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백색 다이어 울프에게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콰아앙!
느닷없이 나타나 백색 다이어 울프를 두 동강 내버린 칼의 위용 찬 모습에 제이크는 넋을 놓았다.
‘갑옷도 안 걸치고 단신으로…….’
“움직일 수 있나? 제이크.”
“네, 네!”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자, 제이크는 허리를 벌떡 세우며 일어났다.
그는 칼이 일전에 성에서 만났던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 적잖게 당황했다.
‘이, 이 사람 대체 누구야?!’
대답은 칼이 아니라 기사단의 부단장, 마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위험합니다. 사령관님!!”
“사, 사령관.”
잘못 들은 거겠지.
일면식도 전혀 없는 칼의 험담을 늘어놓았던 것을 떠올린 제이크는 머리가 아찔했다.
크르르르르르.
칼의 등장은 사람뿐만 아니라 몬스터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기사들마저 농락하던 백색의 다이어 울프들이 털을 꼿꼿이 세우며 칼을 경계했다.
‘설마 다이어 울프가 떨고 있는 거야?’
자세히 보니 칼을 에워싼 백색 다이어 울프들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가운데 있던 애꾸눈의 우두머리 다이어 울프가 두려움을 떨쳐내고 발을 박찼다.
콰앙!
그리고 우두머리의 몸이 터지며 뼛조각과 털과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칼이 오러를 실어 걷어찬 다이어 울프의 시체와 충돌한 결과였다.
“마, 말도 안 돼!”
지금 벌어진 현상을 가장 잘 이해한 푸르아는 온몸이 경직됐다.
아오오오오!
반면 이대로 가면 전멸하리란 사실을 단번에 직감한 새로운 우두머리가 하울링을 내뱉자, 백색 다이어 울프들이 숲으로 발을 굴렸다.
지이잉!
그러나 이미 그들의 발을 디디고 있는 지면에는 붉은 서킷이 구현돼 있었다.
“라이징 볼트!”
군중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디아나는 곧장 4써클의 전격 마법을 칼의 서킷에 쏘아 보냈다.
파지지직!
라이징 볼트에 직격당한 백색 다이어 울프들은 새하얀 털이 검게 그을리며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저, 전멸?!’
프루아는 크게 놀라 동공이 흔들렸다.
싸워서 몰살을 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분산해서 도망치는 다이어 울프를 모조리 잡을 방법은 프루아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백색 다이어 울프를 전멸시킨 칼은 성곽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제이크가 아이를 안고 따라 들어왔다.
“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칼과 제이크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수그렸다.
“…….”
칼은 인사를 받는 대신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프루아와 그가 만든 기사단, 그리고 칼의 부름에 허겁지겁 집합한 행정 병력이 있었다.
칼은 그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너희 전원 해고야.”
“?!”
“?!”
예상치 못한 통보에 기사단을 비롯해 행정 병력이 눈을 부릅떴다.
행정 병력은 제하더라도 설마 기사단까지 단번에 잘라버릴 것이라고 예상 못 했던 프루아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기사단의 부단장, 마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칼을 설득하기 위해 애걸복걸했다.
주종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프루아에게 가면 그만 아닌가? 이견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프루아는 이만한 인원을 유지할 지지기반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태로 이들을 맡아봤자 감당하지 못한다.
남에게 줄 바에는 차라리 아예 못 써먹을 정도로 짓밟아 버리겠다는 칼의 지독한 심보였다.
“칼.리.언.트.”
그 속내를 어렴풋이 간파한 프루아는 정신이 미쳐 날뛸 것만 같았다.
그 증거로 그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충혈돼 있었다.
프루아의 살기에도 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크에게 그 답을 일러주었다.
“너무 약해. 근성도 없고.”
“……네?”
약하다고?
이 1년 동안 힘들게 키운 기사단이 형편없다는 취급당하자, 마크는 크게 당황했다.
칼은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의 손을 허리에 짚으며 말했다.
“이런 쓰레기들로 모인 녀석들로는 알테어를 정복할 수 없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손으로 더 강한 기사단을 만들지.”
‘그놈의 기사단?! 왜 이렇게까지 필요한 거야!’
뒤에서 칼의 선포를 듣고 있던 제이크는 이를 악물며 떨었다.
영지민을 위할 줄 아는 사령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았다.
반면 칼의 선포에 자존심이 제대로 짓뭉개진 프루아는 칼을 비웃으며 말했다.
“허세 부리지 마. 이 녀석들이 없으면 넌 한 달도 못 버티고 함락당할 거야.”
“그럼 너 가져. 난 필요 없어.”
졸지에 애물단지 취급을 당하자, 마크를 비롯한 기사단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누군가는 칼에게 앙심을 품었는지 눈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싸아아아아.
칼은 그런 기사단을 싸늘하게 주시하며 말했다.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은 두 가지만 알아먹으면 돼.”
‘두 가지?’
