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무뚝뚝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칼의 기백은 하늘까지 치솟을 것만 같았다.
주륵.
그 모습을 본 칼의 형제자매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루콘 최강의 무가의 출신이기에 깨달을 수밖에 없는 진실.
칼의 힘은 완성된 강함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강함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그 힘은 이미 여기에 있는 대다수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이게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힘.’
흔히 무인이 쓰는 오러는 검과 신기하리만큼 궁합이 잘 맞는 힘이었다.
한데, 그 오러를 주먹에 실어 휘둘렀는데도 검 이상의 힘을 발휘했으니, 칼의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칼은 지그시 모두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들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
그 기백에 모두가 선뜻 반박하지 못했고,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검이 부러지면 목을 내놓을 참입니까? 상대의 검이 부러지면 우월감에 젖어 웃다가 눈먼 칼에 맞을 생각입니까?”
칼의 검이 부러질 때, 가장 먼저 웃었던 형제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빨개졌다.
콰앙!
칼은 지면을 강하게 발로 내리찍었다.
“?!”
대다수의 사람이 깜짝 놀란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고, 칼은 냉담하게 말했다.
“칼리언트 슈타크다. 날 평가하려고 하지 마. 도전이라면 언제든 받아주지.”
칼은 그대로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형제들을 스쳐 지나갔다.
루드거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은 확실히 형제들에게 거만을 떨 정도의 실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스윽.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칼이 부스러뜨려놓은 인조 아다만티움을 보다가……
“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 모습에 키이라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지금까지 자식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라마스가 여섯 장의 석판을 베어 가를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꽈악!
그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라마스는 주먹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쥐며 떨었다.
누가 봐도 잠재성으로는 칼리언트가 확실히 우위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칼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오길 기다리던 레인이 상의를 훌쩍 벗고 돌아온 칼을 보며 기겁했다.
“공자님!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갸르르릉!
레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바그로바는 칼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칼은 그런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레인은 칼의 손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른쪽 주먹에는 피가 철철 흘러넘쳤고 손목은 크게 부어 있었다. 레인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칼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고, 공자님 얼른 의사한테 가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통증이 심했지만 지금 와서 의사한테 가는 것도 꼴불견 같았다.
“됐어.”
“알겠습니다. 방에서 치료할게요.”
칼의 고집을 알고 있던 레인은 준비되어 있는 약을 상처에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똑똑.
바로 그때 열린 문에서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키이라 슈타크가 비어벨을 들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을 깜박한 것 같아서.”
“직접 온 이유는?”
본래라면 슈타크가의 시종이 왔어야 됐지만, 키이라가 고집을 부려 가져온 걸로 보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치료를 받고 있는 칼에게 말했다.
“형제들한테 선전포고도 했으니, 존칭은 생략하는 건가.”
위계를 어지럽히는 행위였지만 키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갔다.
“왜 돌아왔지? 이 지옥에…….”
대신 그녀는 무척이나 어두운 표정으로 귀환한 이유를 물었다.
칼을 치료하고 있던 레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곁에서 가장 칼을 많이 지켜봤던 이는 바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봐도 슈타크가에서 학대를 받은 칼이 이곳으로 돌아올 이유는 없었다.
못해도 3년의 기한을 꽉 채우거나 아니면 영영 이실리아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하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키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리따운 다홍색의 눈과 은은히 타오르는 심홍색의 눈은 비슷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의 색을 구분하고 있었다.
칼은 거만하게 고개를 추켜세우며 키이라에게 말했다.
“지옥이라고 했는데, 내가 파르테스에서 봤던 녀석들이랑 비교하면 별 볼 일 없어.”
키이라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나나 라마스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에클라 세트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나 보지.”
“다른 녀석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 녀석한테는 절대 못 이겨.”
칼은 머릿속에 데제스 싱클레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와 경쟁했던 나날을 생각하면, 오히려 슈타크 가문의 내분 정도는 새 발의 피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 녀석은 분명 페트로 이상으로 사고 칠 녀석이야.’
분명 서로 인사말도 없이 헤어졌지만.
칼은 언젠가 반드시 그와 재회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에는 인사말 하나 없이 검 끝을 서로의 가슴에 겨눌 것이다.
칼은 그때를 대비해 알테어를 정복하고 슈타크 가 평정해야 했다.
“우리 동생, 누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살짝 위협을 하려는 의도였는지, 키이라는 비어벨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바로 그 순간 비어벨의 손잡이에서 기이한 진동 일어나더니 키이라의 손아귀를 뒤흔들어놓았다.
“그 녀석 내 앞에서만 온순한 거지, 제법 사나운 놈이야.”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칼은 피식 웃으며 괄시하는 미소를 지었다.
“명검은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거잖아. 우쭐대지 마.”
