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칼이 알테어의 사령관으로 복귀한 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처음에 영지민들은 프루아 슈타크의 능력을 더 신뢰했지만.
그 고정관념이 깨지는 데에는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처음 그의 능력을 인지하게 된 것은 전투 행정관인 제이크 윌로우였다.
첫날 부임하자마자 행정 병력 전체를 통째로 해고하는 막장 짓을 벌였기에 다들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칼은 제이크와 둘이서 그 어마어마한 결재 업무를 단 이틀 만에 끝마쳤다.
설마 사령관이 직접 행정 업무에 관여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 제이크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눈으로 스윽 훑어보는 것 같으면서도 칼의 계산은 너무나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틀이나 걸린 것조차 순전히 제이크가 칼의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워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정말 죽을 뻔했지.’
그때 치른 고역을 떠올린 제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행정 업무가 끝난 뒤 칼이 내뱉은 발언을 떠올렸다.
-불만 있으면 빨리 사람을 뽑아. 전투 훈련도 같이 진행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프루아는 단순히 개새끼일 뿐이었어. 지금 사령관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고!’
“끄응!”
“흐압! 끄응!”
“허억, 허억!”
현재 제이크는 눈밭이 돼버린 훈련장에서 직접 선출한 전투 행정병 100명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력을 늘리기 위해 팔다리에 1kg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장을 돌았다.
백인장으로 선출된 제이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그들을 지휘했다.
“기합을 넣는다!”
“네!!”
제이크의 구령에 병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발을 박찼다.
‘아이고, 삭신이 쑤시네!’
팔다리의 근육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던 제이크는 순찰 업무에 나섰다.
카앙! 카앙! 카앙!
길거리를 순찰하던 그의 귀를 어지럽힌 건, 철을 두들기는 한 대장장이의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그렇게 두들기면 단단해질 것 같냐!”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신임 사령관이 데려온 드워프인 슈미트가 녹슬거나 못 쓰는 무기를 다시 새로운 무기로 제련하고 있었다.
“끄응!”
연세가 많은 대장장이부터 젊은 대장장이들까지 누구 한 명도 슈미트의 호통에 찍소리도 못했다.
주물 기술부터 제련 기술, 그리고 속도까지 슈미트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드워프인 그의 실력을 일반 대장장이하고 감히 비교하는 게 우습긴 했다.
그동안 쓸 수 있을 정도로만 빨리빨리 무기를 제조하던 대장장이들에게는 분명 좋은 배움의 기회였다.
슈미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 무기를 지참한 병사들에게 무기 관리법도 가르쳤다. 그는 병사들이 터득할 때까지 갈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외에도 농기구부터 생활용품을 만드는 능력까지 전파해 알테어의 내실을 다잡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속도로 진보하고 있어.’
그 속도가 제이크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제이크가 다음으로 간 곳은 부서진 성곽 쪽이었다.
성곽이 무너지는 것을 늘 있는 일이고.
몬스터들은 그 틈을 파헤쳐 난동을 벌였지만, 칼이 오고 나서는 이 부분도 확실히 보강됐다.
스윽, 스윽, 스윽.
부서진 성벽의 틈새를 신임 사령관이 만든 붉은 마력의 서킷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킷 근처에는 사령관이 데리고 다니는 흑마법사, 디아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워어어어어.”
때마침 아무것도 모르고 성벽을 돌파하려던 트롤은 서킷에 흐르던 전격 마법에 감전돼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트롤의 시체를 해체해 그 피를 뽑아냈다.
트롤의 피는 귀한 치료 포션으로 쓰이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인부들은 부서진 성곽을 메우는데 사력을 다했다.
제이크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웃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
시선을 느꼈는지 디아나가 슬쩍 쳐다보자…….
“크흠!”
제이크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로 굶주려 있는 영지민들에게 빵을 배급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제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 * *
“최악이군.”
집무실에서 알테어가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던 칼은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러 군데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 일일이 대처를 하기 어려웠다.
서킷을 활용해도 일일이 대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칼은 그동안 미루고 있던 사안을 실행할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기사단을 만들어내야겠어.”
그의 수족이 되어 영지 문제를 해결할 기사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사단을 만드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필요했다.
루콘 최강의 무가인 슈타크에서도 형제, 남매 중에서는 단 두 명만이 자신만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남 라마스와 삼녀 키이라 슈타크.
이 둘은 어렸을 때부터 무력을 인정받고, 주변의 후원과 약탈을 통해 자신만의 기사단을 구축했다.
물론 루드거 슈타크의 지원은 일절 없었다.
그렇기에 이 둘은 가문에서 영향력과 그 입지가 다른 형제보다 훨씬 강했다.
프루아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기사단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거였다.
그리고 이 점은 칼이 기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었다.
“예산 확보부터 시작해서 내 부재를 책임져줄 사람도 있어야 하겠군.”
첫 번째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었지만, 두 번째는 여러 가지로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루드거한테 도움을 받아야 되겠군.’
스스로 한계를 인정한 칼은 깃펜을 들어 양피지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슈타크가의 본가.
루드거는 각 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식들이 올린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전시는 아니었지만, 루콘의 굳건한 방위를 짊어진 만큼 그는 냉철하게 자식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 외로 빨리 도움을 요청하는군. 그만큼 알테어가 힘들기는 하다만.”
루드거는 특히 막내아들인 칼리언트의 편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집사 와튼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각별히 생각하시는 게 전해지는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고민에 빠진 루드거는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와튼에게 말을 건넸다.
“도련님께서 곤란한 것을 요청하신 겁니까?”