어떤 말이 튀어나올까 싶어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적이 아닌 여자와 아이는 전쟁 중에도 건드리지 않는다.”
‘뭐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제이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프루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사도라는 거냐? 좋아. 그럼 두 번째는 뭐지?”
“둘, 날 빡치게 한 새끼들은 자비 없이 죽인다.”
“…….”
내가 뭘 들은 거지?
아무리 혈기를 주체하지 못 하는 슈타크 가라지만 부하들에게 해도 되는 말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이 너무나 압도적인 기운을 뿜고 있다는 것이다.
꿀꺽!
칼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마크는 쭈뼛쭈뼛 설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두 번째 말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라는 건가.’
공포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을 때 마크의 이마에서는 흥건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크뿐만 아니라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칼은 그런 그들에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입고 있는 갑옷, 검 등의 장비는 다 반납하고 꺼져. 어딜 가서 슈타크 가문의 기사라고 지칭하는 것 또한 금지다.”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말에 기사단들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몸을 떨었다.
스윽.
이번에 칼의 시선이 향한 곳은 행정 병력이었다.
“사,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던 행정관은 거수경례하여 예를 표했고.
칼은 주머니에 손을 낀 채, 그에게 물었다.
“기사단 지원에 예산의 팔 할, 나머지 예산은 엉뚱한 쪽으로 쓰인 것 같은데. 일하기 싫나 봐. 피둥피둥 살이나 쪄서.”
“히익! 시, 시정하겠습니다!”
죽는다. 칼을 화나게 만들면 반드시 죽는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납작 엎드리며 애원했지만.
콰직!
칼은 인정사정없이 발로 그의 손을 뭉그러뜨렸다.
“끄아아아악!”
괴악하면서도 포악한 그 장면에 행정 병력 전원이 사색이 된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전 재산 징수, 그리고 추방이다.”
잔혹한 심판에 관료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바로 그때 제이크가 칼에게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그, 그건 안 됩니다.”
“호오.”
설마 자신의 말에 반박할 거라고 예상은 못 했는지 칼은 호기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유는?”
“여, 영지 운영에 큰 지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기사단 없이 병사들로만 이 땅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나름 용기를 내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칼은 냉혹하게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한번 기사단과 행정 병력을 보며 말했다.
“……쓰레기는 필요 없거든.”
칼의 선포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수룩했던 병사들은 칼의 위압적인 모습에 바싹 겁을 집어먹어 성곽 보수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기사단을 비롯해 행정 병력은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을 두고 알테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제인 프루아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1년 동안 공들였던 시간을 허망하게 잃은 그의 얼굴은 절망 그 자체였다.
알테어 사령관의 집무실.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프루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각시킨 칼은 책상에 앉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일전에는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칼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이는 이번에 갑작스럽게 직위가 오른 행정관, 제이크였다.
그는 아직까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보다 어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있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오만했다.
하지만 이 남자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남자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프루아의 지배 체계를 박살내는 걸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사과는 됐어. 그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어.”
꿀꺽!
이 남자, 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거지?
나 죄지었나?
조마조마했지만 그는 별 것 아닐 거라는 마음으로 칼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병력이 부족해. 전투 병력으로 보직 바꿔. 백인장으로 승격시켜주지.”
쿠쿵.
긴장은 단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
제이크는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천정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진정하자. 이 미친 전장에서 전투병으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어.’
그는 단호한 시선으로 칼에게 말했다.
“사령관님. 외람스럽지만, 행정 보직도 인력이 모자랍니다. 지금도 예산 관리 문제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책임자인 저까지 나가면 안 됩니다.”
“호오, 명령 불복종인가?”
‘이것 봐라.’라는 뉘앙스의 말투에 제이크는 크게 움찔했다.
하지만 이미 사생결단은 했다.
‘절대 전선에 나갈 수는 없어!!!’
그는 의기를 다잡고 칼에게 마지막 애원을 했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충심입니다. 헤아려주십시오.”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제이크를 보며 칼은 피식 웃었다.
“잘됐군.”
“네?”
드륵.
미리 준비한 건지, 서랍을 열어젖힌 칼은 결재 문서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방법을 내가 찾아냈거든.”
“……이, 이건.”
결재 문서를 살펴본 제이크는 절망에 빠져 흰자위만을 남긴 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 *
끼익!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며 제이크가 튀어나왔다.
“어, 어떻게 됐어?!”
혹시 문책이라도 당할까 싶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절친 프란츠가 다가왔다.
“후후후후.”
제이크는 대뜸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무섭게.”
긴장한 프란츠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크는 방금 전에 칼이 내뱉은 말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전투행정병이란 보직을 새로 만들었어. 문무 다 겸비하는 게 좋지. 애 써봐.
제이크 윌로우. 전투 행정 부대의 백인장 보직을 임명받다.
“으아아아악! 이 미친 또라이 새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제이크는 옆머리를 북북 긁으며 신임 사령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