, 마음 말고 몸 말이야.”
“쿨럭, 쿨럭. 우욱!”
칼의 반박이 들리지 않는지 리히트는 죽을 것처럼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했다.
‘앞날이 캄캄하군.’
슬그머니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려고 할 때쯤, 루드거가 괜히 이 남자를 보내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칼은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여기 왔을 때, 느낌은 어땠지?”
칼의 질문에 리히트는 진중한 눈빛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아직도 부족하더군요. 그리고 10년 전에 토벌했던 오크들이 다시 군락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보강하는 데에 힘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구덩이 같은 함정을 파면 몬스터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으니 그런 방법도 써보시면 좋습니다. 하하하하, 이거 참 노인네가 참 주책없이 사령관님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군요.”
“……이 땅에 온 적이 있었나?”
리히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 번째 도전이 되겠군요. 그 전에 보필하던 분들은 모두 실패하고 자살을 하거나 죽었으니까요.”
리히트의 말에 칼은 의외다 싶었는지 눈매를 좁히며 그를 주시했다.
‘정말 나한테 필요한 남자를 보내준 거군.’
지휘관을 요청했지만, 유능한 지휘관들은 이미 다른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칼은 아직 알테어의 사정을 완전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인재는 당연 알테어를 겪어본 경험자였다.
뛰어난 군략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자칫하다가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리히트의 대답을 들은 이후, 칼은 머릿속의 고정 관념을 삭제했다.
그리고 말투 또한 평소처럼 냉철해졌다.
“기사가 되지 못한 이유는?”
민감한 부분을 찌르는 질문에도 리히트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건 제가 역적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역적?”
“약 70년 전, 저의 아버지는 슈타크 가문에 반란을 꾀한 적이 있었고, 응징을 받은 뒤 홀로 살아남은 저는 그 업보를 치르고 있는 거죠.”
무거운 이야기를 들은 칼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70년 전이라면 루드거 슈트크가 가주가 되기도 전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업보를 치르고도 남을 기한인데…….”
“반란의 대가는 평생 따라오는 겁니다. 잠시 탈의 좀 하겠습니다.”
그리 말을 한 리히트는 왼쪽 흉부에 찍힌 낙인을 보여주었다.
끔찍한 화상 자국을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는 거지?”
낙인 외에도 리히트의 몸에는 심각한 상처가 꽤나 많았다.
하지만 낙인에는 제약을 거는 마법적인 효과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즉 오늘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뜻이었다.
리히트는 허탈한 웃음을 내비치며 답했다.
“미련입니다.”
“미련?”
“모든 죄를 씻고 당당하게 기사로서 인정을 받는다. 업보는 업적으로 덮는다. 얼마나 숭고한 일입니까? 하하하하.”
“…….”
기사가 되고 싶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 노인은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획을 긋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잔꾀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려고 했다면 이곳 알테어에 다시 돌아온다는 선택지를 아예 고려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도망을 가도 아마 슈타크가에서는 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리히트는 결함이 있는 부속품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칼은 그 뒤로 리히트와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것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리히트의 성품이나 기량은 판단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칼은 팔짱을 낀 채로 리히트에게 말했다.
“나는 당분간 기사단을 설립할 예산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거야.”
“호오, 사령관님의 부재는 영향이 클 텐데요. 기한은 얼마나…….”
“최소 한 달. 그보다 더 단축시킬 수 있으면, 단축시킬 거고. 그동안 리히트, 당신이 알테어를 통솔하도록 해.”
“?!”
과감한 명령에 리히트는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제가 슈타크가에 앙심이라도 품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때 가서 죽이면 그만이야. 뼈저리게 후회하게 할 자신도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 아무리 그래도 지휘체계에 크게 문제가 될 겁니다. 기사도 아니고 일개 종자한테 그런 큰일을 맡긴다는 건…….”
“내 부재를 책임질 놈이라고 녀석들에게 공언할 거야.”
‘그, 그거면 되는 건가?’
리히트가 쩔쩔매며 곤혹스러워했지만.
칼의 한마디는 이곳 알테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날 이곳에 부임하면서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첫째는 여자와 애와 애는 전재 중에도 건드리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문제는 두 번째로 남긴 말이었다.
칼리언트 슈타크를 분노케 하는 자는 일 말 여지없이 죽인다.
딱히 칼이 철혈 통치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분위기에 압도된 영지의 병사들은 칼의 말을 깊게 새겨듣고 있었다.
칼의 말에 딴죽을 걸거나 의심을 품는 것은 그들에게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령관님의 명을 받듭니다. 무한한 영광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리히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겸허히 명을 받아들였다.
* * *
알테어의 행정실.
행정관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제이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관료들을 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안정시키기까지 꽤나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요령이 생긴 이후로는 다들 잔꾀 부리지 않고 일하니, 마음이 흡족했다.
‘최소한 봉급을 타는 입장에서는 성실하게 일은 해야지.’
제이크는 개선된 업무환경에 기쁨을 만끽하며 차를 후룩 들이켰다.
콰앙!
그러다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칼 때문에 깜짝 놀라 차를 쏟았다.
“앗, 뜨거워!”
행정 병력들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칼에게 경례했다.
제이크도 서둘러 그에게 경례를 하며 말했다.
“무,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30분 준다. 꽤 긴 여정이 될 테니까 옷가지 챙겨두고 업무 인수인계까지 다 해놔.”
“네, 네?”
당황한 나머지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지만, 칼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제이크는 주먹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으으으윽! 왜 맨날 중간 단계가 없는 거야!!”
사각사각.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신속하게 업무처리를 하며 명을 따르고 있었다.
* * *
알테어의 성문.
“허억, 허억.”
가까스로 여행 준비를 끝마친 제이크는 숨을 헐떡이며 칼의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칼을 배웅하기 위해 슈미트와 디아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준비해둔 마법 스크롤은 일곱 장입니다. 더 준비하고 싶었지만 여력이 없어서…….”
디아나는 칼에게 마법 스크롤을 건네주며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간 정신없이 알테어를 수호하는 일 때문에 스크롤을 더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쉴 때 쉬어라.”
칼은 인상을 찌푸리며 도리어 야단을 쳤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야.’
곁에서 보고 있던 제이크는 치가 떨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어라?’
칼의 말을 듣던 디아나는 기분이 좋은지 입가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이, 이분도 취향이 뭔가 독특한 건가?’
제이크가 어리둥절할 때, 슈미트는 끌끌 혀를 차며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기껏 챙겨주려고 한 말이 저렇게 야박하게 나온 것뿐이고, 그걸 알아먹은 디아나는 좋다고 실실거리는 거고.”
“슈미트님!!!”
“아따 고막 터지겠네.”
디아나는 얼굴을 홱 붉히며 슈미트에게 소리를 쳤고, 그걸 예상했던 슈미트는 양손으로 귀를 꼭 덮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제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숙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프루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보며 말했다.
“출발하지.”
“네, 네!”
칼이 걸음을 옮기자, 제이크는 엉거주춤하며 칼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