“애매하더군.”
“그 말씀은…….”
“지금까지 알테어를 맡기 녀석들 대다수는 예산지원을 요청했지. 물론 지원을 해줘도 실패를 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녀석이 요청하면 난 원하는 만큼 예산을 지원할 생각이었네.”
“그럼 대체 어떤 요청을 했길래…….”
와튼 스스로도 예산 지원을 요청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루드거는 양손을 모아 턱에 갖다 대며 말했다.
“지휘관을 요청하더군.”
“……역시 도련님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기질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흥미롭지 않은가. 언제나 내 기대 이상을 보여주니 말이야.”
“외람스럽지만, 누구를 보내실지 정하셨습니까?”
“리히트를 보내지.”
“리, 리히트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튀어나오자, 와튼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드거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남자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많이 실망할 것 같네.”
* * *
휘이잉!
눈보라는 그쳤지만, 여전히 살이 에이는 싸늘한 바람에 레인은 오들오들 떨었다.
“엣취!”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지만, 시녀인 그녀에게 있어서 알테어의 혹독한 환경은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웠다.
“추우면 말하라고 했잖아.”
디아나는 레인의 코트에 보온 마법을 걸어주었고, 코끝이 찡해진 레인은 디아나를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디아나도 힘든데 같이 오게 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녀들이 알테어 성을 빠져나와 숲을 돌아다니게 된 사연은 바로 바그로바 때문이었다.
최근에 야성에 눈을 뜬 건지, 녀석은 알테어에 오고 나서 험악해졌다.
그러다 이번 대낮에 벌어진 아울 베어가 영지민들을 습격한 일 때문에 레인과 같이 다니던 바그로바가 직접 사냥에 나섰다.
성체였다면 비슷한 덩치를 가졌을 테지만.
아직 어린 바그로바의 체격으로 아울 베어를 사냥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녀석의 어깨에 단숨에 올라탄 바그로바는 발톱으로 아울 베어의 오른쪽 눈을 할퀴며…….
콰앙!
전신에서 뿜어낸 알 수 없는 붉은 기류를 몸에 둘러 아울 베어를 압도했다.
압도적인 바그로바의 힘에 겁을 집어먹은 아울 베어 무리는 일제히 산개했다.
이때 바그로바도 같이 딸려갔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한 디아나는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분명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켰어. 칼리언트 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평소에는 애교를 많이 떠는 애완동물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바그로바가 신수중에서도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부류인지 깨달았다.
‘노빌레 레오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칼리언트 님에게 가장 큰 힘이 될 거야.’
물론 칼에게 과연 위기라는 것이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디아나는 바그로바를 찾기 위해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바바!”
그렇게 숲의 중턱에 진입했을 때였다.
끼잉. 끼잉.
바그로바가 눈밭에서 길을 잃었는지 낑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바!”
반가운 마음에 레인이 소리치자…….
바그로바는 반색하며 폴짝 뛰어왔다.
두그닥, 두그닥.
그때 어디선가 말을 타고 온 무리들이 갑작스레 디아나와 레인을 포위했다.
“…….”
레인은 바싹 겁을 집어먹어 어깨를 움츠렸고.
크르르릉.
바그로바는 다시 아까 같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그들을 경계했다.
디아나는 완드를 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누구시죠? 갑자기 저희를 둘러싼 이유가 뭐죠?”
거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무리 가운데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누구긴 누구야? 이 썩어빠진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적이지.”
‘죄수 출신들이군.’
디아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쯪 혀를 찼다.
죽음의 땅 알테어.
루콘과 아벤트로트, 그리고 사텐까지 영토가 맞닿는 이 지역에서는 죄를 저지른 죄수를 버리리는 형벌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몬스터의 먹이가 되거나 추위에 떨어 사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난히 강한 죄수들은 간혹 세력을 모아 산적 같은데 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꽤 반반하게 생겼구나. 얌전히 따라오면 내 처로 삼아주지.”
우두머리는 디아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크르르르르르.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디아나보다 먼저 바그로바가 으르렁거렸다.
“푸훗! 뭐야? 그건 고양이냐?”
바그로바의 살벌한 기색을 읽었는지, 디아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닥치라는데요.”
“크크크, 기고만장한 년이군. 뭐 그 점이 더 좋지만.”
디아나의 도발에 산적 우두머리가 들고 있던 철퇴로 바그로바를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저벅저벅.
로브를 둘러쓴 노인이 느닷없이 산적들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의 몸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뭐, 뭐야?!”
“?!”
귀신같은 은밀한 존재감에 산적 우두머리뿐만 아니라 디아나도 눈을 부릅떴다.
콰앙!
어느새 검집에 검을 뽑은 노인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의 철퇴를 후려쳐 멀리 날려버렸다.
우두머리는 넋을 놓고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허허, 어린 것한테 이런 흉측한 것을 휘두르면 되겠나?”
“뭐야? 영감탱이가 저리 안 꺼져!!”
분노한 우두머리가 쌍심지를 치켜뜰 때.
노인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럴 수 없네. 내 뒤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그의 뒤에 있던 디아나와 레인은 조금 당황했다.
‘사, 상당한 실력자다.’
우두머리는 긴장하며 예비로 마련한 철퇴로 급습했다. 하지만 그의 일격은 어김없이 노인의 칼날에 가로막혔다.
우드득!
그와 동시에 노인의 허리에서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내 허리!!”
격통을 호소한 노인은 허리를 짚다 맥없이 바닥에 넘어졌다.
“…….”
일순간 모두가 서로의 입장을 잊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