자신이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키이라는 비어벨을 칼에게 던졌다.
왼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칼은 그대로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군.”
오만해서 그렇지.
직접 이야기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녀석이란 것을 깨달았는지 키이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아까 잔에 독이 들어있었다는 거, 그냥 허세야? 아니면 진짜야?”
제아무리 계승권을 놓고 경쟁을 할지라도, 대놓고 가주가 있는 앞에서 암살을 시행하는 간 큰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내가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라도 있을까?”
칼의 반박에 키이라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진짜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어렸을 때는 귀여운 구석도 있었는데.’
지금은 귀여운 구석은커녕, 온갖 권모술수와 역경을 헤쳐 나온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파르테스의 수석은 다를지도 모르겠네.’
키이라도 역시 파르테스의 출신으로 나름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수석을 하지 못한 것은 특기가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루콘 최강의 무가 출신이라고 문무를 모두 겸비하는 것은 어려웠다.
피식.
기억을 되짚던 키이라의 머릿속에서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너 맥캘리 제자라며?”
움찔!
예상치 못한 말에 칼은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은 레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칼이 진지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키이라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 녀석 아직도 조그맣지. 그 성격을 볼 때, 아직도 땍땍댈 것 같은데.”
“…….”
정곡이 찔렸는지 칼은 대답하지 못했다.
붕대를 다 감은 레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는 것 같은데요.’라고 답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키이라에게 말했다.
“……의외로 나이 많았구나.”
미소를 지은 채, 이마에 핏대가 돋아난 키이라는 방안에 장식품으로 둔 수정구를 있는 힘껏 던졌고.
덥석!
칼은 대수롭지 않게 오른손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그와 동시에 가까스로 지혈했던 상처가 터지며 붕대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꺄악! 어떡해!!!”
당황한 레인은 허둥지둥거리며 다시 치료를 해야 했다.
* * *
지역적인 특색 때문에 엄숙한 질서와 위계를 강조하는 슈타크 일가지만.
적어도 가문의 구성원들이 모이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는 알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형제자매들 모두 이 행사를 꺼려했다.
하지만 가문의 규칙이니 애써 분란을 만들지 않고 화목하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 증거로 늘 허리에 찼던 검이나 무장 대신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으며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란 걸 알고 있던 칼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칼은 키이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칼은 포크로 파스타를 감았다.
주변에 있던 형제들은 낮에 칼이 벌인 행적 때문에 쭈뼛거리며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너 원래 이렇게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이었냐?”
“글쎄. 올 놈들은 알아서 오더라고.”
피식.
키이라는 와인을 홀짝 들이킨 뒤, 진중한 눈빛으로 물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데? 제안 하나 해도 될까?”
“뭔데?”
“네가 알테어에 기반을 잡을 때까지 협력해줄게. 대신 나와 동맹을 맺자.”
가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내민 제안.
다른 형제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법했지만, 칼은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남의 도움은 필요 없어.”
“너 진짜 고집이 세구나.”
나름 고민을 거친 뒤 제안을 한 키이라는 이렇게 차갑게 거절할 거라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우면서 동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한창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벌써 가문 내에서 정치질을 할 수작인가? 호호호호, 이거 어리다고 얕봤는데, 만만치 않은데.”
우아한 장밋빛 드레스를 걸쳐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머리에 티아라를 얹고 귀걸이를 낀 여인은 정열적인 미를 내뿜고 있었다.
파스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둔 칼은 그런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홱!
키이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아줌마는 누구야?”
“아, 아줌마?”
모욕적인 호칭에 여인의 안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키이라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락티아 언니잖아. 아, 그새 나이가 들어 보여서 못 알아본 건가?”
그러곤 이죽거리며 락티아를 바라보았다.
“흥!”
락티아는 가볍게 그녀를 무시하며 칼에게 말했다.
“키이라는 기품이 부족할뿐더러 정치적인 상황을 계산하지 못해서 동맹을 해도 별 이득이 되지 않아. 하지만 나라면 달라.”
“저기 언니.”
키이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어라고 반박할 때, 칼은 팔짱을 끼며 락티아에게 물었다.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알테어로 돌아가야 할 텐데, 내가 무산시켜줄게. 형제들이라면 많잖아. 다른 곳에서 기반을 쌓으면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넌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칼은 슬며시 락티아를 바라보았다.
아리따우면서도 표독스런 그 눈빛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몸 곳곳에 뿌린 지독한 장미향 속에 가려진 기분 나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범인이라면 눈치 채지 못 했을 테지만, 칼은 분명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이내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빈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설마 나한테 술을 따르라는 거야?”
락티아는 은연중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키이라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당당하게 따라. 몰래 따르지 말고. 가지고 있잖아? 독.”
청천벽력 같은 말에 락티아는 움찔 어깨를 떨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