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알테어에 입성한 첫날.
프루아와 면담을 마친 칼은 정보책을 통해 어떤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 마을 외곽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가벼운 산책이 될 줄 알았던 걸음은 눈보라를 맞닥뜨리자, 고난의 행군이 되었다.
“엣취! 추워!!”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는지, 슈미트는 두꺼운 코트로 자신을 감싸며 벌벌 떨었다.
그와 나란히 걷고 있던 디아나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언제는 모루와 망치만 있으면 대장장이는 어떤 환경에서든 살 수 있다면서요. 오자마자 이러시면 칼리언트 님께 크게 민폐잖아요.”
“했던 말 취소, 취소! 아니 그보다 넌 내가 아픈데, 저놈 챙기는 게 더 중요한 거야?”
“당연하죠.”
“나랑 저 녀석이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건데.”
“칼리언트 님이요.”
“…….”
즉답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슈미트는 희뿌예진 콧잔등을 꼭 누르며 흐느꼈다.
“그동안 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는데. 흑.”
“언제 키워주셨다고 그래요?”
디아나는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홱 쏘아보다 곧 앞에서 걷고 있는 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약 20분쯤 더 걸어 도착한 곳에는 눈이 쌓인 무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여긴가.”
저벅저벅.
무덤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칼은 망설이지 않고 한 무덤 앞에 섰다.
「수호기사 루크, 영원한 안식을 취하다.」
“……이건.”
디아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칼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작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비석을 응시하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먼저 떠나면 어쩌자는 거냐? 네가 필요했는데.”
드물게 솔직한 마음을 밖으로 내뱉은 칼은 손에 들고 있던 브로켄 몽타뉴 술병의 마개를 뽑아 무덤 앞에 콸콸 쏟았다.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칼이 애도를 표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사망한 이유가 프루아와 관련이 있는 줄 알았지만.
조사해본 결과, 그거랑 상관없이 루크는 이 험악하기 짝이 없는 알테어의 시련을 감당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무덤 주변에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땅은 슬픔이 가득하군.’
고난이 가득한 땅, 알테어.
칼은 이곳을 평정하는 게 자신의 첫 시련이라 생각했다.
* * *
매일매일 전장을 헤쳐가며 몬스터를 퇴치하는 게 일이라고는 하지만.
알테어에도 엄연히 행정적인 절차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또 안 맞아.”
행정집무실에서 예산을 관리하는 신입 관료 제이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매년 왕국에 엄청난 재정을 지원받고 있음에도 적자를 메우는데 급급한 게 이곳 알테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루아가 사령관으로 온 이후로 그 손해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놈의 기사단을 구축한다고 다른 곳의 예산을 충당할 수 없잖아.’
성벽 유지보수부터 시작해서 구휼 식량 확보까지, 해야 할 일에 비해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끄응, 대충해. 어차피 프루아 님이 알아서 할 텐데.”
그런 제이크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행정관은 대낮부터 취해 코까지 빨개진 상태로 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이 화상들이!!’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으로 저 코를 콱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들어온 안정적인 직장이었기에 제이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전선에 들어왔으니, 그렇게 안정적인 건 아닌가.’
이곳 집무실에 있는 행정 병력은 군병력에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바깥에서는 죽는 사람이 늘어가는 반면, 행정 병력은 태만하게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피둥피둥 살만 찌고 있었다.
‘프루아 그 자식이 오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어.’
슈타크 가의 4남, 프루아 슈타크.
그는 확실히 기사로서 발군의 솜씨를 가지고 있고 여러 차례 알테어의 위기를 막아왔다.
하지만 정작 방비를 위한 준비는 소홀히 하고 자신의 기사단을 구축하는 데만 전념했다.
차후 가주가 되겠다는 야욕에 알테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행정관들의 업무 태만을 방관하고, 은근히 예산을 빼돌리는 것 역시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이런 위험이 노출된 환경에서 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해 방비 태세를 게을리하다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지경이었다.
피식.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제이크를 보며 상사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렇게 혼자 깨끗한 척하지 마. 어차피 이곳은 슈타크 가문이 지키고 있으니까 절대로 무너질 일도 없다고. 실제로 사령관님도 용인해주고 있잖아. 우리의 힘든 사정을 이해해 주는 거라니까?”
“…….”
대답할 가치가 없는 개소리였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는지 제이크는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잠시 후.
북도를 거닐던 중 동행하고 있는 동료인 프란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자, 제이크는 양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소리쳤다.
“아아악! 진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또 그런다.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그래?”
프란츠는 알테어의 방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해박하지 않았다.
“예산이 부족해. 이러다가 적들한테 죽기 전에 파산하게 생겼어.”
“그 정도야. 근데 파산이 뭐야?”
농사를 짓다 징집당한 프란츠에게 있어서 파산은 난생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어쩌다가 이 녀석이랑 친구가 됐는지.’
제이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했다.
“……영지가 가난해서 쫄쫄 굶게 생겼다는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울컥!
제이크는 결국 인내심 바닥나 폭발했다.
“아악! 빌어먹을 부조리한 자식들!!! 뒤룩뒤룩 살만 찌고 운동을 쳐 안 하니까. 셈법을 못 하는 거지!”
“듣겠다. 조용! 조용!”
“우웁!”
씩씩대는 제이크의 입을 잽싸게 막은 프란츠는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지 지나가는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아.”
제이크는 프란츠 덕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프란츠는 그런 제이크를 보며 말했다.
“이거 사실 비밀인데.”
“응. 그래. 너가 아는 비밀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 같다만. 말해 봐.”
프란츠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제이크의 귀에 속삭였다.
“이번에 새로 온 사령관님이 오니까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거 공지 내가 한 걸걸.”
그럴 줄 알았다.
제이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프란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분명 새로 부임하는 사령관이란 녀석도 얼마 못 버티고 프루아처럼 해괴한 짓이나 벌이겠지. 여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프란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진짜야?”
순진무구한 시골 총각의 질문에 제이크는 뜨끔하며 말했다.
“지, 진짜일걸.”
“근거 없는 소리 늘어놓지 마.”
“근거 없긴 뭐가 없어. 지금 여기 개판으로 돌아가는 거 안 보여? 누, 누구야?!”
울컥해서 등을 돌리며 반박했던 제이크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눈앞에는 코트를 걸친 심홍색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그 뒤로는 어린 사자가 졸래졸래 쫓아왔다.
‘소, 손님인가?’
“시, 실언을 했습니다.”
복장으로 봤을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이란 것을 깨달은 제이크는 재빨리 고개를 수그렸다.
어벙벙하게 있던 프란츠는 엉거주춤 제이크를 흉내 내 고개를 수그렸다.
“됐어. 틀린 말도 아닌데.”
칼은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검지로 제이크를 가리켰다.
“너.”
“네, 네!”
묘한 박력에 제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양 뒤꿈치를 붙이며 절도 있게 답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제이크 윌로우입니다. 하급 행정관으로 알테어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기억해두지.”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뭐, 뭐야?’
제이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칼의 등을 쳐다보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훗날, 제이크는 험담을 늘어놓는 자신의 입을 연신 때리며 대성통곡을 해야 했다.
* * *
사령관 집무실.
책상에는 프루아가 준비한 인수인계 서류가 한가득 있었다.
파라라락.
칼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그것들을 읽어나가며 자신의 앞에 있는 프루아에게 물었다.
“뒤에 딸린 놈은 누구지?”
‘적어도 보고 말해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프루아는 자신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부기사단장을 소개했다.
“마크 필립이야. 이번에 너에게 인계할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지. 5성급의 오러 유저야.”
프루아는 마크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일단은 마크를 알테어에 남겨두지만 훗날 자신이 기사단을 만들면 다시 빼앗아 갈 생각이었다.
“만나 뵙게 영광입니다.”
마크는 절도 있게 칼에게 예의를 갖췄고 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건성 대는 그 태도에 프루아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탁.
때마침 서류의 반절을 읽은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산을 관리하는 행정 병력은 어디 있지?”
“집무실에 있겠지. 그게 왜?”
“바깥에 집결시켜. 속옷만 남기고.”
“네! ……잘못 들었습니다?”
절도 있게 답하려던 마크는 칼이 늘어놓은 황당무계한 소리에 크게 당황했다.
“무슨 헛소리야!”
푸르아가 정색하며 소리치자, 칼은 지그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일전에 경고했을 텐데. 너무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이야.”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자꾸 기어오른다.”
분을 참지 못한 프루아는 슬며시 기운을 뿜어내며 칼과 대치했다.
둘 다 슈타크 가문답게 그 기세가 매우 흉흉하고 불길하기가 그지없었다.
꿀꺽!
곁에 있던 마크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목에 고인 침을 삼켰다.
바로 그 순간.
콰앙!
거칠게 문이 열리며 전령이 칼과 프루아에게 긴박하게 보고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백색 다이어 울프들이 대거 몰려와 영지민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 * *
부서진 성곽 안으로 대거 몰려온 새하얀 포식자들은 침을 겔겔 흘리며 마을을 습격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카아앙!
“사, 살려줘! 크아아악!”
흉포한 송곳니와 2미터는 돼 보일 것 같은 거대한 크기에 놀란 영지민들이 달아나려고 했지만.
백색 다이어 울프들은 그들을 조롱하듯 이빨을 박아 넣었다.
카앙! 카앙! 카앙!
바로 그때, 말을 탄 기사단이 대거 몰려오면서 백색 다이어 울프와 항전을 벌였다.
푸욱! 푸욱! 푸욱!
숙련된 기사답게 그들의 창과 칼에 다이어 울프들이 죽어 나갔다.
아오오오오오!
점차 그들의 포진 속에 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한쪽 눈에 깊은 흉터가 있는 우두머리 다이어 울프가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이어 울프들은 일제히 후퇴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식욕이 남아있는지 다수의 다이어 울프가 한 아이를 에워쌌다.
“아, 안 돼! 내 아이! 제 아이를 구해주세요!”
졸지에 아이가 납치당한 여인은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호소했지만.
“저리 꺼져! 어디에다 손대는 거야!”
“꺄악!”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단 이유로 기사는 여인을 매몰차게 걷어찼다.
때마침 순찰을 나온 제이크는 그 광경을 보며 소리쳤다.
“이익!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이가! 아이가 위험하잖아!!!”
“차, 참아. 제이크.”
프란츠가 제지하려고 했지만, 제이크는 다이어 울프들의 틈을 파헤쳐 아이를 감싸 안았다.
콰직!
“크윽!”
제이크는 그 와중에 백색 다이어 울프에게 어깨를 물렸다.
두꺼운 코트를 입지 않았다면 어깨가 통째로 도려졌을 것이다.
“크윽!”
아이를 꽉 껴안은 제이크는 고통과 자신을 노리고 이빨을 세우는 다이어 울프들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기사들은 성곽 밖이라고 소극적인 대처만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빨을 가는 순간.
크아앙!
다이어 울프 중 한 마리가 제이크를 물기 위해 발을 박찼다.
“제이크!!”
깜짝 놀란 프란츠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고, 제이크는 그대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그때 눈을 가르며 날아온 붉은 오러가 그대로 다이어 울프의 몸통 역시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 이게 무슨?!”
느닷없는 엄청난 굉음에 깜짝 놀란 제이크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칼이 제이크와 아이를 등진 채, 거만한 눈으로 다이어 울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